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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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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월요시네마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 <오키쿠와 세계>에 관하여2024-07-15
영화 <오키쿠와 세계> 스틸컷 이미지



[4월 월요시네마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 <오키쿠와 세계>에 관하여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4월 29일 황영미 영화평론가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 2024)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 띤 토론을 이어갔다. 두 번째 줌 세미나에서는 3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제1회 월요시네마는 심영섭 피프레시 한국지부 13대 회장이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을 발제했다.



-사회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본 협회에서 주관하는 ‘월요시네마’. 오늘은 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님을 모시고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2024)에 대한 흥미로운 발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발제자: 반갑습니다. 영화평론가 황영미입니다. <오키쿠와 세계>는 아주 독특한 영화인데요, 따뜻하고 의미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먼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키쿠와 세계>라는 영화는 우리나라에 『씨네21』 같은 영화잡지처럼 일본의 정평있는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 2023년 베스트10에서 1위를 했어요. 그런데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에는 일본 대표로 <오키쿠와 세계>가 나가지를 못했고, 빔벤더스 감독의 <퍼펙스 데이즈>가 나가게 됐죠.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 5위 후보 안에 들었지만, <오키쿠와 세계>가 나갔다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폴란드 아우슈비츠와 담을 사이에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독일 고위 장교 가족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섬뜩하게 그리는 탁월한 영화가 수상 했지만, <오키쿠와 세계>도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경쟁했을 법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제목이 주인공인 오키쿠를 먼저 쓴 <오키쿠와 세계>라고 되어 있는데요. 일본 원제는 <세카이노 오키쿠(せかいのおき)>입니다. ‘세계의 오키쿠’라는 것입니다. 아이엠디비(https://www.imdb.com/)라는 평론가들이 자주 보는 미국 사이트에 보면 평점이 나와 있는데요,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평점인데 아이엠 디비(imdb)에서는

6.9점이라고 돼있습니다. 7점 가까이 되거나 7점이 넘어가면 상당히 작품성을 높게 인정받은 영화라고 볼 수가 있죠. 이 영화는 인분이야기로부터 시작해 계급을 뛰어 넘는 청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인분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카모토 준지라는 일본 사회파의 대표주자 감독의 탁월한 미학적 능력 때문입니다.


감독의 특성


감독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나 하는 것이 예술 영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경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순환경제’가 중요해집니다. 즉 우리가 쓴 것이 쓰레기로 쌓이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자연이 순환되듯이, 식물이 새로 씨앗에서 시작해서 자라서 꽃이 피고 씨앗을 남기고 소멸하고 씨앗에서 다시 시작하듯이, 인간도 자연의 산물을 먹고 성장하고 살다가 죽어서 흙이 되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식물의 순환을 생각해 봅시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즉 ‘순환경제’의 관점으로 쓰레기를 없애는 방법을 찾는 차원에서 <오키쿠와 세계> 영화가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한한 사카모토 감독은 “사회 밑바닥 분뇨업자를 통해 코로나19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죠. 에도시대는 사람에게서 나온 인분이 거름으로 사용되고, 이 거름으로 키운 채소가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환경제’가 활성화하던 때입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일본에선 물건을 헛되이 쓰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분뇨를 거름으로 쓰는 일을 비롯해 영화에서 나무통을 고쳐 쓴다든가, 종이를 다시 쓰는 등 끝까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문화를 일회용 물건이 넘치는 지금 시대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올해 65세의 나이로 휴먼 드라마, 서스펜스, 스펙터클한 대작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테마의 대중영화를 선보였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30번째 작품으로 처음 흑백 시대극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일본의 흑백 영화이고 잔잔한 화면 구성을 가진 일본 특유의 화면비 4대 3비율로 영화를 찍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독특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곳에서 사카모트 감독이 인터뷰하실 때, 일본 선배 감독들의 고전적인 요소나 촬영 기법을 활용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특히 개인의 일상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잔잔한 고전 가족드라마 영화의 라인이 있잖아요. 다른 일본 감독들도 있지만, 미조구치 겐지라든가 오즈 야스지로 등의 감독들의 특징과 <오키쿠와 세계>가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적이면서도 굉장히 처절한 현실을 극복하는 삶의 이야기를 소재로, 잔잔한 구성으로 구현하는 특성이 있는 선배 감독의 고전영화 같은 분위기를 같이 내고 싶었다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제가 이 두 분만 말씀을 드렸어요. 감독 인터뷰를 들어보면 분뇨를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박스 종이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색깔을 유사하게 내기 위해 녹차도 써가면서 여러 가지로 분뇨의 효과를 최대한 냈다고 합니다. 분뇨 장면이 많기 때문에 컬러로 찍으면 관객들이 거북하기 때문에 흑백으로 찍은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실은 제작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 영화적 특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화의 구성


