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 인간, 그 <가여운 것들>2024-03-18
-
인간, 그 <가여운 것들>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란티모스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 <가여운 것들>은 전작인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그리고 <가여운 것들>을 보면 확실히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부터 란티모스의 세계가 변화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란티모스를 세계의 주목을 받게 한 <송곳니>부터, <더 랍스터>, <킬링 디어>까지는 기괴하고 형식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다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부터는 이전까지 그가 그려낸 세계에서 자신이 빈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인물 내면의 욕망의 세계를 아마도 원작들의 시선을 빌려 펼쳐 보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결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규칙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가의 문제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었다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가여운 것들>의 인물은 자신의 다층적인 내면세계로부터 영화를 추동시키는 힘을 끌어낸다.
규칙과 양자택일
이제까지 란티모스의 인물들은 모두 규칙 안에서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왔다. <킬링 디어>의 스티븐(콜린 패럴)은 자신의 음주 수술로 죽은 마틴(배리 키오건)의 아버지를 자신이 대신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또 종국에는 자기 가족들 가운데 희생할 한 사람을 선택하기를 요구받는다. 스티븐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족들 모두 다 함께 죽을 것인가 또는 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른 가족들을 살릴 것인가라는 두 선택뿐이다. 스티븐뿐만 아니라 스티븐의 가족들은 모두 마틴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모두 다 함께 죽을 것인지 스티븐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무작위로 맡겨 한 사람만을 희생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더 랍스터>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45일간 호텔에 머물면서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상대자를 찾아 사랑에 빠져야 하거나, 호텔에서 도망친 자들이 머무는 숲에서 오롯이 혼자가 되어야만 한다. 거짓으로 코피를 흘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짝을 이루게 된 남자는 데이비드(콜린 패럴)에게 묻는다. ‘어떤 게 최악일까? 숲에서 추위에 얼어 죽거나, 동물이 돼서 다른 동물에 먹히거나, 때때로 코피를 내는 것 중 어떤 거지?’ 데이비드는 답한다. ‘동물로 변했는데 다른 동물에게 먹히는 거지.’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45일 이내에 호텔 안에서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사람을 찾아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호감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며내야 한다. 짝을 이루는 것, 그것이 호텔 안에서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이며, 그러지 못하는 경우에는 계속해서 사냥을 해서 호텔에서의 하루하루를 늘려가거나 숲으로 도망쳐 사냥당하거나 혹은 동물이 되거나 비스킷을 좋아하는 여자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버리거나 또는 버리기를 각오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삼아 유지될 수 있는 불완전한 선택지들뿐이다.
냉혹한 여자와 짝을 이루려다 실패한 데이비드는 결국 숲으로 도망친다. 그런데 거기에서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규칙이다. 숲속의 도망자들에게는 사랑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호텔에서 혼자이기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을 담보로 한다. 데이비드는 도망친 숲에서 자신과 같은 근시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들키고 말아 근시인 여자는 그 벌로 실명하게 된다. 결국 근시였던 여자와 데이비드는 도시로 도망쳐 나오지만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다시 공통점을 찾아야만 한다. 데이비드는 다시 거울 앞에서 자신의 선택과 마주한다. 그가 도시에서 살기로, 근시였던 여자와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상,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그녀와 도시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납득과 상관없이 주어진 규칙과 그 안에서의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선택은 란티모스가 초기부터 보여주었던 주제였다. <알프스>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연기를 해주는 모임, ‘알프스’에 관한 영화다. ‘알프스’의 세계는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 외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거나 비어있지 않은 자리를 함께 채우는 등의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알프스 모임의 일원인 간호사(아겔리키 파푸리아)는 죽은 테니스 선수 역할을 하던 중 잠시만 더 안고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에게는 부인을 잃은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인지 그녀가 또 다른 연기의 일환으로 그의 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새로운 여성을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죽은 어머니의 자리가 채워질 것 같은 불안을 느낀 간호사는 자신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자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마저 거절되자 죽은 테니스 선수의 가족들을 찾아가 알프스 모임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죽은 테니스 선수를 대신할 수 있는 딸로서 받아들여 주기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애인의 연기나 불륜을 저지르는 연기 같은 것들은 손쉽게 해내지만, 딸로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연기는 끝까지 해내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정말로 아버지가, 가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 가족을 어디에서든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송곳니> 역시 <알프스>처럼 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송곳니>에서의 아버지(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는 <알프스>에서 간호사가 열망하는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다. <송곳니>에서의 가족들은 아버지에 의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간다. 