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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언덕> 창작의 비밀을 묻은 언덕을 당신에게 보여줄게요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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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언덕 – 창작의 비밀을 묻은 언덕을 당신에게 보여줄게요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은 자의식이 강하고 계급관계에 민감한 아이이다. 명은은 반장이 되어 담임선생님에게 관심을 받고 반 친구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부모는 그런 명은을 이해하지 못하고 명은이 집안 형편에 맞지 않게 반장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명은 또한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부모님이 부끄럽다. 명은은 가난하고 궁상맞은 자신의 가족이 싫어 학교에 부모의 직업을 속여 말한다. 명은이 글짓기 대회에서 글을 쓰는 것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다. 명은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인 ‘환경 보호’, ‘평화통일’에 관심이 있고, 그것들을 신경 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던 중 같은 반으로 전학 온 혜진과 그의 쌍둥이 자매 하얀이 최우수상을 받고 난 후, 명은은 그들을 의식하게 된다.
혜진과 가까워지게 된 후 명은이 듣게 된 쌍둥이 자매의 글쓰기 비법은 자기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다. 가족의 직업을 속인 명은과 달리 혜진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는 아가씨 골목에서 사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하지만 ‘솔직함’이란 것은 명은에게 가장 멀리 있는 가치였다. 명은은 쌍둥이 자매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글쓰기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창작자가 작품에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창작할 때의 필수요건이다.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느 정도 감출 것인가? 나를 너무 감추면 사람들에게 가닿지 않고 나를 제하면 생명력 없는 사실들만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드러내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진짜 생각을 드러냈을 때 누군가는 상처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 대상은 그 글을 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쌍둥이 자매가 쓴 글에는 누가 듣기에도 평범한 범위를 넘어선 가정사가 담겨있다. 혜진과 하얀은 자신의 취약함을 당당히 드러내는 내용으로 글을 써 상을 탄다. 명은은 쌍둥이의 전략을 따라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솔직한 글을 써 최우수상을 타게 되지만, 결국 그건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수상을 포기한다. 그 이유를 묻는 담임에게 명은은 ‘가족이 상처받을까 봐 무섭다’고 쪽지에 적어 비밀 우체통에 넣은 뒤 담임이 직접 그걸 꺼내보게 한다.
명은은 정말 자신의 가족이 받을 상처가 무서워 수상을 포기했을까? 명은은 부모에게 화를 낸 뒤 연락을 끊고 가출까지 한 상태이다. 명은의 부모는 이미 명은이 자신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은이 무서워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가족이 상처받을까 봐’가 아니라, 자신이 가족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자신과 가족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전략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의 무기이다. 명은은 쌍둥이의 전략을 따라 해 글을 쓴 이후에야 자신이 사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명은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부모가 있고, 가출했을 때 안전하게 보살핌 받으며 지낼 수 있는 친척이 있으며, 한 지역에서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이 있다.
이 영화는 명은의 글쓰기에 대한 영화이자 감독이 갖는 창작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영화 속 명은의 글쓰기와 닮아있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아는 진실과 조사한 자료들을 그럴듯하게 갈무리 지어 내보이는 명은의 글쓰기처럼, 영화 <비밀의 언덕>또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을 여러 군데에서 취사선택해 말끔하게 도려낸 다음 명료한 화법으로 정확히 전달한다. 여성 청소년의 성장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들>(2016), <벌새>(2019), <남매의 여름밤>(2020)과 함께 언급되었지만 <비밀의 언덕>에는 앞선 세 작품이 보여주었던, 감독의 고유한 시선과 스타일이 부재한다. <벌새>가 가정폭력과 성수대교 붕괴 등의 개인적, 사회적 외상적 사건들을 여성 청소년의 성장 서사 안에서 고유한 시대적 풍경으로 묘사해 내고, <우리들>이 10대 시절에 겪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섬세한 필치로 생생하게 그려내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내었으며, <남매의 여름밤>이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스타일을 습득하여 한국 소녀의 성장담으로 풀어냈다면, <비밀의 언덕>에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취사선택한 과거라는 배경과 그 배경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가까운 감각을 지닌 등장인물의 어긋남이 있을 뿐이다.