영화는 7장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서장(序章)이 있고 마지막 장이 있어요. 그런데 장마다 각각의 단편들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볼 때는 일부러 이렇게 구성을 한 것 같아서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보게 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제작 비화가 있었더라고요. 인분을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작비를 투자받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우선 단편 한 편을 굉장히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만든 다음에, 투자를 받아서 또 나머지들을 하나하나 맥락에 맞게 구성하다 보니까 마치 이 연작처럼 이렇게 단편 7편으로 구성되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장은 ‘에도의 똥은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재래식 병기를 소위 푸세식이라고 하잖아요. 그 변기에서 인분을 푸는 장면부터 시작이 됩니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서 시작한 시대입니다. 영화<노량>을 보면 그 내용이 도입부에 나오잖아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할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의 갈등이 나오죠. 역사적으로는 이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도읍을 정하고 1603년부터 1868년까지 270년간 에도막부가 지배를 하게 됩니다. 1868년에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바로 전 단계인 1858년을 이 영화가 배경으로 잡아 1~2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는 사실은 일본은 중세 다음에 바로 근대죠. 막부 시대 다음에는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는 게 이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었죠.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영화의 서장은 1858년 에도의 늦여름에서 시작을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오키쿠’(쿠로키 하루)의 아버지가 사무라이였죠. 상관의 부정함을 고발했다가 면직을 당한, 어떻게 보면 굉장히 훌륭한 아버지이지만, 오키쿠가 볼 때는 원망스러운 감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 겐베이(사토 코이치)와 외동딸 오키쿠가 살아가는 공동주택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는 젊은 주인공 세 명이 있습니다. 사무라이 딸인 주인공 오키쿠는 원래 귀족이었지만, 아버지가 면직을 당해서 굉장히 가난한 공동주택에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또한 인분업자 청년 둘이 있습니다. 얼른 봐서는 사무라이 딸과 인분을 퍼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전혀 말도 안 섞을 것 같고, 특히나 계급 사회에서는 더했을 것 같은데, 그 세 사람의 청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게 됩니다. 인분을 사고파는 분뇨업자 야스케(이케 마츠 소스케), 츄지(칸 이치로)가 등장하여 사랑과 우정을 잔잔하게 담아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는 야스케라는 분뇨업자가 화장실 뒤에서 분뇨를 푸고 있고 마을에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서 나온 어린 스님이 분뇨업자인 야스케에게 인분값을 받고 있는데, 반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야스케가 계급사회에서 최하층민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다음 장면이 포스터에서 나오는 장면인데요. 츄지는 원래 종이를 주워다가 폐지를 파는 사람이었는데, 폐지 모으는 곳에서 버리기 아까운 종이를 모아 오키쿠에게 주기도 했죠. 그런데 수입이 더 나은 분뇨일을 하는 야스케 옆에서 일을 배워서 같이 일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가족이 없이 외롭게 살아 가는 인물입니다. 포스터에서 나온 도입부 장면은 비가 오는데, 이 세 사람이 화장실 처마 아래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시 같은 문학에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랑이 싹트는 상징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곽재용 감독의 한국영화 <클래식>에서 조인성과 손예진이 비를 맞잖아요. 포스터 장면을 보면 조인성이 자켓으로 손예진의 비를 가려주는데, 그때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키쿠와 세계>에서도 이 포스터 장면에서 오키쿠는 아는 척을 하는 야스케한테는 냉정하게 대하면서도, 츄지를 볼 때는 눈인사를 하면서 다정하게 대하죠. 왜냐하면 츄지가 폐지 중 쓸 수 있는 깨끗한 종이를 찾아 오키쿠한테 준 적이 있어서 둘은 조금 좋은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이 장면은 세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것도 보여주면서, 비를 피해 함께 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 튼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와 영화의 의미