아버지는 송곳니가 빠지는 것이 위험에 맞설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그때가 자식이 집을 떠나는 때라고 가르치고, 안전하게 집 밖으로 나가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지만 운전은 빠졌던 송곳니가 다시 날 때 배울 수 있다고 반복하여 주지시킨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규칙은 아슬아슬하지만 잘 유지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내 아들(크리스토스 파사리스)의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해 아버지가 외부에서 데려온 크리스티나(안나 칼라이치도)에게서 큰 딸(아겔리키 파푸리아)이 비디오를 얻어 내고, 아버지 몰래 비디오에 담긴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그녀는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 아버지의 모든 규칙은 억압이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송곳니가 빠지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 그녀는 계속 남아 자신의 남동생의 성욕을 해소하는 일을 해야 하거나 스스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더 랍스터>의 인물들이 놓인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미셸 밸리)가 숨겨놓은 전화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소용없는 것처럼, 안전한 집 안에서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 영원히 알 수 없다. 외부 세계와 만나고 싶다면 고양이에게 죽게 되더라도 나가는 것 외에는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우리 세계의 은유
이렇게 이제까지 란티모스의 영화들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들이었다. 그들은 정해져 있는 규칙 가운데 어떤 것을 따를 것인지 또는 그것을 따를 것인지, 위반할 것인지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 이를 통해 란티모스는 우리 인간들이 놓인 상황이 이 낯선 상황들과 과연 다른지 묻는다. <킬링 디어>는 스티븐이 마주하는 상황을 통해 의사들처럼 자신을 신적인 지위에 놓고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자의 선택이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는 단지 의사라는 직업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법조인이든 기업인이든 어떤 직업군에게로도 확장될 수 있는 질문이다. 스티븐의 아내인 안나(니콜 키드먼)는 자식들이 마비되어 가는 고통 속에서 마틴에게 묻는다. 스티븐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왜 자신과 자기 자식들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마틴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이 종종 자신이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와 똑같다고 말하기에, 자신이 스파게티를 먹는 방법이 특별하다고 느꼈었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모든 사람이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것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슬펐다고. 이후 스티븐은 마비되어 가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병원장에게 분노한다. 스티븐이 자신이 의사라는 이유로 자기 손에 생명이 스쳐 지나갈 때도 아무런 분노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병원장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티븐에게 그것을 알려줄 방법은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틴은 안나의 질문에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을 것이다.
<더 랍스터>는 이렇게 묻는다. 사랑에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일까? 성별, 지위, 재산, 인종, 장애 등 사회가 인정할 수 있는 공통점들을 보여야지만 허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는 것일까? <알프스>와 <송곳니>에서는 가족의 문제가 사회로 확장된다. <알프스>에서 간호사의 아버지는 정말로 그의 아버지일까? 그녀가 그의 눈에 시간에 맞춰 넣어주는 안약처럼 그들의 관계는 계약된 관계로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고용한 테니스 선수의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가족을 잃지 않기를 원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위로는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구할 수 없고 누군가 사주지 않으면 위로도 줄 수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간호사의 상황은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림이 된다.
<송곳니>에서는 아버지에게 통제받는 아이들이 독재정권하의 사회에 대한 은유가 된다. 란티모스는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 아버지의 공장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자신의 은유를 완성한다. 이 이야기는 단지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언어들을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의미로 가르치는데, 예를 들어 가족들 간의 식사에서 전화를 건네주겠냐고 물어보면 소금을 건네주는 방식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언어에 대한 통제 방식을 들려준다. 바다는 나무 팔걸이가 달린 안락의자이고 그에 대한 예문은 ‘서 있지 말고 바다에 앉아서 나랑 얘기나 해요’이다. 고속도로는 매우 강한 바람이고, 소풍은 마룻바닥을 만들 때 사용되는 단단한 건축 재료이며, 카빈총은 아름다운 하얀 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통제되어 오면서 단어의 의미들은 끊임없이 생산된다. 이는 독재정권이 다른 나라의 문화가 유통되는 것을 막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다. 또한 외부 세계에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 그들에게 진짜 있었을지 모르는 큰 형이자 오빠는 그들에게 위험을 고지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역시 독재정권이 하나의 신화적인 역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란티모스는 영화 안에서 구체적인 인물이 마주하는 선택을 사회 보편에 대한 은유로 확장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도, 그리고 <가여운 것들>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확장은 이루어진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은 단지 국가의 안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않는 한 개인으로서의 여왕의 이야기가 아니다. 란티모스는 의원들의 놀이들을 보여주면서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두 여성의 이야기를 보편으로 확장한다. 휘그당과 토리당의 의원들은 국가의 재정을 생각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를 두고 싸우지만 그들의 놀이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된다. <가여운 것들> 역시 자신의 아이의 뇌가 이식된 한 사람의 여성,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들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잡는 법부터, 모두가 하고 있지만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 등 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벨라는 한 사람의 독자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란티모스의 은유는 오스카 와일드의 시대로부터 본질적으로는 그리 달라지지 않은 우리 세계를 겨냥한다.
