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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해야 할 일> : 악역을 떠맡게 된 자들의 슬픔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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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 : 악역을 떠맡게 된 자들의 슬픔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 <해야 할 일>에는 물리적으로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지만 이 영화는 아프고 처절하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는 구조조정이란 재난을 다룬 재난영화이고, 약자들끼리의 싸움을 그린 전쟁영화이고, 그 재난이 끝나고 나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름 누아르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현실적이다’라고 말하는 건 영화에 대한 실례 같다. 이 영화는 그냥 현실 그 자체다. 이 영화가 장편영화 데뷔작인 박홍준 감독은 조선소 인사팀으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지만, 다큐멘터리에 못지않은 생생한 현실감과 디테일로 관객을 설득시킨다. 오랜만에 한국 노동 영화 장르에서 수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나온 듯하다.
<해야 할 일>은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그들의 맞은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인사팀, 즉 회사의 지시를 받아 희망퇴직, 권고사직, 강제해고로 노동자들을 몰아야만 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는 한국의 노동 영화들 중에서도 이 작품만의 특징이자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떠맡은 그들의 슬픔과 피로, 괴로움과 죄의식을 그린다.
<해야 할 일>이란 제목은 두 가지의 의미를 품고 있다. 하나는 사람으로서, 사회의 시민으로써, 회사로써, 노동자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의 ‘해야 할 일’, 즉 사람들 사이의 원칙과 상식, 이상을 말한다. 또 하나는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그 원칙과 상식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 즉 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해야만 하는 ‘해야 할 일’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현실이 이상을 압도하고 무너뜨리는 노동 현장의 현실을 보여준다. 구조조정을 맡은 인사팀과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노동자들 간의 갈등, 인사팀 직원들 간의 갈등, 그 모든 걸 겪으며 혼자 괴로워하는 주인공 내면의 갈등. 영화는 다양한 갈등의 양상들을 정공법의 드라마로 묵직하고 무겁게 그려낸다.
주인공인 인사팀의 강준희 대리(장성범 배우)를 사회운동가인 어머니의 아들이자, 과거 대학생 시절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한 이력을 가진 인물로 설정한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는 주인공이 어떤 정치 성향을 가졌는가를 알려주고자 설정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떤 사회운동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준희가 영화 말미에 그의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촛불을 든 시민들에 합류하는 장면 역시도 정치적인 성향의 문제와 무관하다. 그저 준희는 세상에서 어떤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최소한의 시민 윤리를 가진 평범한 시민이자 노동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준희는 정치적으로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세상을 바라는 인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이 견지하고 있는 태도도 역시 그러하다. 준희가, 그리고 인사팀 직원들이 괴로워하는 순간도 그 원칙들이 무효가 되어버리는 순간에 찾아온다.
<해야 할 일>에서 인사팀 직원들을 영화의 중심에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이 영화는 사측 역시도 노동자들을 내보내는 것이 안타깝고 불편하다는 걸 호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어용’ 영화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다. 이 영화에서 구조조정의 원인을 제공한 사측은 아예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고 그저 대사로만 설명될 뿐이다. 영화 속에선 노사갈등 대신 노노갈등, 노동자들끼리의 싸움만이 존재한다. <해야 할 일>은 영화 속에서 누가 나쁘고 누가 악당이라고 아무도 지목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해결책인가에 대해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책임져야할 원인 제공자는 빠져있고 대신 책임을 지기 위해 약자들, 피해자들끼리만 싸우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면서, 영화 바깥에 있는 피고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추궁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데, 어째서 책임은 힘없는 자들의 몫인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노동자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 그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해야 할 일>이 무겁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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