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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화인가, 씨네필 홍상수의 대답2024-01-24

홍상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해는 그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영화의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헤어지는 서사의 반복, 동일한 장소가 다른 사람에게 전유되는 공간의 반복, 동일한 인물이 전혀 다른 방식들로 이해되는 인물의 반복 등등 그의 영화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소재를 고려한다면 이런 이해가 결코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 인물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온 홍상수의 행보는 그의 모든 영화를 메타-영화로 해석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도망친 여자>(2020) 전후의 홍상수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다소간의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도망친 여자> 등을 통해 영화가 현실의 도피처로서 기능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물론 우리는 홍상수가 여전히 영화를 떠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2022)은 왜 그럼에도 영화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홍상수의 절절한 고백이며, <물 안에서>(2023)는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며 살아가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왜 여태까지 메타-영화들을 만들었으며 그는 도대체 왜 영화에 대한 회의감이 든 이후에도 영화를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가 현실과 맺는 관계를 검토해봐야만 한다.

 

 

. 왜 영화여야만 했는가, <옥희의 영화>

 

그동안 홍상수가 왜 영화라는 매체에 천착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그의 중기 대표작인 <옥희의 영화>(2010)를 살펴보자. 필모그래피상이든 감독의 실제 커리어상이든 중간에 위치한 <옥희의 영화>는 이전의 홍상수의 영화 세계를 정리하고, 이후의 영화를 예고하는 분기점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연애 서사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의 모든 초기작과 닮아있으며 서사가 반복될 때마다 정서적 반향은 매번 다르게 다가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극장전>(2005)의 영화 이해를 계승한다. 그리고 영화 속 공간의 반복은 <북촌 방향>(2011), 하나의 인물이 다층적으로 재현되는 양상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우리 선희>(2013)에서 재발견되며 무엇보다 이 반복 속에서 발견되는 세계의 풍부함에 대한 경탄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 최근 홍상수가 겪고 있는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옥희의 영화>를 탐구할 당위성은 충분한 듯하다.

 

 

 

<옥희의 영화>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4부로 구성된 작품이다. 영화의 1주문을 외울 날은 화분, 자전거, 건물 등 일상적인 대상을 비춰주며 시작한다. 이 일상적 대상들이 시시한 만큼 영화의 주인공인 30대 독립영화 감독 겸 영화과 시간강사 진구의 이야기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도 상투적일 것만 같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성을 부정하며 극을 전개해 나간다. 영화의 첫 대사는 집사람이 예전 같지 않다이다. 주인공, 진구의 아내는 진구를 영수라고 부르며, 진구는 어제 주차한 차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이라는 마법은 진구의 일상을 집어삼킨 후 점차 그의 삶 전체에까지 마수를 뻗는다.

 

 

인물에 대한 상충된 증언 역시 진구의 혼란스러움을 가중한다. 송 교수가 돈을 받고 교수 자리를 만들었다는 증언과 송 교수는 사심없이 깨끗한 분이라는 증언의 충돌에 지친 진구는 끝내 송 교수에게 학교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묻는다. 격분한 송 교수는 진구를 타박하며 논리학 책을 좀 읽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순된 진술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진구에게 모순적 명제는 공존할 수 없다는 논리학의 가르침은 무의미하다. 진구는 세계가 정말 하나의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의심하며, 특정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해 깔때기로 모아진 듯한 영화가 아닌 살아있는 것과 비슷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옥희의 영화>2,3,4부는 1부와 특정한 주제의식이나 인과 관계로 연결되지 않은 채 부유한다. 영화의 모든 부분에서 진구가 등장하지만 진구라는 기표는 기의의 동일성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1부의 진구가 영화 감독이었던 것과 달리 다른 진구들은 영화과 학생이다. 1부가 시간적으로 미래에 있다고 하기에도 각각의 부분들이 보이는 미묘한 차이는 이들이 기껏해야 유사성으로만 묶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세부적인 차이는 무시한 채 2,3,4부가 과거고 1부가 현재라는 식으로 서사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내의 시간이 선형적으로 흘러야 한다는 우리의 관습적인 관람 태도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를 그런 방식으로 감상할 이유는 없다. 홍상수는 영화의 4옥희의 영화를 통해 세계를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를 권유한다. 옥희는 송 교수와 진구와 아차산에 갔던 두 번의 경험을 영화로 제작한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두 경험을 굳이 붙여 놓고 어떤 효과가 산출되는지를 지켜보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옥희는 병렬된 두 영상에 마치 남의 일인 양 객관적인 코멘트를 덧붙일 뿐 별다른 조작을 가하지 않는다. 그녀는 의미를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대신 세계가 있는 그대로 의미를 발산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화를 봐야만 하는가? 영화는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파편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 뿐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인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는 주문을 외울 날속 진구의 말을 떠올려야만 한다. 이 격언은 홍상수가 영화를 만드는 근본적 이유와 함께 이 영화의 메시지가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폭설 후의 연출 의도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폭설 후에서 홍상수는 이례적으로 시점숏을 사용해 텅 빈 운동장을 보던 송 교수의 시선을 취한다. 이윽고 늦게라도 교실에 온 옥희와 진구는 송 교수에게 이러저러한 질문을 던진다. 이때 영화는 교수와 제자들의 문답마다 유달리 정신없는 패닝을 선보이며 이 순간이 영화임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송 교수는 무엇을 믿을지는 네가 그냥 사는 거니까 네가 찾고 결정해야 한다고,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서 홍상수는 가장 영화적 방식으로, 영화과 교수를 연기하는 배우의 입을 빌려 세계의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를 권유한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일상에 찌든 채 담배를 피우던 진구의 모습은 키스왕에서 옥희와 사귄다는 설렘에 가득찬 채 담배를 피우는 진구의 모습과 닮아있다. 거의 동일한 배경에서 동일한 인물이 동일하게 행동하나 두 상황의 의미는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이렇듯 홍상수는 세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관점을 조금만 바꿔도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홍상수는 고정된 본질과 의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라도 영화-현실의 흔적을 티끌만큼이라도 담을 수 있는 인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왜 영화로는 부족한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도망친 여자>