‘무적의 오키쿠’라는 장에서는 장대비 때문에 배가 운행하지 않게 돼, 야스케가 인분을 푸러 오지 못해서 공동주택 화장실의 인분이 거리까지 넘치는 상황이 나옵니다. 여기서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캐릭터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코를 싸쥐고 냄새를 호소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넘쳐난 인분의 장면에서 마치 인분 냄새가 영화 바깥으로 나오는 것 같은 리얼함이 드러납니다. 서로들 불평을 하고 있는데, 분뇨 업자 야스케가 드디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 겐베이와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오키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정의를 추구하려고 했지만, 사회에서 배타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아버지가 면직당하는 바람에 자신도 에도의 최하급 공동주택에 살고는 있지만 오키쿠의 자존심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야스케 뒤에 따라온 츄지를 볼 때는 눈을 아래로 내려보며 공손해집니다.


오키쿠의 아버지는 굉장히 꼿꼿한 사람인데, 어느 날 사무라이 차림을 한 사람이 찾아와서 둘이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오래된 원수 사이로 결투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결투 날짜를 정하고 찾아왔던 사무라이는 사라집니다. 야스케는 츄지에게 분뇨일을 시범을 보이면서 공동주택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며 자기는 사무라이 마을을 주로 맡을 테니 츄지가 이 마을을 맡아 달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는 연극 같아요. 공동주택에서 주로 나오고 외부는 많이 나오지 않으니까 어떤 연극적인 밀도가 있죠. 캐릭터도 잘 살려주고 공간의 이동도 굉장히 효율적으 로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후 츄지가 이 마을의 인분을 푸러 왔을 때, 오키쿠의 아버지 겐베이가 문높이가 반만 되어 있어서 화장실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겐베이는 오키쿠가 성격이 까다로 우며 오키쿠가 싼 주먹밥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요구를 하면 다시는 안 싸준다는 말을 해줍니다. 이는 나중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복선이 됩니다. 그는 츄지에게 ‘세계’라는 말을 아는지도 물어봅니다. 츄지는 글도 배우지 못해서 모른다고 합니다. ‘하늘의 끝, 그게 바로 세계’라고 아버지가 얘기를 해주죠. 그동안은 일본 내에서만 모든 일들이 일어났는데, 네덜란드도 들어오고 포르투갈도 들어오고 외국과의 교류가 생기면서 ‘세계’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거죠. 새로운 세계가 열려 일상이 달라지는 일본 사회의 변화의 지점을 얘기하는 데 이 ‘세계’라는 말이 사용되게 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을 제일 좋아한다’ 라고 얘기를 해주도록 하라며 사랑과 세계를 관련해서 말하게 되죠.