인물들의 무규정성
하지만 란티모스의 이러한 은유에서 달라진 것은 이제 이상한 세계의 규칙성을 드러내는 것보다 인물의 내면세계에서 무엇이 형성되는지를 드러내는 데 더 힘을 쏟는다는 점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은 자신이 언제든 여왕으로서의 권력을 손에 쥐고 사라(레이첼 바이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음을 확인할 때만 만족한다. 이는 앤 여왕 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된 규칙이며, 그런 점에서 그 규칙은 앤의 변덕에 달려 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앤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만들어낸 규칙으로부터 과연 만족을 얻는지다. 앤은 자신의 권력으로 사라를 가졌는지 사라가 진정으로 사랑을 자신에게 주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방식의 소유인지, 과연 소유이기는 한 것인지 알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만든 복종의 규칙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이것이 인물의 내면세계로 방향을 바꾸면서 란티모스가 획득하게 되는 다층성이다.
앤은 자신이 갈구하는 것이 사라의 사랑이었던 것인지 완전한 복종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아비게일(엠마 스톤)에게도 그렇다. 결코 그녀의 사랑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그녀에게는 아비게일을 복종시키는 방법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아비게일은 구둣발로 앤의 토끼를 짓누르고, 앤은 아비게일이 자기 토끼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 자기 다리를 주무르는 아비게일의 머리채를 짓누른다. 아비게일은 앤을 차지하는 게임에서 사라에게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앤의 마음도, 권력도, 안정도,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 앤과 사라, 그리고 아비게일은 권력관계 속에서 모두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무엇을 얻고 또 잃었는지, 무엇을 계속해서 원하고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게임의 규칙에 따라 선택을 강요받던 인물들은 이제 자신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자아들로 인하여 그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된다. 앤은 때로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으로, 때로는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자로, 때로는 아이들을 잃은 어머니로, 때로는 결정하지 못하는 한 나라의 여왕으로 있고, 그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치고 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사라 역시 때로는 앤의 유일한 솔직한 애인으로, 앤을 사랑하는 오랜 친구로, 때로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로, 때로는 권력을 쥔 실세로 우리와 마주하지만, 우리도 그녀도 그녀가 쓴 마지막 편지에 스쳐 지나간 많은 감정의 파편들만큼이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예측불가능하게 만드는 인물들의 힘이 영화를 전개시키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란티모스의 영화는 분기점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게 만드는 사건들의 연쇄와 란티모스가 만든 새로운 규칙의 세계가 우리를 예측 불가능하고 낯선 기분으로 몰아넣었다면, 이제 그의 인물들이 우리를 예측 불가능한 불안과 긴장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가여운 것들>에서 역시 우리를 예측 불가능성으로 몰아넣고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벨라 자신이다. 그녀가 그녀의 독특한 ‘성장’ 방식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규칙들은 관습적인 세계의 규칙들을 뒤엎고 비웃는다. 그녀는 여성에게 부여된 고정적인 이미지들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 빈부격차 등 ‘실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도입된 모든 논리에 저항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처럼 단순했던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 다른 얼굴들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용감하게, 때로는 사상가의, 때로는 과학자의 얼굴을 한다. 우리는 한 복잡한 유기적 생명체의 성장과 함께 고정적인 단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 얼굴을 획득하게 되는 여성의 성장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란티모스의 영화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기점으로 새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 영화들처럼 사회에 대한 은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세계를 통해 인간 자체의 무규정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벨라가 성장하면서 내리게 되는 선택들은 규칙에 따라 움직일 때 일어나는 규정되어 있는 선택들,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들과는 다르다. 던컨(마크 러팔로)와 여행을 떠나는 선택, 매춘의 선택, 맥스(라마 유세프)와의 결혼, 블레싱턴(크리스토퍼 애벗)에게로 돌아가는 선택 등은 양자택일을 벗어난 그녀의 독자적인 선택들이다. 그녀의 얼굴은 앤의 얼굴이 그랬던 것처럼, 사라와 아비게일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얼굴들을 품고 있고,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는 법이 없다. 그녀는 주어진 고정된 정체성 없이 그 자신의 독자적인 선택들로 자신의 삶을 채워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 그 모든 가여운 존재들의 성장은 늘 그런 것일 것이다. 란티모스는 인물의 내면으로 영화의 방향을 돌림으로써 이러한 보편적 주제에 가닿는다. 우리는 무수한 욕구와 욕망들 속에서, 때로는 그것들의 실현을 방해하고 충돌하기도 하는 동정심과 철학 등과 함께 더 복잡한 생명체가 되어가고, 복잡한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도 답은 없을 테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벨라처럼 우리는 늘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 답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 다음글 <절해고도>, 정답이 없는 질문을 내려놓기
- 이전글 잔잔하지만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