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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침묵이 주는 사랑에 대하여2024-01-24

대다수의 사람은 침묵해야 할 때조차 쉴 새 없이 말한다. 우리는 말로 인해 꽤 자주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종종 특정한 말들이 아닌 존재만으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말 없는 소녀는 그런 영화다. 침묵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외침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전한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묵묵히 다정하게 그려 간다. 코오트는 언니가 많다. 자신의 아래로도 동생들이 있다. 그 가운데 참 조용한 아이다. 말썽이나 흔한 투정조차 부리지 않는 아이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스스로 잘하기에 부모의 손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사촌의 집에 맡겨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름방학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을 정도로 그해 여름은 코오트에게 눈부신 사랑이었다.

 

 

 

션은 구태여 코오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코오트가 달갑지 않은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션의 정직함과 말의 무거움을 아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객도, 코오트도 그렇게 알아 간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미리 재단하고 속단하는지 깨달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 다시금 탐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의 특징, 성격, 호오와 같은 것을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코오트는 션과 에이블린을 통해 존중과 우호적 태도에 대해 배운다. 생부와 생모로부터 한 번도 존중받지 못했던 코오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다. 달리기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뜀박질을 배우고, 목장 일을 도우며 동물과 자연 속에서 거침없이 뛰어다닌다.

 

 

 

이 작고 말간 아이가 얼마나 움츠려 살았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자신의 쓸모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 코끝이 한없이 시큰거렸다. 이모 집에 와서도 집안일을 돕지 않으면 좌불안석이 되는 작디작은 아이의 몸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에이블린은 그런 코오트의 마음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해사한 웃음으로 코오트를 꽉 안아준다. 어떤 날은 재미있는 말로, 어떤 날은 오줌을 싼 이불을 말없이 갈아주는 것으로, 또 어떤 날은 코오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렇게 사랑을 준다. 코오트의 얼굴이 점점 변해간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쉽게 정의 내릴 수도 없는 무형의 어떤 것이지만 행복한 얼굴은 단번에 알 수 있다. 션과 에이블린 그리고 코오트가 도란도란 모여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누구도 말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에 열중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면에서 가장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에 침묵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편안한 것이다.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에 절로 편안해진다.

 

 

어딜 가나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례한 이웃들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 사람들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위로인 척 상대의 아픔을 찌르고, 칭찬을 빙자해 자신의 자랑을 하는 유형의 사람들을 말이다. 아이답지 않게 너무 말이 없는 게 아니냐는 말에 션은 이렇게 말한다. “조용해도 할 말은 하는 아이라고. 부모는 자식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 줘야 한다. 성장 과정 속의 크고 작은 변화가 부모에게서부터 나온다. 그 모든 첫걸음에 동행하며 힘을 실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무서운 곳이던가. 차가운 벽과 현실 속에서 사랑으로 면역을 만들어 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것이 유년기의 따뜻한 기억이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준 션과 에이블린이 진짜 부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이 여름방학이 끝나는 것에 눈물이 나는데 코오트라고 왜 아쉽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아빠라고 외치며 션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끝내 모두를 울게 만든다. 말을 멈춰야 하는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슬펐을까. 하지만 사랑은 선순환을 낳는다.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는 것처럼 코오트는 성장했다. 잊지 못할 사랑으로 충만해진 그해 여름, 코오트의 인생은 달라졌다. 어떤 변화는 그 전의 내가 상상조차 가지 않을 만큼 송두리째 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사랑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여유롭게 만든다. 경직되었던 코오트의 삶이 나비처럼 자유롭게 변했다.

 

 

 

좋은 어른이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이를 한참 골몰하던 시기에 말 없는 소녀를 만났다. 이 영화를 통해 또 하나의 길을 찾았다. 다정함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깊은 사랑은 침묵을 동반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말을 아낄 때 어쩌면 가장 큰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바닷가와 식탁 위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어느 때보다 말의 무게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는 것은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봐야만 성장했음을, 자각해야만 나아갈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번민과 성찰로 침묵 속을 유영한다. 말을 아껴야 할 때를 몰라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의도치 않은 말로 실수를 한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을 줄줄 아는 사람 말이다. 누군가에게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잘 산 인생이 아닌가 싶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말 없는 소녀는 매해 여름마다 떠오를 영화이다. 션과 에이블린의 안부가, 코오트의 내일이 오랫동안 궁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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