그리고 오키쿠의 아버지는 결투를 하러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결투하는 장면은 안 나와요. 결투의 끝만 보여줍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오키쿠는 츄지에게서 아버지가 무사들과 함께 서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굉장히 위험하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도 방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 가슴에 품고 비장한 각오로 집에서 달려나갑니다. 다음 장면에서 결투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사무라이들이 칼을 칼집에 꽂는 장면이 나올 뿐이죠. 칼을 썼다는 얘기죠. 그리고는 사무라이들은 오키쿠의 아버지가 쓰러진 곳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처절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버지만 다친 것이 아니라, 오키쿠도 목을 칼에 베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죠. 다행히 죽지 않고 목소리만 잃게 됩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오키쿠는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상처를 입고,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두문불출합니다. 공동주택의 이웃 사람들이 오키쿠 집 앞 툇마루에 먹을 것을 갖다 주고, 필요한 것을 갖다 주지만 오키쿠는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관을 짜는 사람, 분뇨업자 등 최하층 계급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츄지는 야스케한테서 점차 분뇨에 관련한 일들을 배우지만, 천성적으로는 깨끗한 사람 입니다. 그런데 야스케는 분뇨업자로 오래 일한 사람이어서 변을 더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변을 통해서 우리가 돈을 벌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게다가 야스케는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면서도 웃습니다. 인분을 뒤집어쓰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해도 그는 웃습니다. 분노를 넘어서는 유머를 가진거죠. 유머로 극복하면서 “츄지, 여기서 웃어야 돼”라고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극복하는 야스케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우리가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감독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키쿠가 상처를 입고 결국은 말을 못하는 상황에서 절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스님과 아이들이 오키쿠의 집에 찾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죠. 그리고 학교에 다시 나와달라 얘기를 하는데 오키쿠는 그제야 문을 열어줍니다. 그들의 간곡한 권유로 오키쿠에게 큰 변화가 생기는데요.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이 된 거잖아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보면 신분의 변화일 수도 있고요. 이때부터 오키쿠의 세계가 변화하게 됩니다. 오키쿠는 스님과 아이들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자신이 목소리를 잃었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손동작으로 전달합니다. 스님은 일단 학교에 나오면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데요, 오키쿠는 학교에 나가서 글을 써서 보여주면서 스님이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소통의 장애가 생겼을 때 오히려 자기의 존재감이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무라이 세계는 잘난 척이나 하고 노름이나 하고 살아가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왜냐하면 사무라이는 열심히 다른 성에 있는 사무라이와 싸워야 되는데, 에도 말기에는 점차 싸움이 없어지니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층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반면 한심하게 노름이나 하고 인성도 좋지 않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사무라이 계급을 비판하는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죠. 인분값을 더 달라는 사무라이에게 이것이 최선이라고 답하는 야스케는 사무라이가 뿌린 인분을 뒤집어 쓴 채 발로 채이고 얻어 맞기까지 합니다. 오키쿠는 길을 지나다 야스케가 맞아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과는 달리 야스케를 안쓰러워 합니다.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서 세계가 새로워졌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장면인 비오는 화장실 앞 장면에서는 오키쿠가 야스케에게 자기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대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인분을 뒤집어 쓴 야스케 얼굴을 닦아주려고 자신의 손수건을 자꾸 야스케에게 갖다 대는 모습을 이상하게 보던 오키쿠의 곁을 지나가는 귀족 여자들이 비웃어도 오키쿠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계 인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키쿠가 장애를 입게됨으로써 새로운 세계 인식을 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츄지는 평소 알고 지내는 관짜는 사람한테서 오키쿠가 큰 상처를 입고 목소리를 잃었지만, 절의 학교에 나가서 글씨로 소통한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할 내용을 글씨로 쓰게 되면 종이가 많이 필요하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츄지는 깨끗한 종이를 말아가지고 오키쿠를 찾아옵니다. 사랑의 표현이죠. 물론 전에도 오키쿠는 츄지를 좋은 인상과 느낌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하고도 사무라이 계급의 딸이지만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제 츄지를 위해 오키쿠가 주먹밥을 정성껏 싸고 큰 나뭇잎에 곱게 싸서 가슴에 품고 츄지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만 수레에 치이어 넘어지면서 가슴 안에 있던 주먹밥이 수레바퀴에 눌려 흙도 묻고 납작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잘 싸서 가슴에 품고 츄지의 집을 어렵사리 물어보며 츄지의 집 앞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츄지를 만나자 츄지의 냄새에 자연스럽게 코를 싸쥐는 자기 손을 때리면서 ‘그러면 안 돼’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츄지에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합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손과 몸동작으로 전달을 하죠. 당신을 주려고 주먹밥을 쌌는데, 수레 바퀴에 치이어서 주먹밥은 납작해졌다고 손발을 동원해가며 전달합니다. 츄지도 오키쿠에 대한 뜨거운 사랑, 가슴속에 가득 찬 사랑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땅을 칩니다. 츄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당신을 제일 사랑한다’는 말이죠. 츄지는 오키쿠와 같은 입장, 즉 말을 못하는 입장이 돼서 오키쿠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합니다. 츄지가 손끝을 위로 치켜올려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그게 바로 ‘세계’죠.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이 세계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전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죠.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비가 왔었죠. 영화가 시작할 때 사랑이 시작되고, 비는 계절이 바뀌면 눈이 됩니다. 눈도 사랑으로 표현되는 거죠. 두 청년도 변화합니다. 츄지는 절의 학교에서 글을 배우게 됩니다. 늘 사무라이에게 당하기만 하던 야스케는 오히려 사무라이를 골탕 먹이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이고요.

 

영화 속 ‘세계’의 의미


에도 말기에 외국이 들어오면서 그 이전에는 없었던 ‘세계’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신조어, 그때 핫한 단어라는 거죠. 일본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고 세계로 열리게 돼, 마음을 열게 되는 그 과정을 영화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는 소통이 된다’는 인식을 ‘세계’라는 글자와 함께 스님이 가르쳐주는 모습이 나오구요. 오키쿠는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이를 긍정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신분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벚꽃나무 숲을 세 명의 청춘이 대화를 하면서 걸어 지나가는 엔딩이 나옵니다. 처음에 화장실 앞에서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벚꽃나무 길로 이 세 사람이 행복하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면서 수미쌍관을 갖게 됩니다.