 

그러나 홍상수는 현실이 정말 그렇게 쉽게 긍정될 수 있는지, 영화가 현실을 긍정할 수 있게 해준다면 이는 단지 기만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질문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지금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수많은 우연의 결과임에 대해 경탄하던 그는 어느새 영화라는 매체가 삶과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출한다. 이러한 회의는 영화를 보는 김민희의 얼굴을 비추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도망친 여자> 두 편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망친 여자>라는 제목은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세 명의 친구를 만나는 영화의 서사와 무관해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 감희는 두 명의 친구를 그들의 집에서 만나고 한 명의 친구를 우연히 극장에서 마주친다. 감희는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그녀는 단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닌가? 공교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도망친 여자>보다 3년 앞서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통해 제시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1부에서 영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의 불륜이 주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독일의 도시로 떠난다. 영희는 해외에서 친구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 하나 영문 모를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는 그녀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영희가 검은 옷의 남자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1부는 이윽고 영화관에 앉아있던 영희의 얼굴로 시작하는 2부로 이어진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그가 영희에게 닥쳐올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며, 누군가는 그가 현실의 무게라고, 누군가는 그가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희가 영화를 봄으로써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끝날 때 그녀의 도피 역시 멈췄으며, 우리는 1부에 영희가 독일에서 보내는 편안한 시간 역시 그저 영화적 환상에 불과했음을 느낀다. 이러한 영화 자체에 대한 회의는 <옥희의 영화>에서 보여준 태도와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로써 도망친 여자는 검은 옷의 남자로부터 도망친 여자, 아니 영화로 도망친 여자로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도망친 여자>가 영화를 보는 감희의 얼굴로 끝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도망친 여자>는 영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반-영화로 해석된다. 창틀과 울타리가 만드는 프레임부터 CCTV, 인터폰까지 <도망친 여자>는 관객에게 스크린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있다. 그러나 감희는 스크린으로부터 분리된 채 프레임 속 대상들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이는 <도망친 여자>를 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이다. 감희는 친구에게 느닷없이 3층의 비밀이 무엇인지 묻지만 친구는 3층은 그저 정리되지 않아서 보여주지 못할 뿐 비밀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감희는 출장을 떠난 남편과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지만 우리는 남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스크린에 재현되지 않는 대상이 무맥락적으로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영화의 디제시스적 세계가 얼마나 편의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실감한다. 영화는 기껏해야 현실의 한 단면을 인위적으로 박제해낸 도피처에 불과함이 지적됨에 따라 인위를 통해 현실에 대한 진심을 말하겠다는 홍상수의 의지는 약화된다.

 

 

. 왜 그럼에도 영화인가, <>

 

홍상수는 영화를 통해 세계를 긍정해내겠다는 기존의 발상이 기만에 불과했음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잔인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채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이는 홍상수가 자신은 영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풀잎들>(2017)<강변호텔>(2018)에서 흑백의 화면에 죽음의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제시하며 우울을 숨기지 않았던 홍상수는 <당신얼굴 앞에서>(2021)에 이르러 내 얼굴 앞 모든 것이 은총이다만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라며 생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점차 영화가 설령 현실과 무관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음을 인정한다.

