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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하지만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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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지만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지난 3월 6일 개봉한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개봉 전부터 해외 개봉이나 수상 소식이 전해지며 관심을 끈 영화였다. 비록 수상은 못 했지만, 지난 3월 11일 개최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작품상 후보로 올랐고, 3월 14일까지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22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78관왕을 차지 중이다. 또한 3월 17일까지 60여 개 나라에서 개봉되어, 전 세계적으로 약 3,800만 달러 매출도 기록 중이다. (국내 매출 포함, boxofficemojo.com 참고)
<패스트 라이브즈>가 이런 글로벌 행보를 이어온 배경으로는 먼저 이 영화가 <미나리>(정이삭, 2021),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2022) 등을 투자 배급한 미국영화사 A24의 작품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CJ ENM이 협력해 공식적으로 미국, 한국 영화로 분류된다) 물론 투자배급사나 제작사의 역량으로만 가능한 결과는 아니다. 이 영화가 지닌 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잔잔한 스토리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이유를 좀 찾아보고 싶다.
- 만남과 재회, 이별에 대한 공감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나영(그레타 리), 해성(유태오), 아서(존 마가로) 셋의 만남과 이별, 재회가 이어지는 24년이 담겼다. 누구나 만남, 이별, 재회 경험이 있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현재에서 시작해 바로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초등학생 나영과 해성은 1등을 경쟁하는 사이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중이다. 함께 등하교도 하지만, 나영네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눈 채 이별한다.
12년이 흘러 그들이 재회하는 건 온라인상에서다. 복학생 해성과 뉴욕으로 이주한 작가 지망생 나영은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재회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자주 영상 통화를 하며 긴 대화를 나누지만, 둘의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시차 덕분에 두 사람은 통화하는 것마저 여의찮다. 점점 망가져 가는 일상으로 인해 잠시 연락을 쉬어 가기로 한 게, 또다시 긴 이별로 이어진다.
그렇게 12년이 더 흘러, 드디어 해성이 나영을 만나러 뉴욕으로 간다. 나영의 곁에는 남편 아서가 있지만, 나영과 해성은 두 번째 재회에 또 감격한다. 그리고 이번엔 몇몇 관광지를 다니며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아서까지 세 사람이 만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바 장면은 이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한데, 처음엔 세 사람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아, 서로 무슨 관계인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엔 세 사람의 관계와 나누는 이야기에 더해 그들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를 통해 그들의 24년을 지켜봤으니, 그들의 표정과 호흡까지 절절하게 느껴진다.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일상적이면서, 상식적이고, 친절한 세 사람의 모습과 대화에 꽤 현실적인 공감을 하게 된다.
반드시 이민이 아니더라도, 이사로 인한 이별, 상급 학교에 진학으로 인한 이별 등 나름의 사정으로 인한 이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꽤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나영과 해성, 그리고 아서가 느끼는 감정,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대놓고 표현하는 감정 등에 더 공감하게 되면서, 울컥하는 강렬한 감정도 느끼게 된다.
- 이민 1.5 세대 감독이 그려낸 인연의 보편성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이다.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도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전생’으로 번역되는 제목 덕에 예상이 빗나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세 사람 중 누구도 전생을 기억 해내거나, 무언가 신비로우면서 극적인 아시아 지역 전설 정도가 등장할 것 같지만,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오로지 현생의 이야기만 담겼다.
나영은 미국인 남편 아서에게 끊임없이 한국인, 한국적인 것에 관해 설명한다. 그 설명 중엔 인연과 전생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한국인이라고 다 아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국인이 아니라면 더욱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이해 불가 단어는 아니다. ‘인연’에 딱 맞는 단어나 어휘는 없을지 몰라도, 조금만 설명한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관계이니 말이다. 세 사람의 이어지지 못한, 혹은 이어진 인연에는 전생을 관통하는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들의 끊어지지 않는, 그렇지만 이어지지 못한, 혹은 이어진 인연에는 전생을 관통하는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나영을 통해 드러나는 이민 1.5 세대 셀린 송 감독의 시선도 매력적이다. 나영은 해성과 아서 사이에서 묘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해성에겐 미국적인 것을, 아서에게는 한국적인 것을 설명한다. 나영의 주관적인 설명이기는 하지만, 두 문화권을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서, 완전히 한쪽에 속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래서 오히려 스펙트럼이 넓은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세 사람은 분명 소통하고 있고, 공감하고 있다. 그들의 아련한 인연은 국적, 문화권, 세대 등에 상관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한국계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한국계 배우가 출연한 이 영화는 이민자 서사와 더불어 낯선 듯 익숙한 보편성도 획득한다. 만남과 이별, 재회라는 일상적 경험과 공감, 그리고 그들의 감정을 아우르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과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잔잔하게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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