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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내 구멍 난 생에 슬램덩크 -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2024-01-24

20231월의 어느 저녁, 무심코 TV를 보고 있는데 화면에 갑자기 채치수가 고릴라 덩크를 하고 있었다. 서태웅과 강백호가 그리고 송태섭이 역동적인 동작으로 농구를 하는 장면이 짧게 지나갔다. 이건 뭐지? 슬램덩크가 TV 만화로 방송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조악했고 만화책으로 슬램덩크를 읽으며 느꼈던 전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은 달랐다. 슬램덩크 만화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움직임이 꽤 근접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찾아 손에 쥐고 녹색 검색창에 슬램덩크를 입력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곧바로 극장예약버튼을 클릭했다.

 

 

슬램덩크 만화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시기는 90년대 초반, 내가 대학생일 때였다. 아무리 낭비해도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 해 술 마시고 시시덕거리는 재미에 빠져 살았던 때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리 살아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곤 했지만 삶을 근원적으로 개선할 방법을 나는 몰랐고 그런 가르침을 줄 만한 통찰을 가진 사람이 내 주위엔 없었다.

대학 동아리실에서 빈둥거리며 여자 후배들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 후배가 슬램덩크 1권을 들고 들어오더니 책상 위에 툭 던져놓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심코 그 만화책을 집어 들었고, 이내 슬램덩크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 후배는 슬램덩크 단행본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 먼저 읽고 동아리실에 가져와 가난한 나에게 빌려 주었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경지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나는 슬램덩크에 빠져들었다. 최고의 만화였다. 그 만화를 읽으면서 나는 조금은 다른 인생에 대해 잠시 생각하곤 했었던 것 같다. 불운했던 것은 그때는 만화를 읽는 일이 죄악시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80년대만 해도 만화책을 공터에 쌓아두고 화형식을 하는 장면이 공공연히 방송에 나오던 시기였고, 90년대에도 그런 정서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렸던 나는 만화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죄를 지은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의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읽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실컷 읽으라고 독려한다. 문장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사의 세계가 너희들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을 선물해 줄 것이라고 말해준다.

 

 

 

시간은 흘렀다. 그 시절 대학가의 문화라는 것은 대부분 술과 연관된 것이어서 나는 술을 자주 마시는 사람이 된 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IMF가 터졌다. 생활비를 버는 고통스러운 일에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난 후 밤마다 술을 마시다 잠이 드는 남루한 인생을 사는 내가 되어 있었다. 남루함의 극단에서 자살을 떠올렸다. 우울증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소심하고 무기력했던 나는 자살하지 못했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 견디듯 사는 인생이 이어졌다. 그러던 내가 전날 술을 마시지 않고 모처럼 아침 일찍 일어난 날이 있었다. 우울의 뒤범벅에서 잠시 헤쳐나온 맑은 아침이었다. 어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도마 위 칼질 소리와 밥솥의 밥 냄새가 주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강백호가 슬램덩크를 내리꽂던 장면을 떠올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이렇게 살다 죽을 순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술을 끊었다. 그리고 내 삶의 시간은 조금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전보다는 명료한 정신으로 살기 시작했고, 조금씩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겼고 아내를 만나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아 어엿한 성인으로 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아침에 나는 구멍 난 내 생에 슬램덩크를 꽂아 넣었던 것이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슬램덩크를 너무 재미있게 몰입하여 읽었기 때문에 내 안에 무언가 음각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 무의식의 어떤 층위에 침잠해 있던 슬램덩크는 어느 맑은 아침의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내 추동력을 발화점에 닿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램덩크는 모종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나를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화책으로 봤던 북산고와 산왕고 대결의 감동을 최고의 애니메이션 작화 기술로 구현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이노우에의 이야기 선택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감독을 직접 맡은 그는 강백호나 서태웅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다. 주인공은 송태섭이었다. 다른 사람이 슬램덩크를 영화화했었다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원작 만화책의 에피소드 중 일부를 영화화하는 것 이상을 상상해내기 어려웠을 터다. 그것이 수익을 보장하는 안전한 길일 테니까. 그러나 이노우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매우 대중적이지만 상투적이지 않았다. 만화책에서는 존재감이 적었던 송태섭을 전면에 내세워 농구 선수로서 치명적인 단점을 지닌 단신을 극복해가는 성장 스토리를 뼈대로 원작에는 없던 송태섭의 가정사를 기운 자국 없이 추가함으로써 또 다른 슬램덩크를 완성해낸 것이다. 어떤 슬램덩크이든 대중이 환호할 만한 재미는 그에게 기본값이다.

 

 

슬램덩크 만화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의외로 초반부의 이야기는 지금의 나로서는 읽어내기 힘들 만큼 그림과 대사가 유치했다. 내가 그때 이 만화에 전율했었다는 것이 머쓱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만화는 진화해 갔다. 영화에서는 만화책 초반부의 유치함을 한 점도 남김없이 걷어내었다. 감독은 자신의 창조한 강백호처럼 하루하루 진화해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대중예술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나 같은 대중에게 무언가를 읽는 쾌락을 느끼게 했고 다른 서사를 찾아 책을 찾아보게 했다. 계속되는 독서 활동을 추동한 것이 그의 슬램덩크였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대중에게 꼭 필요한 책은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고전문학이 아니라 슬램덩크와 같은 책이 아닐까.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한 번뿐인 인생을 남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대중 예술가가 아닐까.

나이가 많든 적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꼭 한 번 보라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싱크홀처럼 꺼져버린 삶의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슬램 슬램 슬램덩크를 내리꽂아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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