 

 

 

홍상수의 이러한 회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2022년에 개봉한 <>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의 각 층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일들을 중심 소재로 하는 이 영화는 동일한 장소에서의 차이와 반복을 소재로 하던 <북촌방향>의 수직적 변용처럼 보인다. 그런데 <북촌방향>에서 인물의 배회에 뚜렷한 방향성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에서는 다소 노골적일 정도로 층을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만이 구현된다. 주인공 병수가 층을 오르는 과정은 앙각의 왜곡된 화면을 통해서 과장적으로 보여주지만 층을 내려가는 일체의 과정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했다는 듯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병수의 상승이 매번 긍정적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즐거운 술자리와 식사의 연속이었던 1,2,3층은 홍상수의 초기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4층 옥탑방에 이르러 흑백이 된 화면상에서 병수는 침대에 마치 시체처럼 엎드린 채 나는 혼자 사는 게 맞다는 우울을 토로한다. 건강이 안 좋아 채식밖에 하지 못한다는 병수가 엎드린 모습은 <강변호텔>에 구현되던 흑백 화면 속 죽음의 이미지와 닮아있다. 엎드린 병수의 내레이션과는 별개로 보이스오버를 통해 병수와 여자친구의 대화가 들려올 때 우리는 영화와 현실의 괴리에 대한 홍상수의 불만이 여전히 확고함을 알아차린다. 언급만 계속될 뿐 한 번도 카메라에 비춰지지 않은 지하 1층의 존재 역시 <도망친 여자> 3층의 비밀을 연상시킨다.

 

 

옥상에 이르렀을 때 병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관객의 불안은 다소 허무한 형태로 해소되어 버린다. 옥상에서 병수는 여자친구가 구워주는 고기를 먹으며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신이 자신에게 제주도에 가서 영화 12편을 찍으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까지 늘어놓는다. 영화에 대한 이러한 신앙에 가까운 무조건적 긍정은 <당신얼굴 앞에서> 이후 홍상수가 보여준 우울의 극복과 조응한다. 영화를 통해 생을 긍정하던 초기와 영화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찼었던 후기, 그리고 다시 한 번 영화를 믿어보겠다는 희망이 탑을 오르는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누군가는 <>의 결론이 맹목적 신앙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병수는 여전히 지하 1층을 보지 못했으며 병수에게 덮쳐왔던 죽음의 이미지는 언젠가 다시 그를 찾아올 테다. 끝내 병수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역시 추락과 죽음에 대한 홍상수의 공포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결말에 이르러 어느새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온 병수는 쾌활함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와 현실은 무관하며 영화는 세계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옥상에서 내려온 병수에게 이전까지는 존대하던 딸이 반말로 살갑게 대하는 장면은 어쩌면 앞으로 무언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홍상수의 희망을 반영한다. <>에 담겨있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이러한 근거 없는 희망은 바로 다음 작품인 <물 안에서>에도 이어진다.

 

 

 

. 영화를 통해 영화 극복하기, <인트로덕션><물 안에서>

 

<물 안에서>의 화면은 불안과 우울로 가득차있다. 영화과 학생으로 보이는 성모가 친구와 배우 한 명을 데리고 제주도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단촐한 서사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초점이 나간 흐릿한 화면만으로 진행되는 파격적 형식을 취한다. 성모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은 영화를 통해 명예를 추구할 뿐이라며 영화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성모가 밤중에 정신차려!”라는 고함을 느닷없이 들었다는 에피소드 역시 영화의 작위성에 대한 홍상수의 불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과의 연장선에서 <물 안에서><>에서 예고되었던 제주도 12부작의 시작으로 간주한다면 <물 안에서>의 모든 부정적 면모는 부정의 부정, 즉 생과 영화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인공이 물에 빠지는 모습은 2년 전 <인트로덕션>에서 이미 활용된 바 있었다. <인트로덕션>3부 구성에 걸쳐 관객의 기대를 지속적으로 배반하며 서사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예술적 원리를 거부한다. 영화는 주인공 영호가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예고하지만, 부자의 만남이 성사되는 대신 영호와 다른 이의 포옹으로 끝난다. 일례로 1부에서 주인공이자 배우인 영호는 한의사인 아버지가 불러 한의원을 방문하나 영호는 프레임에 등장하지도 않는 아버지 대신 어린 시절 애틋하게 지냈던 간호사 누나와 포옹한다. 2부의 영호는 독일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 자신은 아버지를 찾아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영호의 실질적 실천 대신 여자친구의 포옹으로 마무리되는 공허한 다짐일 뿐이다. 3부에 이르러서 전 여자친구가 독일 남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호는 어머니를 통해 유명 연극배우를 만난다. 그러나 영호는 대배우의 조언을 거부한 채 바다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맡긴다. 바다에서 나온 영호는 친구와 포옹하며 춥다는 말을 반복한다.

