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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번듯한 괴물로부터 달아나기-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괴물>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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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였을 때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상’적인 어른들이 앗아가버린 게 아닐까. 방금 쓴 문장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고 난 후에 메모장에 적어둔 것이다. 메모장을 덮은 뒤, 나는 함께 영화를 봤던 H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올해 내가 본 최고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H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괴물>은 올해의 내 모습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었다고. 올해 본 영화 중 <괴물>이 최고였던 이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카모토 유지와의 협업으로 제76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영화이기 때문도 아니다. 애정하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Aqua>가 흐르던 마지막 씬에서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가 푸른 언덕을 달릴 때 나의 마음이 벅차올랐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앞서 열거한 이유들은 <괴물>이 좋은 영화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로 ‘내 인생의 영화’나 ‘올해의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비슷한 이유들로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괴물>을 최고라고 꼽은 이유는 간명했다. 영화 <괴물>과 올해의 내 삶을 함께 겹쳐 볼 때, 그동안 내가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단어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정상正常’과 ‘남성’. 이 단어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일상 곳곳에 산재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규정하고 있었다. <괴물>은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는 이 단어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궁지로 내몰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복 자매, 미혼모, 결손 아동, 비혈연 관계 가족 등 사회 변두리에 속한 소수자의 삶을 작품 속에서 꾸준히 다뤄왔다. 영화 <괴물>에서 그의 시선은 아동 성소수자를 향했다. 사실 퀴어를 주제로 한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지만, 인물의 퀴어함을 그저 소비하고 그치고 마는 영화들도 종종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아동 성소수자의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어 자극적인 이미지로 소비하기보다는, 인물의 대화와 표정으로 어떤 진실에 서서히 다가갔다. 이때 한 사건을 두고 다른 시선들로 편집된 플롯은 영화와 관객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발생시키며 진행된다.
직접 쓴 각본으로 영화를 찍던 전작들과 달리,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으로 찍은 영화다.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주로 단순한 플롯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사카모토 유지와의 협업은 이전과 다른 궤를 그리게 만들었다. 장이 구분되어 있진 않지만, <괴물>은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세 차례 보여준다. 첫 번째는 ‘미나토’의 엄마인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관점으로, 두 번째는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관점으로, 세 번째는 ‘미나토’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 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그 상황을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인다.
세 관점의 중심에 놓인 인물은 ‘미나토’다. 어느 날 어떤 변화가 ‘미나토’에게 시작되는데, <괴물>은 세 사람의 관점을 경유하면서 ‘미나토’에게 일어난 일의 전말을 조금씩 드러낸다. 엄마 ‘사오리’에게 아들의 변화는 학교 폭력을 당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선생‘호리’의 시선에서 ‘미나토’는 오히려 친구를 괴롭히고, 반항심이 부쩍 늘어난 사춘기 학생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미나토’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그의 변화 속에는 학교 폭력도, 반항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있다. 아빠처럼 건강하게 자라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길 바라는 엄마의 기대를 버거워하는 아이, “남자라면”, “남자답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꺼내는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남자답지 못한 성향에 고개를 숙인 아이, 그리고 ‘요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정상적이지 못하고, 남자답지 못한 스스로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이가 있었다.
‘미나토’가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게 소원이라던 엄마의 말, 선생님이 무심코 내뱉던 ‘남자답게’라던 말, “너는 돼지 뇌라서 내가 고쳐줘야한다”는 ‘요리’ 아버지의 말. 이 말들은 ‘미나토’와 ‘요리’에게는 억압과 폭력이었다. ‘미나토’와 ‘요리’는 어른들이 정상적이라고 정해둔 기준에서 자신들이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통과했을 시간은 어땠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그저 다시 태어나길 바라던 아이들의 시간. 그 시간에 어린 내가 겹쳐 보였다. 연애 소설을 좋아하던 나를 여자 같다고 놀리던 학
급 친구들, 남자라면 사회생활을 잘해야 한다며 어깨를 두드리던 선배들, 능력있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성별 분업화의 로망을 두른 가부장적인 사고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정한 기준을 정해두고 거기에 나의 행동과 가치관을 맞추길 기대했다. 나 역시도 그들이 정해둔 틀에 들어가기 위해 나를 재단하기도 했다.
내게 2023년은 그런 ‘정상’이라는 기준, ‘남성’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성역할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한 해였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보려는 억지 노력을 그만두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가 정해둔 기준은 내게 말끔한 얼굴과 번듯한 차림으로 다가온 괴물이었다. 자기처럼 되어야한다며 나를 옥죄던 그 괴물로부터 나는 달아나고 또 달아났다. 동시에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괴물이었던 적이 없었던가. <괴물>에서 드러난 괴물의 정체 역시 아이들을 궁지로 내몰았던 어른들의 말과 행동이 아니었을까. 앞서 <괴물>의 플롯이 가진 다각적인 진행 방식이 관객과 영화 사이에 거리를 발생시킨다고 했다. 관객이 이해에 다다랐을 무렵, 그 이해에서 어긋난 또 다른 관점이 눈 앞에 놓이길 반복된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가 관객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오히려 진실을 감춤으로써 관객들이 사건을 특정한 프레임 속에서만 경험하게 만든다. ‘미나토’와 ‘요리’의 입장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알아차린 순간에도, 그것은 관객의 손에서 빠져나가 영화 밖으로 두 소년을 따라 영영 달아나버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따뜻한 연출과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이 어우러지는 마지막 장면은 어둠 속에 망연히 앉아 있는 내게 질문 하나를 남겼다. “당신은 괴물인가요?”. 이 질문과 함께, 나는 멀어지는 두 소년의 뒷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뒷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온전한 내 모습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를 내보고싶다. 그리고 스스로가 고정 관념의 괴물이 되지 않도록, 거울 앞에서 누가 괴물인지 계속해서 물어야겠다. 그렇게 <괴물>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되었다. - 다음글 침묵이 주는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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