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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하우스> 안티 이창동의 세계 : 비닐하우스를 태울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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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안티 이창동의 세계 : 비닐하우스를 태울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문정(김서형)은 노인 간병 일을 하며 치매 노인인 화옥(신연숙)과 그녀의 남편인 시각장애인 태강(양재성)을 돌본다. 그녀가 돌보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어머니인 춘화(원미원)도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다. 소년원에서 한달 뒤 출소하는 아들 정우(김건) 또한 문정이 돌봐야 하는 대상이다. 문정은 비닐하우스에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지만 아들이 출소한 뒤 함께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문정은 왜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을까? 그리고 아들은 왜 소년원에 갔을까? 아빠를 닮은 자신과 함께 살기 힘들지 않겠냐는 아들의 질문엔 어떤 함의가 있는 걸까? 영화는 그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내 놓지 않는다. 그건 그저 그들이 처한 상황이자 조건일 뿐이다. 이 조건들은 영화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지만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하층민의 윤리문제를 다룬 한국 감독들의 영화, 특히 이창동의 영화에서 이미 봤던 설정들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비약을 무릅쓰고 <비닐하우스>를 이창동 영화 세계에 대한 안티 영화로 읽어보려 한다.
이창동 영화의 가장 노골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의 제목 자체인 ‘비닐하우스’의 모티프이다. 이창동의 <버닝>(2018)에 나오는 벤(스티븐 연)은 주인공인 종수(유아인)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고백한다. 그에게 있어서 비닐하우스는 언제든 심심하면 태울 수 있는 쓸모없고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종수가 좋아하는 여자인 해미(전종서)가 사라지자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버닝>에서 비닐하우스는 가난하고 취약한 여자의 메타포로 쓰였다.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는 이창동 감독이 <버닝>에서 썼던 비닐하우스의 메타포를 가져와 문정의 주거지로 설정한다. 문정은 ‘가진 것 없이 취약한 여자’인 동시에 그것의 메타포인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여자이다.
문정이 이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간병이다. 이창동의 <시>(2010)에서도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생계를 위해 노인 간병일을 한다. <비닐하우스>와 <시>는 모두 돌봄노동자가 노인의 몸을 씻기며 취약해지는 과정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하지만 이창동의 <시>에서는 미자가 손자인 종욱(이다윗)의 범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 딜레마가 메인 테마였다면, <비닐하우스>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간병을 하는 문정 본인이며,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감추는 과정에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이처럼 <비닐하우스>는 이창동의 영화와 두 가지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이고, 이 범죄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극중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창동 영화의 윤리적 세계는 남성 주체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 안에서 여성은 남성 주체가 윤리적 자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거나 범죄의 희생자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지은 범죄에 대해 고통 받으며 대속하는 존재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항에 위치하므로 직접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못한다. 하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직접적인 공격성을 보이며 범죄를 저지르는 건 다 여성들이다. 집단상담에서 만나 문정과 친해지는 지체장애 3급의 순남이 태강의 제자에게 강간당할 뻔한 장면은 <오아시스>(2002)에서 뇌성마비인 공주(문소리)가 종두(설경구)에게 강간당할 뻔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아시스>에서 공주와 종두의 관계가 로맨스 서사로 발전되었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순남은 자신을 강간하려고 한 태강을 바로 칼로 찔러버린다. 남성의 관점과 언어에 의해 둘의 관계가 ‘사랑’으로 미화될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다.
<버닝>에서 비닐하우스가 권력을 가진 남성이 심심할 때 태울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여성의 메타포였고 그걸 태우는 주체가 벤과 종두였다면 <비닐하우스>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건 문정이다. <비닐하우스>는 비닐하우스라는 메타포를 여성에게 직접 태우게 함으로써 여성의 존재와 비닐하우스에 담긴 함의를 구분한다. 비닐하우스는 임시적으로 무언가를 키워내는 공간이다. 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 또한 임시적이다. 여성은 그 자체로 돌봄이나 재생산과 결부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열 달 품으면 탄생을 하고, 치매 노인은 돌보는 사람보다 먼저 죽는다. 이처럼 <비닐하우스>의 비닐하우스는 <버닝>에서처럼 여성의 몸 그 자체가 아닌, 여성의 임시적인 돌봄 노동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그곳은 문정 아들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입력해야 열리는 공간이고, 문정이 돌보던 치매 노인의 시체가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문정은 결말에서 이들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직접 태워버린다. 비닐하우스의 방화와 함께 문정이 돌볼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비닐하우스>의 세계에서 결국 살아남은 주요 인물은 문정과 순남 뿐이다. 문정이 돌보던 사람들은 영화 안에서 모두 깨끗하게 제거되었다. 한때 문정의 돌봄을 받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찾아왔던 순남은 문정이 돌볼 대상이라기보다는 문정의 후계자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순남은 문정의 돌봄을 한때 간절히 원했으며 문정과 함께 살 수 있는 아들을 부러워하고 문정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길 바랐지만 문정은 순남을 돌보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순남은 누군가 위협이 되면 죽이면 된다는 문정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음으로써 문정의 적자가 된다.
<비닐하우스>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윤리적 책임감 이전에 존재하는 생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인간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친다. 이 영화의 세계는 이창동의 윤리적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남성) 주체의 성립 이전의 세계이며, 남을 돌보느라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여성-하위주체들의 세계이다. 이들은 사건을 제대로 대면하거나 책임을 질 만한 능력과 존엄성이 부재하는, 그저 불운하고 나약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비닐하우스>엔 어떤 윤리적 딜레마도, 카타르시스도 없다. ‘엄마’가 한 명의 개인으로 살 수 없도록 끊임없이 값싼 대가를 받고 남을 돌보는 위치 –비닐하우스- 에 머물게 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짜증, 그리고 엄마가 더 이상 아무도 돌볼 필요가 없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모든 걸 파괴해 버리는 극단성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인물들은 감정이입하기 힘들고 극의 진행은 작위적이지만, 영화의 표면 아래에 있는, 남성 주체 중심의 윤리적 세계관에 대한 서늘한 분노와 반발심은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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