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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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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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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한 소년이 전쟁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다. 도시가 화마에 집어삼켜지는데, 소년은 어머니가 그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직 어린 소년은 자신이 목격하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얼마 뒤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된 외갓집에서 어머니와 닮은 이모를 만난다. 그리고 어느새 이모는 어머니가 되어 있다. 아버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소년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머니는 정말로 사라져 영영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눈앞에 있는 새로운 어머니는 정말로 어머니와 다른 존재일까, 삶과 죽음은 정말로 넘을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결코 연결될 수 없는 것일까, 소년의 혼란은 끝을 모른다. 이것이 소년의 모험의 시작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시 소년의 이야기로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는 삶 너머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와 메이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이자 치히로처럼 마히토는 낯선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마히토를 낯선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왜가리다. 왜가리는 앨리스를 이끄는 시계 토끼처럼 친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마히토를 곤란에 빠트리기 일쑤다. 세계의 경계에 속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로지르며 때로는 짓궂은 환상을 만들어내어 이 세계의 사람들을 홀릴 수 있지만,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오직 경계에 머무는 환상뿐일 것이다. 왜가리는 자기 부리에 꽂힌 화살이 만들어낸 구멍을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도, 완전히 막을 수도 없다. 마히토가 쏜 화살은 왜가리의 깃털로 만든 것이지만 실재 세계의 화살촉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히토가 건너가고자 하는 세상은 왜가리처럼 다시는 자신의 실재성을 완전히 되찾지 못할 수 있는 그런 위험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가 건너가는 곳은 죽음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모인 나츠코는 곧 마히토의 어머니처럼 세계를 건넌다.
어머니 때문인지 이모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빨려 들어온 하부 세계에서 마히토는 키리코와 히미를 만난다. 키리코는 마히토와 함께 하부 세계로 빨려 들어오는 할머니인데 하부세계에서는 젊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히미는 마히토가 죽음을 목도하지 못했던 어머니다. 키리코는 자기에게 할머니라고 말하는 마히토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하부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이들은 마치 상부 세계에서 실재하든 죽었든 그와 상관없이 늘 소진되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우리의 존재,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이러저러한 삶을 살고, 고통을 겪고, 방황하는 우리 존재들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하부 세계에 있는 것이다. 하부 세계를 빠져나가는 문밖에서는 평범한 새가 되는 앵무새 군단들처럼 말이다. 새들의 삶처럼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어떤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죽음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하미와 마히토가 지키는 와라와라라는 생명체들이 펠리컨을 피해 상부 세계에 닿으면 생명을 얻는 것처럼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는, 죽음과 삶은 끝도 없는 순환 속에 있다. 죽음은 삶이 되고 삶은 죽음이 되고 그 사이에는 얇은 문이 있이 있다. 탑의 문들처럼 무수하고 얇은 문들이 있는 것이다.
마히토는 어쩌다 이러한 순환의 세계에 오게 되었을까? 마히토는 먼저 죽음의 세계로 건너온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리고 히미의 도움으로 나츠코와 함께 삶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것 때문이었을까? 마히토를 이끈 것은 왜가리가 보여준 어머니의 환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나츠코를 만나고 나서야 그가 진정으로 하부세계에 오게 된 이유가 나츠코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가 아니고 나츠코인가? 어머니가 이미 죽고 난 뒤의 시간으로 어머니를 다시 데려오는 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전 세대가 일으킨 전쟁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모를 선택한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그가 바로 잡을 수 있게 주어진 어긋나 있는 시간이 아닌 것이다. 그는 오직 어머니와 이모 사이에서 방황했던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운명만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마지막에 할아버지로부터 받는 돌조각의 의미이다. 마지막까지 세계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던 조각은 마히토의 주머니에 여전히 남아 균형을 잃은 세계에서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오직 자신만이 바로잡을 수 있는 운명들을 지니고서 악의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 나간다. 더 이상 하부 세계로 건너갈 수 없더라도 마히토는 이제 이 세계에서 비록 주머니 속 작은 조각만한 선의 일지라도 그것을 무수한 악의들과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소년인 우리는, 이 삶과 죽음의 끝도 없는 순환 속에서 무너져버린 세계일지라도 돌조각을 가지고서 살아가야 한다. 왜가리가 경고하듯이 속절없이 흐르는 이 세계의 시간 속에서 많은 다짐들과 용기들이 흐릿해지더라도, 여전히 돌조각과 함께 우리가 유일한 세계의 균형의 지탱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난 세대의 무수한 폭력과 과오들 속에서 무너져버린 세계에 던져진 이 세계의 소년들에게 묻는다. 전 세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또 누구와도 다르게, 자신을 지탱하는 유일한 선의를 가지고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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