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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 정답이 없는 질문을 내려놓기2024-03-22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이미지



<절해고도>, 정답이 없는 질문을 내려놓기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때때로 우리는 정답이 없는 질문의 정답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진정 나에게 좋은지 등을 고민하며 나보다 현명한 누군가가 모범 답안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나와 타자 사이의 벽은 높으며, 그 어느 현자라도 그 벽을 넘을 수는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허망한 답변만을 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길이 안 보여 불안한 우리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이가 없어 고독하다. ‘육지에서 떨어진 외로운 섬’이라는 뜻의 <절해고도>는 바로 이 고독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이미지2


 <절해고도>의 서사는 대체로 느슨하게 진행된다. 촉망받는 조각가였던 ‘윤철’은 아내와 이혼 후 지방 소도시에서 무엇이든 납품하는 인테리어 업자로 살고 있다. 그는 인문학 강사인 ‘영지’를 만나게 되는 등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윤철’은 어느 날 자신을 닮아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 ‘지나’의 학교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지나’가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그리며 친구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지나’는 ‘윤철’에게 자퇴와 출가를 선언한다. ‘윤철’은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럽다. 모든 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윤철’이 귀국하자 이번에는 ‘영지’가 ‘윤철’을 떠난다. ‘윤철’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나 지나가던 낚시꾼에게 발견돼 살아남는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이미지3


 ‘윤철’의 생환 이후 <절해고도>는 새롭게 시작한다. 윤철은 지저분한 장발을 정리한 채 국수집 주인이 되어 있고, 머리를 삭발한 ‘지나’는 ‘도맹’이라는 법명과 함께 승려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암이 재발한 ‘영지’는 천천히 죽음을 준비한다. 영화는 인물들의 이러한 회심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윤철’은 ‘지나’에게 ‘도맹’이 되기로 선택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윤철’은 ‘지나’가 과거에 종교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자신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도맹’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맹’은 ‘윤철’이 자살을 시도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까지는 ‘윤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홀로 걷는 ‘윤철’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도맹’은 ‘윤철’을 떠날 것이며, ‘영지’는 죽을 것이다. ‘윤철’은 결국 다시 혼자, ‘절해고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윤철’은 그가 과거에 그러했듯 자살을 시도할 것인가? 질문의 답은 열려 있다. ‘윤철’은 어쩌면 다시 예술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도맹’은 불자의 길을 포기하고 다시 ‘지나’가 될지도 모른다. (김미영 감독과 이연 배우는 이 가능성을 지지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마지막까지 답을 주지 않는 영화 앞에서 관객은 인물들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절해고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윤철’과 ‘도맹’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것은 ‘윤철’과 ‘도맹’ 자신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극중 ‘윤철’은 “나도 지금의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었다”고 말한다. ‘윤철’은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따위 잘 알지 못한다. 그는 한때 종교인이 되고 싶어했으나 예술가가 되었으며 한때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를 결심했으나 이혼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 온전히 선택하지 못한다. 수많은 실패를 겪어온 그는 무엇이 좋은지 고민한다. 그는 ‘도맹’에게 무엇이 좋은지 묻지만 ‘도맹’은 “알 수 있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봐”라고 답할 뿐이다. 이미 죽음을 경험한 ‘윤철’에게 이 대답은 허망하다.

결국 <절해고도>를 통해 우리는 타자와 나의 간극만큼이나 나와 나 자신의 간극이 넓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나에게는 무엇이 좋은가? <절해고도>는 답이 나올 수 없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거짓된 대답을 강요하는 대신 이 질문들을 그저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인생에 정해진 길 따위는 없다. 걸음을 떼고 나서야 인생의 길은 비로소 싹튼다. (道萌: 도맹) 홀로 길을 걷는 것이 고독하거나 나보다 길을 앞서 나가는 이들이 부러울 때는 그런 길이 애초에 부재함을 기억하자. 우리 모두는 망망대해와 같은 이 세계를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명심할 것: 절해고도를 완성하는 것은 섬 주위의 바다다. 그리고 모든 절해고도들은 바다 속에 함께 한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이미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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