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2024-04-15
작은영화영화제 포스터 이미지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작은영화영화제에서 상영될 세 편의 단편영화를 보았다. 대외적 인터뷰 등이 부재하기에 이 세 명의 감독들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이 영화들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 나는 이들이 어떤 공통된 위기의식에 근거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마 그들의 위기의식이 곧 나의, 나아가 모든 현대인의 위기의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간략하게 줄거리를 살펴보자.


작은영화영화제 <타인의 삶> 스틸컷 이미지

-<타인의 삶>

평범한 회사원인 ‘규호’는 어느 유명 작가의 소재 조사 인터뷰에 응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느닷없이 ‘규호’의 친구인 ‘민주’의 얘기를 꺼내며 ‘민주’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규호’라고 말한다. 작가는 ‘규호’에게 ‘민주’가 그를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한다. 혼란 속에서 증오의 원인을 추측하던 ‘규호’는 이 모든 일은 ‘석현’이 ‘민주’와 자신 사이에서 오해를 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유를 알겠다고 말한 작가는 규호에게 지금 그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영화는 인터뷰 사례비를 받은 채 씁쓸한 표정으로 떠나는 ‘규호’의 모습으로 끝난다.



작은영화영화제 <도축> 스틸컷 이미지

-<도축>

‘상우’는 곧 태어날 아들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도축장에 왔다. 그러나 도축장의 거친 문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의 ‘상우’에게 도축용 공기총을 쏘는 일은 버겁기만 하다. ‘상우’는 사수에게 다른 잡일을 시켜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나 사수는 “애 같이 굴지 말라”고 그를 차갑게 질책한다. 압박감에 무너진 ‘상우’는 자신이 도축했어야 하는 소를 데리고 도망친다. 소 옆에서 흐느끼는 ‘상우’를 비추는 카메라가 페이드아웃된 후 영화는 어느새 도축장에 훌륭하게 적응한 ‘상우’가 후배에게 도축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끝난다.



작은영화영화제 <EX MACHINA> 스틸컷 이미지

-<EX MACHINA>

알 수 없는 존재가 세상에 도래하고 심판의 날이 선언된다. 심판의 날에 찾아올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근 5년 내에 직계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선택받은’ 이들로부터 수명을 나눠받는 것뿐이다. 주인공은 가족들에게 20년의 수명을 나눠준 이후로 죽음의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 세 편의 단편영화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영화의 문제 상황은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하는 계량화의 폭력으로 인해 야기되었다. 둘째, 영화 속의 문제 상황은 적절하게 해소되지 못한다. <타인의 삶> 속 ‘규호’는 인터뷰 비용인 150만원을 받고 친구 사이의 은밀한 비밀을 누설한다. ‘규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우정은 단 돈 150만원으로 환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규호’를 특별히 더 비난할 이유는 없다. 푼돈에 친구를 팔아 넘긴 것은 ‘규호’를 증오한다고 말했을 ‘민주’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축>의 ‘상우’ 역시 양육비를 위해 인격을 포기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도축장의 신참에게 소를 죽여야 너가 산다고 말하지만 관객은 ‘상우’의 인격 역시 도축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렇듯 숫자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손쉽게 무너지며 이는 삶이 수명이라는 수치로 정량화되는 설정의 <EX MACHINA>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사태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무형적 가치가 숫자 앞에서 증발되는 사태를 다루면서도 이에 대해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영화는 문제 상황에 냉소로 응대하거나(<타인의 삶>), 문제에 굴복하거나(<도축>), 문제에 답을 내놓기를 포기할 뿐이다(<EX MACHINA>). 영화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답변의 부재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 과거의 수많은 ‘현자’들이 이미 거짓 선지자로 판명되었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무지의 인정은 오히려 미덕에 가깝다. 모두가 문제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모두가 서로를 팔아넘기는 이 광기의 시대에 ‘우리’라는 단어가 성립하기는 하는가? 


우선 나는 기도를 하겠다.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달라고…


다음글 사색과 산책을 부르는, 긴 여운의 영화 <땅에 쓰는 시>
이전글 나르시시스트와 나르시시스트의 대결 - 메이 디셈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