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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질문과 지나치게 간단한 대답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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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과 지나치게 간단한 대답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바야흐로 페미니즘이 상식이 된 시대가 되었다. 상식이 있는 모든 이들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리고 <바비>는 바로 이 상식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내내 그레타 거윅은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며 둘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혹자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바비>가 진부하고 교조적인 영화라고 비판한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나 메시지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전달 방식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말 그대로 반쪽짜리 지적이다. 메세지의 참신함과는 별개로 <바비>의 핑크빛 비주얼과 눈이 즐거워지는 퍼포먼스는 러닝타임을 풍성하게 채운다.
첫 문단을 다시 써보겠다. 바야흐로 페미니즘이 상식이 된 시대가 되었다. 상식이 있는 모든 이들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성별 간의 평등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불행해지는 하향평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오늘날 이런 인식의 변화가 세상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바비>는 바로 이 현실을 외면하면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어째서 법적으로 남녀평등이 보장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아직도 불행한 삶을 사는가? 거윅은 여성들의 삶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해서라 답한다. 실망스러운 대답이다. <바비>는 풍성한 비주얼에도 지적 게으름과 사회학적 상상력의 부재를 숨기지 못한다.
<바비>의 주인공, ‘바비’는 바비인형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의 환상이 그대로 실현되는 ‘바비랜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세계 속 바비인형의 주인이 우울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부정적 감정을 인형에 투사하자 ‘바비’의 무결한 일상은 무너진다. ‘바비’는 다시 완벽한 인형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흠모하는 남성 인형 ‘켄’과 함께 현실세계로 넘어가 자신의 주인, ‘글로리아’를 찾아간다. 그러나 ‘바비랜드’와 달리 남성중심주의인 현실세계에서 ‘바비’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텔사(바비 인형의 제조사)의 임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바비’는 ‘글로리아’가 속한 현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그녀를 ‘바비랜드’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바비랜드’는 현실세계에서 영감을 받은 ‘켄’이 이식한 남성우월주의로 인해 한순간에 남성우월적인 ‘켄덤’으로 변한다.
다행스럽게도 ‘바비’는 ‘글로리아’ 및 다른 바비 인형들과의 연대를 통해 ‘켄덤’을 ‘바비랜드’로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바비’는 ‘켄’이 그저 자신에게 사랑받고 싶었음을 깨닫는다. ‘바비’는 자신의 사랑 없이도 ‘켄’은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조언한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 ‘켄’은 더 이상 자신의 빈약한 자아를 채워주는 ‘바비’의 애정이나 남성우월적 문화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윽고 ‘바비’는 환상의 투영 대상인 인형 대신 스스로 의미를 창출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영화는 ‘바비’가 인간이 되어 부인과를 찾아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여성 존중을 넘어 인간 존중을 외치는 영화의 메시지는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바비랜드’에서 돌아온 ‘글로리아’는 현실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딸과 함께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복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고 말한다. 설령 ‘바비랜드’ 속의 경험을 통해 그녀가 스스로를 더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속한 차가운 현실이 그리 달라졌을리는 없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는 그녀가 어째서 현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는지, 어떤 경위로 멍청한 CEO의 비위나 맞추는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글로리아’는 ‘평범한 바비 인형’의 제작을 제안한다. CEO는 그녀의 주장을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하나 수익성이 매우 높게 예측된다는 부하직원의 말에 반색하며 그녀를 칭찬한다. 그녀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그녀의 성별 때문만이 아니다.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CEO는 여자 비서와 남자 부하직원을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동일한 이유로 하대한다. 마텔사의 초대 CEO인 ‘루스’가 여성임에도 압도적 권위를 자랑하듯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노동자로서 겪는 차별은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생산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남성우월주의를 숭상하는 백인 금발 남성인 ‘켄’ 역시 마찬가지였다. ‘켄’은 여자 의사에게 흰 가운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학위가 없는 만큼 당연히 병원에서 쫓겨난다. ‘켄’은 사회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하기에 반강제적으로 ‘바비랜드’로 복귀한다. 그레타 거윅은 생산성을 입증하기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문화를 남성우월주의의 산물로 정의하면서도 정작 남성마저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같은 여성임에도 의사와 비서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윅은 자본주의와 페미니즘, 계급과 성별이라는 층위가 다른 두 문제를 억지로 이어 붙이며 여성을 존중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공허한 담론을 반복한다.
생산성을 입증하라는 요구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남녀평등에 부합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성별을 불문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들의 복지를 보장해야만 한다. CEO가 될 수 없는 ‘글로리아’의 복지를 개선하는 방안은 의사가 될 수 없는 ‘켄’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문제는 복지의 확장과 생산성의 압박은 대개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소수혜자를 위해 우리가 향유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풍요를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을까? 최소수혜자를 위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심각하게 악화되지는 않을까? 이 모든 질문들에는 확실한 대답이 부재한다. 하지만 그레타 거윅은 이러한 어려운 질문 앞에서 지나치게 쉽고 간단한, 이데올로기라는 대답을 제시한다. <프란시스 하>부터 <레이디 버드>까지 여성들이 직면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조명하던 그녀가 이렇게 쉬운 길을 택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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