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다음 소희'의 깊은 메아리와 영화적 유산2024-01-24
-
한국영화계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독립영화를 주로 보는 관객으로서 <다음 소희>는 나에게 기대작이었다. 왜냐하면, 전작 <도희야>를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도희라는 어린 소녀는 가족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억압을 경험한다. 이 구조적인 문제와 권력의 역학을 다루는 감독의 연출에 감탄했다. 그래서 부산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봤다.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 배두나도 이번 작품에 출연했다. 이 작품을 중극장, 소극장에서 총 두 번 관람했다. 이번 작품도 <도희야>처럼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고, 그녀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시스템의 희생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 결과 기억 한편의 후회하지 않을 좋은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특히, 한국영화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이런 좋은 작품이 등장하여 더욱 기쁘다. 이 작품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스토리텔링 구성, 사실적인 연출, 시선의 전환이다.
<다음 소희>는 1부에서 콜센터 일을 하는 특성화고등학교 학생 소희가 직장 생활 속 사회적 압력에 어려움을 겪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을 보여주고, 2부에서 오유진 형사가 1부에서 다룬 사건의 여파를 조사하면서 시스템적인 문제를 직면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구성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관객은 1부를 통해 소희의 고뇌를 직접 체험하게 되고, 2부를 통해 사건에 대한 보다 전체적인 관점을 얻게 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 관객이 다른 캐릭터의 입장에서 경험하기 때문에 소희의 감정과 시스템의 부조리를 더욱 세밀히 이해할 수 있다.
소희는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유튜버를 꿈꾸는 친구를 조롱할 때 당당하게 저항하는 용감한 아이이다. 활발하고 당차며 불합리함에 분노할 수 있는 소희의 성격 특성은 작품의 초반부에 보여주는데, 이는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시스템 문제로 인해 결국 무너지게 되는 소희의 모습을 대비하여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구조적인 문제는 다양하다. 소희는 현장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급여를 받고, 소희를 콜센터 현장에 보낸 학교는 학교 지원금을 받기 위해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교육청에서는 취업률이라는 지표를 보여주며 교육부 지원금이 줄어들 수 있다며 오히려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게다가 콜센터는 인간을 이윤에 대한 초점으로 바라보고, 실장과 소희가 자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소희는 ‘다음’ 소희로 대체하는 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끔찍할 정도이다. 이렇게 당차고 활발한 소희가 시스템의 희생자가 되면서 점차 표정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을 관객이 실제처럼 느끼고, 소희의 감정에 더욱 몰입하기 위해 이 영화는 소희가 걸어갈 때 핸드헬드로 촬영하고, 콜센터 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항상 주변 환경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소희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줄 때 소희의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 효과적인 핸드헬드 카메라워크를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리지 않고, 살짝 흔들리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소희의 감정이 안정과 취약함의 순간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는 등 그녀의 내부 혼란과 무력함의 본질을 잘 포착한다. 또한, 콜센터 환경을 폭넓게 묘사함으로써 소희의 직장 생활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동시에 낮은 성과를 한탄하는 것이 만연한 분위기를 제시하여 집단적 무관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적인 연출도 잘하지만, 캐릭터의 감정을 살리는 연출도 좋다. 특히, 소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하얀 눈을 보게 된다. 눈은 영화의 어두운 주제와 정서적 대조를 이루는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면서 소희 마음의 감정 풍경을 반영한다. 소희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한 눈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호수라는 공간과 함께 주변 세계로부터 은유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시선 전환도 매력적이다. 소희가 오유진 형사를 처음 보게 된 것은 연습실이라는 공간이다. 소희에게 익숙한 공간인 연습실은 그 속에서 낯선 오유진 형사를 만나 낯설어진다. 마찬가지로 오유진 형사에게도 소희를 단 한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소희 관련 사건을 맡는다는 것은 낯설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유진 형사는 시종일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유진 형사는 소희를 무관심으로 응대했던 사회와 달리 그녀를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공감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관점을 취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소희와 정서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오유진 형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을 점점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오유진 형사의 감정이 폭발하게 되는 것은 영화의 결말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오유진 형사는 소희가 스스로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카메라는 영상을 보고 있는 오유진 형사의 눈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준 다음 형사가 보고 있는 핸드폰으로 시점이 전환된다. 이 시점은 오유진 형사의 시점인 동시에 관객이 바라보는 시점과 동일시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화면 속에서 숨 쉬고 있을 밝은 소희의 모습에 나도 가슴이 아팠다.
동영상 속 소희가 화면을 끄면서 영화관은 암전 상태로 바뀌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가슴 아픈 서사가 막을 내렸지만, 영화의 울림이 주는 감정적 메아리는 계속 진행된다. 극장의 불이 켜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의 무게로 인해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처럼 좋은 영화란 이렇게 큰 여운으로 관객을 감싸 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여운이 너무 강하게 관객을 사로잡을 때 이렇게 극장 좌석에 묶인 것처럼 발을 떼기 힘들다. 코로나19 이후 한국 영화계는 차가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은 방송에 나올 때마다 한국영화의 위기라고 말한다. 급격한 티켓값 인상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해답을 뚜렷하게 못 찾고 있다. 어쩌면 <다음 소희> 같은 독립영화가 한국영화의 폭풍 속의 촛불이 될 거로 생각한다. 이 작품은 서사적 완성도가 높고 감정적 깊이가 남다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다음소희 방지법’이 발의되었고, 이 법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사회적 규범에 당당히 도전하고, 변화의 촉매 역할을 하는 영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 더 이상 ‘다음’ 소희가 탄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 제작자로선 작금의 현실로 보아 이런 영화 제작에 도전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작지만 다채로운 여러 씨앗을 많이 뿌려놔야 견고한 영화적 토양이 가꾸어진다. 독립영화를 즐겨보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독립영화의 잠재력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독립영화들의 생명력이 한국영화의 명맥을 잇게 되고, 한국영화가 더 좋은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다. 한국영화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글 <세기말의 사랑>: 너를 구하는 것이 곧 나를 구하는 것
- 이전글 침묵이 주는 사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