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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 - 호모소셜 사회에서 중년 여성으로 살아남기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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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 - 호모소셜 사회에서 중년 여성으로 살아남기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정순(김금순)은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던 정순은 공장에 새로 들어온 조용한 성격의 영수(조현우)와 눈이 맞아 연애를 하게 된다. 하지만 알콩달콩한 만남에 느끼던 행복도 잠시, 둘만의 밀회에 찍었던 영상을 영수가 회사 사람들에게 퍼뜨리면서 정순에게는 악몽 같은 나날들이 시작된다.
<정순>(2024)은 중년 여성의 성폭력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갈매기>(2021)를, 디지털 성폭력을 둘러싼 모녀의 관계를 그렸다는 점에서 <경아의 딸>(2022)을 연상시킨다. 차별화되는 점은 디지털 성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인 공장에서의 일상과 그 안에서 힘의 역학관계를 생생하게 다뤘다는 것이다. 젊은 공장 관리자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이를 가리지 않고 반말을 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모욕적인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권위주의적인 젊은 관리자 아래에서 일터의 분위기는 경직되기 일쑤이다. 영수가 저지르는 디지털 성폭력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공사장을 전전하다 다리를 다쳐 공장에 들어오게 되고, 보증금도 없어 달방에 투숙하는 영수에게 정순은 연민과 호감이 섞인 감정을 느낀다. 반면 젊은 관리자와 그 친구들은 조용하고 점잖은데다 나이도 많은 신입인 영수를 하대하는데, 그들에게 무시받고 싶지 않았던 영수는 담배를 피다가 그들에게 정순의 영상을 보여주게 된다.
호모 소셜(남성 동성 사회성) 사회에서 남성들은 집단에 동일화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며, 그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성이다. 영수와 일대일 관계로 만나 연애를 할 때 정순은 영수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어떤 면으로는 공장 일에 더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선배이고 번듯한 집도 있어 경제적으로도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남성 동성 사회성 안에서 여성인 정순은 그저 즐길 거리로 소비되는 성적 대상일 뿐이다.
여성의 성을 쾌락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당사자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분위기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정순의 사회적 체면을 손상시키고 구설수에 오르게 한다. 연애를 하면서 즐거워하던 정순이 친밀한 관계에서 배반당한 후 느끼는 감정과 이겨내기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시종일관 차분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그녀의 여정을 응원한다. 딸과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기만 하던 정순이 사건 이후 운전면허를 따고 마지막에 직접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장면은 사건 이후 정순의 성장을 보여준다.
주류에서 잘 들여다보지 않는 중년의 공장 노동자들의 삶과 연애, 그리고 폭력의 문제를 다룬 점, 그리고 그 문제를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다뤘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지만, 영화적 완성도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롱숏은 미학적인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제작 환경에서 여력이 없어 마스터숏을 그대로 이어붙였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긴 마스터숏 뒤에 이어지는 샷들은 종종 자연스럽지 않은데 의도적으로 컷을 튀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기본기가 부족해 어색하게 연결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한국 독립영화에서 계속 지적되고 있는 음향문제도 심각하다. 롱 숏에서 세 명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디에 붐마이크가 위치해 있는지 훤히 보일 정도로 한 명의 목소리는 비교적 가까이에서 정확하게 들리고 다른 한 명은 멀리서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릴 정도이다.
좋은 소재를 갖고 어느 정도 완결성을 지닌 시나리오로 풀어내는 것도 영화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영상적으로 어떤 거리감을 갖고 인물을 대할지, 어떤 미학으로 풀어낼지 또한 중요하다. <정순>은 소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있되 그것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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