 

 

 

<인트로덕션>은 흑백으로 진행되며 물에 뛰어드는 죽음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풀잎들><강변호텔>을 닮아있으며 독일을 배경으로 하며 정형적 서사 및 연기에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뒤를 잇는다.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영호의 말과는 별개로 프레임에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의 존재와 차마 키스씬을 연기하지 못하겠다는 영호의 거부감은 영화에 대한 홍상수의 뿌리깊은 불신을 조명한다. 포도막염과 실명에 대한 언급과 함께 종종 초점을 잃어가는 카메라, 끝끝내 영화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감각은 시각이 아닌 스크린을 통해서는 절대 전달될 수 없는 포옹과 추위의 촉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인트로덕션>은 영화를 보는 눈을 부정하는 영화다.

 

 

그러나 <인트로덕션>의 좌절과 영화에 대한 불신은 <물 안에서>를 통해 영화에 대한 믿음으로 변용된다. <인트로덕션>에서 영호를 연기한 신석호 배우는 <물 안에서>에서 성모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다. 동일한 배우가 우울이라는 동일한 감정을 연기한다. 하지만 홍상수의 연출은 다르다. 그는 우울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추위라는 촉각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던 <인트로덕션>의 선택을 뒤집는다. <물 안에서> 속 흐릿한 화면은 성모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모의 시점을 취한다고 추정되는 영화 속 인서트 샷의 초점이 점점 흐릿해질 때마다 우리는 성모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을 본다’. 홍상수는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는 눈을 믿어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한편 작중 성모가 찍은 영화인 극중극 내에서 성모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이는 지극히 영화적 죽음이라는 점에서 작중 인물이 실제로 사망하는 <강변호텔> 등에 대한 메타적 언급처럼 보인다. 이로써 홍상수는 자신의 우울과 죽음에 대한 불안이 훌륭한 영화적 소재로 승화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영화의 디제시스적 세계가 현실과 연결되지 못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영화에게서 자신을 가장 내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새로운 의의를 찾는다. 홍상수는 설사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허구적이더라도 영화와 감독이 맺는 관계는 진실하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불과 1년 전 그가 개인적 성격의 영화에 대해 회의감을 보여줬던 것과 상반된다. <소설가의 영화>(2022)의 종반부에는 결혼행진곡을 부르는 김민희의 모습이 조악한 화질의 영상으로 삽입된다. 서사적 맥락과 이질적 화질 등등을 고려했을 때 이 장면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으로 보인다. 그러나 홀로 극장을 떠나는 김민희의 모습으로 끝나는 <소설가의 영화>는 어딘가 씁쓸함을 남긴다. 홍상수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영화에서 모종의 가능성을 발견하면서도 이 또한 기만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1년 후 끝내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든 긍정하려는 홍상수의 선택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영화

 

홍상수의 최근 필모그래피가 점점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영화로 채워짐에 따라 그는 점점 대중예술로서의 영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혹자는 홍상수의 이런 회심이 폐쇄성에 천착한 예술의 실패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곧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가치판단과도 연결되는 만큼 이 한정된 지면에서 관련된 논의를 엄밀하게 전개해나갈 수는 없다. 대신에 나는 문학작품에 지나치게 개인적인 염원이 깃들어있다는 이유로 비판받은 한 소설가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아 아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쓴 소설의 결말로 인해 수많은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유지하던 소설이 갑작스레 아들이 언젠가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끝남으로써 문학적 완결성이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훗날 오에 겐자부로는 그러한 비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그 결말에 대해서는 작가로서의 필연성이 있었다고, 자신에게는 그 장면이 필요했다고 회고한다.

 

 

사람들은 예술에게서 보편성을 요구하며 작품이 모두에게 의미 있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예술이 인간을 위해 복무해야 마땅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예술은 한낱 자위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술이 복무하는 인간이 바로 그 예술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가 되지 못할 이유 따위는 없음을 간과한다. 홍상수는 가장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영화, 결국 영화를 통해서 계속 살아나갈 용기를 구하고 있다. 나는 한 명의 관객 이전에 한 명의 씨네필로서 영화에 대한 홍상수의 애정이 어떤 식으로든 유지된다는 사실에 경탄한다. 그리고 한 명의 비평가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생의 의지를 찾는 홍상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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