이 영화는 원래 사가모토 준지 감독의 미술 감독 ‘하라다 마소’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시작된 ‘좋은 날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라고 합니다. 환경적인 차원에서 순 환경제를 주제로 영화에 좋은 이념을 담아보자 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잖아요. 말하자면 인분이 거름이 되고 또 거기에서 새싹 이 나오고 야채를 키워 인간이 그걸 먹고 또 인분이 되고 하면서 쓰레기가 없이 모든 것이 그대로 다 100% 순환이 되는 것이 바로 순환경제죠. 이런 것에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던 시기가 바로 에도시대의 인분순환이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인분이 가장 세상에서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데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구현하여 아름다운 청춘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인 것입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금기시된 인분을 주제로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대단한 감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름꾼, 분뇨업자인 직업이 주인공이 된 소설이나 영화가 여태 있었습니까? 없었던 것 같아요. 계급의 격차도 다 허물고 인간이 정해 놓은 사회적 규약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 속 메시지가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 가슴속에 남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오키쿠와 소통하기 위해서 츄지가 손으로 땅을 치면서 자기의 진심을 전하는 모습이 굉장히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옥 같은 대사들을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더 말씀드릴게요. 오키쿠의 아버지는 사무라이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여 쫒겨난 사람이지만, 아침이면 하늘을 보며 사방에 기원의 박수를 치며 비는 사람입니다. 오키쿠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비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것도 안 빈다, 단지 두려우니 비는 것뿐, 하늘이 어디 뜻 대로 되더냐”라고 말합니다. 삶에 깊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사입니다.


또한 스님이 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키쿠가 글씨를 써서 학생들 앞에서 들고 있는 ‘세계’라는 한자에 대해 설명하죠. ‘이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가서 결국 처음으로 돌아온다’라고 말합니다. 사카모토 감독은 인터뷰에서 ‘세계’에 대해 말할 때, 나비 효과처럼 우리 세계의 한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또 다른 쪽에서 다 연결이 되는 게 바로 세계라고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한쪽에서 전쟁을 하고 있으면 우리 모두가 연결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렇게 관계되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주 천하고 낮은 직업을 가진 사람과 귀족인 사무라이의 딸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보여주지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는 과정과 함께, 즉 시대 변화와 서민들의 살아가는 삶을 인분 하나에 다 꿰어서 이야기하는 대단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장마다 소제목이 나오면서 연도와 계절이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1858년 이른 봄, 늦은 봄, 늦여름, 겨울이 소제목과 함께 제시되면서, 계절이 순환하듯이 우리 삶도 순환하고 결국 우리의 인생도 태어났다가 성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세대가 바뀌고 하는 자연의 순환 속에 있다는 세계관까지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영화에서 툭툭 던지는 것 같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담기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운 서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요즘은 폭력적인 영화가 많아서 영화관 안 간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폭력적인 영화가 천만 영화 되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지금까지 7천명 봤거든요. 폭력적인 영화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애잔하고 잔잔하면서 철학적인 삶의 통찰도 주면서도 애틋한 첫사랑의 감정을 그리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을까요? 츄지와 오키쿠가 첫사랑의 진심을 다시 우리한테 환기시켜주는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본다면 영화관 가기 싫다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줌(ZOOM) 세미나를 통해서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분들도 계시겠지만, 최근에 가장 아름다운 서정적인 영화로 오래 기억에 남을 영화라고 생각이 돼서 제가 여러분들께 추천을 드렸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내용 중에 의문이 드는 점이나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음소거 해지하시고 질문하시거나, 채팅창에 써주시기 바랍니다.



