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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늦더위>: 맑은 꿈, 자정(自淨)의 시간2024-05-31
영화 <늦더위> 스틸컷 이미지



<늦더위>: 맑은 꿈, 자정(自淨)의 시간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서한솔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늦더위>는 첫 번째 장편영화 <종착역>처럼 로드 무비의 형식을 지닌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권민표 감독과의 공동 연출로 완성한 <종착역>에서 나타난 특성이 서한솔 감독의 두 번째 영화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정은 주인공의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혹은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을 통한 성장과도 무관하다. <종착역>의 여중생 네 소녀들은 ‘세상의 끝’이라는 주제가 담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신창역에 간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진들을 찍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 촬영이라는 ‘미션’이 주어진 것 같고 그 미션을 해결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그 영화는 전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소녀들이 찍은 사진들이 ‘세상의 끝’을 제대로 담아낸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그 사진이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을 했는지의 여부도 역시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소녀들이 서로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때로는 조용히 자신들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들과 풍경들이다. 서한솔 감독은 여행의 결과, 결론보다 과정, 여행 그 자체가 주는 기운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영화 <늦더위> 스틸컷 이미지2


주인공 동주(기진우 배우)는 서른 두 살의 취업준비생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낙방하길 반복하며 8년의 시간을 보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플랜테리어 일에 능숙해서 정규직 제안도 받지만 동주는 내키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군대 후임의 제안에 동주는 서울을 떠나 자신의 고향 청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동주는 뭔가 달라졌을까?

동주의 여정은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그 과정에서 인생의 어떤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뭔가를 이루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여행은 청춘을 허비한 청년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도피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이는 뭔가 결과물이 없는, 비생산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매번 치열하게, 효율적으로 뭔가를 생산해내며 살 수는 없다. 동주처럼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도 뭔가 결과가 나오지 않아 막막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영화 <늦더위> 스틸컷 이미지3


영화 속의 장면처럼, 동주는 방전되어 멈춘 시계, 혹은 농구 골대의 백보드와 림 사이에 끼어버린 공과 같은 상태다. 동주의 막막함과 불안정함은 동주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비로 표현된다. 그들은 동주와는 달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거나 그렇게 될 예정이다. 그들은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아니면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현재에 충실하다. 동주는 잠시 멈춘 상태에서 과거를 향해 간다. 헤어진 구 여친, 군대 후임, 오랜만에 뵌 친척 어른,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 자신이 다녔던 모교, 어린 시절 올랐던 동네 뒷산... 흔히 현재가 막막하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삶에 직면하게 되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고들 한다. 동주의 마음도 그런 것일까? 동주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동주가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농구를 하는 걸 보며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던 장면을 생각해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 비생산적인 시간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종착역>의 네 소녀들이 보낸 그 시간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서한솔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이런 잉여처럼 보이는 비생산적인 시간들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들.


영화 <늦더위> 스틸컷 이미지4


여정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동주는 잠에서 깨어난다. 혹시, 우리가 본 영화는 동주의 꿈이었을까? 그것을 실제로 생각하든 꿈으로 생각하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 시간은 꿈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맑은 꿈. 혼탁한 머리가 맑아지는 자정(自淨)의 시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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