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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절된 시점숏 안에서 타자화되는 아이들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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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시점숏 안에서 타자화되는 아이들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초등학교 교사 수현(손수현)은 비를 맞으며 등교하는 반 학생 요한(오한결)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이후로 요한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정황을 목격한 수현은 요한에게 점차 신경을 쓰게 되고, 수현의 사소한 호의는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 시달리며 기댈 곳 없던 요한의 과도한 집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양치기>는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아이에게 관심을 주었던 어른이 도리어 그 아이에 의해 해를 입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보살펴야 하고 불쌍하기만 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생각보다 영악하고 폭력성을 갖고 있을 때 어른이 느끼는 당혹감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때 느끼는 취약성이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초반까지 수현과 요한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던 영화는 요한이 거짓말을 한 시점부터 그가 처한 상황이나 그의 내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기를 그만두고 오직 피해를 입은 수현의 심리 상태 묘사에만 집중한다. 이 불균형한 시점에 의해 요한의 캐릭터는 공포영화의 괴물에 가깝게 타자화되고 만다. 요한이라는 인물은 가정과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이지만 결코 순수하거나 선량하지 않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아이이다. 따라서 이 인물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다면적인 묘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수현에게 있어 요한은 불가해한 존재이며, 자신의 사생활을 침입하는 존재이자 사회적 삶을 궁지에 빠뜨리는 가해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요한의 존재를 공포영화나 스릴러 장르에 맞게 미스테리화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초반에 보여주었던 가정에서의 폭력 상황으로 인해 요한의 존재는 완전히 괴물화되지도 못한다.
요한이라는 인물을 완전히 괴물화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심리를 제대로 묘사하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는 요한이라는 캐릭터를 스릴러나 공포영화의 장르적인 쾌감 안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렇다고 드라마적인 장르 안에서 이해를 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남은 것은 지극히 평범한 교사 한 명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에게 사소한 호의를 보였다가 큰 피해를 입고 사회적으로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억울함과 켜켜이 쌓여가는 짜증이다.
수현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는 선의는 갖고 있지만 그건 비를 맞는 아이에게 우산을 건네는 정도일 뿐, 자신이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심각한 폭력 상황에 처한 아이를 구출할 만한 의협심이나 용기를 가지진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수현에게 요한이라는 존재는 외상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요한은 폭력 가정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도와줄 것 같은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도 버림받자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그곳을 탈출한 아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이 아이가 왜 이토록 타자화되고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로 그려지는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가장 곱씹게 되는 것은 요한이나 수현의 캐릭터나 영화의 핵심 사건이 아니라, 이들을 이런 식으로 캐릭터화한 감독의 의도와 요한과 수현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시각의 비대칭성이다. 수현은 우산을 건네는 첫 번째 액션 이후로는 계속 요한에게 끌려다닐 뿐이고, 요한은 수현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어떤 유의미한 도움도 마음도 받지 못한 채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해 다시 나타난다. 왜 이 영화는 이 소년이 저지른 사소한 거짓말에 의한 한 어른의 피해에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할애하고, 그가 폭력 가정의 생존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통째로 생략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이 어른들의 시점이 닿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장면으로 끝났듯이, <양치기> 또한 어른이 알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운동장에서 밝게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떻게든 아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던 히로카즈의 작품과 달리, 이 영화에선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가 완전히 단절된 채 어른의 입장에서 비대칭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괴물’이 되었는가? 영화 속에서 어른과 아이의 세계는 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다른 시점과 쇼트에 갇혀 충돌하는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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