질의응답


Q1. 심영섭 회장: 이 영화의 특징은 화면 비율이 스탠다드 사이즈 아닙니까? 1.82대 1이죠. 보통 영화가 조금 크면 1.85대 1 또 레터박스 버전은 2.35대 1로 하고 있는 데요. 1.33대 1의 화면 비율을 흑백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발제자: 그 내용은 제가 아까 일본 고전 영화 감독인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 두 분을 말씀드렸잖아요. 그 감독분들 영화가 그렇게 1.37대 1, 1.33대 1로 4대 3 비율로 거의 정사각형 비슷하게 좁은 화면으로 찍는데요, 사카모토 감독이 ‘흑백을 선택한 이유는 흑백이면 더 고전적이고 그동안의 일본의 전통적인 잔잔한 가족 영화, 여성 영화들을 만드신 선배 감독들의 장면 구성법들을 한번 시도하고 싶었다’고 인터뷰에서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의 정적인 화면비율로 흑백화면까지 하면 에도시대 시대극의 정서를 최대한 보여주는 화면 비율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느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말하자면 현대에 너무 바삐 살고 디지털라이즈드된 삶, 쓰레기를 많이 만드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서 에도 시대의 정서로 가서 화면 비율까지 과거 선배님들의 화면 비율과 흑백 화면으로 우리한테 서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고 감독 본인이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가 만일에 컬러고, 와이드스크린까지 웅장하게 나가는 것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절제되고 과거 지향적인 느낌들, 우리가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면서 잃어버렸던 정서와 서정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에 그런 화면 구성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신 것으로 저는 생각이 듭니다.



Q2. 참가자 1: 아까 원제가 ‘세카이노 오키쿠인데, 이게 원어대로 직역하면 ‘세계의 오키쿠’인데요 ‘오키쿠와 세계’로 번역이 돼있거든요. 두 개가 의미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이제 영어를 보니까 이제 영어는 <오키쿠 앤 더 월드(Okiku and the World)>, ‘오키쿠와 세계’로 돼있네요. 영어 번역이 우리나라에서 했는지 일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키쿠와 세계’와 ‘세카이노 오키쿠’는 뜻이 다르거든요. 한국에서는 왜 이 제목으로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일본의 나오시마 미술관 같은 데 가서 어떤 그림을 봤을 때, 이쪽 세계, 저쪽 세계가 다르면서 땅과 하늘의 이런 차이를 얘기할 때 이렇게 세카이노라고 말을 하거든요. 그런 어떤 것인가요?


발제자 : 우리나라에서 가끔, 해외 영화 번역을 할 때, 어떤 때는 잘못된 제목도 있어요. 저 말을 왜 저렇게 번역을 해서 도저히 알 수 없고, 원어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보이는 제목도 있습니다만, 원어보다 역시 한국말에서는 또 저렇게 의역을 해줘야 좋다고 생각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제목 번역이 굉장히 중요한데, 만일에 <세계의 오키쿠>라고 제목이 되어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의미가 잘 안 들어올 것 같아요. ‘세계’라는 것도 이 영화상에서 굉장히 독특한 그 당대의 신조어잖아요. 일본 내에만 있던 모든 인식이 세계로 넓혀지는 그 시기, 즉 새로운 인식이 눈 뜨는 시기에 ‘세계 속에 있는 오키쿠’의 변화를 원래는 제목으로 한 것 같아요. 오키쿠의 세계 인식의 변화가 중요한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세계의 오키쿠>로 직역을 했다면 ‘무슨 의미야?’하고 의아해했을 것 같고, <오키쿠와 세계>라고 하면 오키쿠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둘 관계가 되는 거잖아요. 오키쿠를 중심으로 놓고 세계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라는 맥락으로 의미화가 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오키쿠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해야 오키쿠라는 여자의 이야기인가보다, 그리고 세계와 무슨 관계가 되는가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될 터인데, <세계의 오키쿠>라고 나왔다면 어쩌면 아무도 안 보러 갈 것 같아요. 지금도 1만 명도 안 봤는데요.

 

그래서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나 주인공을 더 강조해서 제목을 짓는 것 같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된 제목이 있어요. 시선집을 만드는 주인공이 황혼이혼의 아픔을 딛고 하나의 시선집을 완성해 가는 과정 속에서 치유되는 영화인데요. 영어 원제가 ‘호프 갭’(Hope Gap)이에요. ‘호프 갭’은 영국에 세븐시스터스가 있는 그 장소의 이름이거든요. 그러니까 제목을 그대로 <호프 갭>으로 하면 영국 사람들은 다 알지만 우리는 저게 희망을 말하는 건가 하면서 의문이 생길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중심으로 제목을 지은 것 같아요.