먼저 <비밀의 언덕>의 배경인 1996년에 대해 생각해 보자. 1996년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불리기 시작한 첫해인 동시에 1997년 IMF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이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즉 1996년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 불렸을 때만큼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멀게 느껴지는 과거가 아닌 동시에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사회적 사건들을 모조리 빠져나가는 틈새이다. 감독은 이 잠깐의 틈새를 공략하여 1990년대를 안전한 노스탤지어의 공간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 배경 위에 놓인 주인공 명은의 감수성 또한 1990년대의 10대라기보다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의 감수성과 더 맞닿아 있다. 그때도 부모가 가난하면 부끄러워하거나 직업을 가짜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부모의 직업만을 이유로 해서 반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공격당하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명은은 마치 자신의 부모의 진짜 직업이 알려지면 사회적인 매장이라도 당할 것처럼 극도로 예민한 모습을 보여준다. 명은은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의 직업을 가짜로 적는 걸 넘어서 남의 회사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인터뷰를 빙자해 생판 모르는 남자 어른과 함께 사진을 찍고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 친구들에게 말한다. 또 부모가 싫다는 이유로 가출을 해서 피도 안 섞인 양 할아버지와 양 삼촌의 집에 가서 며칠이고 머물기도 한다. 이 예민함과 과도함은 단순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소녀의 것이라기보다는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성공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감각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계급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모습에 더 가깝다.
친구들 간의 관계의 묘사 또한 이상하다. 한국 영화의 관객들은 <우리들>을 통해 10대 시절 교우관계가 얼마나 민감하고 정치적인 문제인지를 기억해 냈다. 하지만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의 친구들은 단지 친구 1, 2, 3으로 등장할 뿐, 아무런 독립적 서사와 개성을 부여받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명은은 한 그룹에서 친구 세 명과 어울리다가 쌍둥이 자매에게 관심을 가진 뒤 바로 그 둘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데, 실제 초등학교 안에서 이런 식으로 기존에 어울리던 그룹을 벗어난 교우관계를 급작스럽게 맺게 되면 굉장히 큰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아무런 묘사나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명은의 관심인 권력자 – 선생님, 회장 -을 벗어난 인간관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넘어 최소한의 핍진성조차 없이 넘어가는 것이다.
화면 구도와 편집 기법에서도 어떤 고유한 시선과 거리감,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풀 샷은 풀 샷이고, OS 씬은 OS 씬이며, 바스트 샷은 바스트 샷이다. 어떤 화면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정석대로 찍혀있다. 상업영화나 상업 콘텐츠에서 볼 법한 깔끔하고 완벽한 구도이다. 한국 독립영화에서 화면이 이토록 균질하게 다듬어진 구도로만 이뤄진 걸 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모범생인 명은이 여러 조사와 학습을 통해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손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열심히 쓴 글처럼, <비밀의 언덕> 또한 영화 창작의 정석을 열심히 공부하고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요소를 조화롭게 배치했다. 그것뿐이다. <비밀의 언덕>은 자신이 보여주려고 한 주제를 벗어나는 어떤 풍경이나 사물도 비추지 않고,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시대성과 개인성도 담지 않는다. 그렇기에 <비밀의 언덕>은 <벌새>, <우리들>, <남매의 여름밤>와 같은 계보에 올려놓기에는 스타일과 개인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비밀의 언덕>이 관객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계급과 가족의 직업에 관해 느끼는 민감함과 수치심을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병적인 민감함과 가족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토록 여실하게 담아낸 영화도 드물다. 전체적인 조화를 떠나 영화의 부분적인 에피소드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에피소드 그 자체로 강한 설득력과 힘을 갖고 있는 것들이 많다. 여성 청소년의 성장 영화의 계보에서 보기보다는, 창작에 관한 메타 영화로 봤을 때 더 힘을 갖고 있는 영화이다. 어떻게 나와 가족의 사회적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창작을 해 나갈 것인가? 명은은 자신의 비밀을 언덕에 묻었지만, 감독은 명은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과정 전체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다. 명은은 아마 앞으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사회적인 인정을 받기에 글쓰기가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감독이 이 언덕을 어떻게 극복해 다음 작품에서 자신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 보일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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