여러분들 중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영화 안 보신 분께 강추드립니다. 정말 수준 있는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리고 황혼이혼을 극복하는 가족의 이야기고 인물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하지만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 아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인데 저는 그 제목 잘 지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처럼 원어하고는 전혀 다른 제목이지만요. 저는 <세계의 오키쿠>라고 짓는 것보다 <오키쿠와 세계>가 오히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전달력 있는 제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3. 참가자 2: 아까 ‘세카이’에 대해 설명을 했잖아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향하지만 이렇게 원처럼 통하는, ‘세계 속에 오키쿠’, ‘세계로 향하는’이나 ‘속하는’ 뜻으로 일본에서 쓴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앤드(and)로 쓰니까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번역할 때 그랬지만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뜻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 영화 속에서 색깔이라는 것을 얘기할 때 이렇게 향하는 것 이렇게 원으로 통하는 것, 이런 다 속해 있는 이런 느낌으로 포함돼, 그래서 ‘세카이 노’라고 쓴 건데, 할 수 없었겠죠.


발제자: 아마 궁여지책으로 쓴 제목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번역이 더 좋게 ‘세계를 향한 오키쿠’라고 해도 더 이상하고 마땅치는 않아요.

 


Q4. 참가자 3: 근데 이 세계라는 것에서 제가 아까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화를 받아들일 때 이렇게 세계라는 언어적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영화 속에 넣은 게 있었나? 그때 일본이 세계라는 것에서 굉장히 빨리 우리나라보다 받아들였잖아요. 그러면서 이 ‘세카이’에 대해서 이렇게 영화 속에서 세계라는 걸 규정을 짓고 제목으로 쓴 거잖아요. 그게 굉장히 문화적으로 놀랍다. 그것이 조금 놀라웠어요.


사회자: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세계’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멘트였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분 궁금하신 분 있으시면 또 질문받겠습니다.



Q5. 참가자 4: 저도 오키쿠가 목을 다친 후, 즉 장애를 입은 후에 세계관이 바뀌어 가지고 자기 스스로 몸을 낮추었잖아요. 도입부에서는 분뇨업자인 야스케한테 자기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그러지만, 폐지 줍는 것도 저희가 보기에는 미천한 직업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것을 구분을 하더라고요.


발제자: 그건 구분되죠. 제일 하층민이지만 그래도 종이를 줍는 사람이 이전에 오키쿠한테 종이를 준 적이 있잖아요. 글 쓸 종이를 츄지가 비오는 그 첫 장면에서 옛날에 종이 주었다는 얘기를 나눕니다. 종이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더 좋게 본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츄지와 오키쿠는 이전에 거래 관계가 있었어요. 종이를 받았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똑같지 않은 거죠. 오키쿠와 츄지랑은 전사가 있습니다.



Q6. 한상훈 평론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님 내한 GV를 갔었습니다. 유지태 배우도 참여했죠. 발제자님도 말씀하셨지만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 때의 어떤 미학적 전통에서 다시 굉장히 정갈하고 관조적인 작품이 일본에서 오랜만에 나왔다고 봐요. 예전 거장들의 작품을 연상할 정도로 웰메이드 작품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좋게 봤습니다. 그리고 인분이라는 게 정말 입에 올리기 참 힘든 어떤 소재인데, 그것을 영화적으로 되게 유쾌하게 장면도 있고 그 안에서 지금 말씀하신 그런 철학도 담아내고, 이게 이 영화의 훌륭한 장면인 것 같아요.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이 영화가 이를테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 영화같이 좀 미니멀한 측면이 있다고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제거한 되게 순수한 영화에 가까운 미학을 지향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카우리스마키도 그렇고 지금 사카모토 준지 감독님도 그렇고 이런 영화들이 계속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이런 미학으로 승부를 본 것에 대해서 또 평론가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발제자: 참 대단한 거죠. 그래서 이 영화가 오죽하면 투자를 못 받으니까 단편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투자를 받아가지고 그 마지막 단편과 맥락을 맞춰서 다시 여러 편을 구성해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저는 그런 맥락을 모르고 봤을 때는 독특하다, 소설에서 단편 소설이 있고 연작 소설이 있는데 그런 것처럼 연작이 갖고 있는 맛이 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영화에서 이렇게 살렸을까 하고 굉장히 저는 높이 봤었는데 사정이 있었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결국 우리나라에서 만 명도 안 봤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미학적으로 가고 싶어도 사실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예술영화 독립영화의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카모토 감독은 알면서 이렇게 한 거잖아요. 이 영화는 대중성 없을 것이지만 나는 정말 이런 미니멀한 세계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하자면 너무 번잡하고 복잡하고 빠르고 기계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성적인 영화를 난 죽어도 만들어야겠다 하는 의지를 가지고 만든 것 같아요. 이런 의지가 없으면 못 만들 것 같아요. 이렇게 투자가 안 되고 관객 동원이 안 되는데, 어떻게 만들겠어요? 이렇게 좋은 영화고 이렇게 잘 만든 영화인데 사람들에게 특히 대중들에게 이렇게 어필하기 어려웠다면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영화가 분명히 많이 나와야 되죠.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의무일 수도 있어요.


영화는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하지만 대중 예술 장르잖아요. 예술이 붙었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우리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향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비전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죠. 하지만 투자받기 어렵고 대중성 없고 그러므로 영화관 잡기 어렵죠. 말하자면 대중성이 없는데 예술성이 높은 영화는 제도적으로 무슨 VOD 시장에 갔을 때 뭔가 퍼센테이지를 감독이나 제작사한테 더 많이 주는 법적 조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이런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못 만들고, 대중성이 있는 영화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좀 안타깝죠.



Q7. 한준 감독: 제 성향이 풍자나 해학이 좀 약해요. 그래서 사실 재밌게 웃는 장면들에서 많이 즐기지 못한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대사들이 많고 대사에서 보면 ‘청춘이로구나’는 대사가 있잖아요. 그 대사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되게 순간적으로 뭉클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되게 아름다운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저는 좀 더 아름다웠으면 좋았겠다. 좀 더 더 아련한 게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있었죠. 왜냐면 풍자나 해학에 좀 약하기 때문에, 좀 더 아름다운 게 좀 더 많이 할애가 됐으면 좋았겠다. 이런 아쉬움은 좀 있었어요.


발제자: 그래도 야스케가 ‘이때 웃어 웃어야지’라면서 인분 바가지를 뒤집어쓰고도 막 웃잖아요. 우리 삶이 사실은 각자 삶의 길을 가면서 진짜 인분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경우가 난 한 번도 없었다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때 웃어야지’ 하는 그런 교훈을 주는 것 아닌가 해서 저는 그런 야스케의 그런 태도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 해학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Q8. 사회자: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 보면서 주인공들의 포즈나 높이 같은 것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어요. 유난히 앉아 있는 이 땅바닥에 앉아 있는 장면이 아주 많고 심지어 츄지 같은 경우에는 강보다도 더 낮은 위치에서 서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그 낮은 계급성을 실제로 그 낮은 자세나 또 높이가 정말 낮은 걸로 표현하는 것도 흥미로웠고 마지막에 결국 츄지가 정말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벙어리처럼 침묵 속에서 사랑을 표현했더니 그것에 화답하듯이 오키쿠가 그와 똑같은 자세로 정말 땅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껴안잖아요. 이 장면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꼈고 감독이 전하려고하는, 즉 인분이든 뭐든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더럽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해석이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세상에 평등하지 않은 것은 없고 우리가 눈을 낮춰서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발제자: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본 화면 비율이나 일본 고전주의 촬영 기법 중에서 ‘다다미 쇼트’라고 하잖아요. 다다미 바닥에 카메라를 놓고 찍는, 그 높이 이상을 안 찍고 다 낮게 피사체를 잡는 그런 신들도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라는 주제하고 잘 맞는 촬영 기법으로 활용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Q9. 정병기 영화평론가: 확실히 발표하시는 걸 들으니까 많은 생각이 스쳐가고 정리가 되는 것도 있고요. 아까 잠깐 말씀하셨지만 진짜 이 영화를 컬러로 찍었으면 저도 못 봤을 것 같아요. 이렇게 시각적 이미지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아까 참가자 1 선생님이 제목 얘기를 하셔가지고 저도 그 생각을 좀 많이 했었거든요. 이 제목이 왜 이렇게 됐을까 듣고 보니까 한국 제목이 맞는 것 같긴 해요. 근데 원래 영어 제목도 요즘은 감독이 정해서 내놓지 않나요? 영어 제목을 우리가 그대로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는데요, 재밌는 것은 4장의 제목도 ‘세계의 오키쿠’고, 마지막 5장의 제목이 ‘오키쿠의 세계’에요. 그리고 바뀌는 것을 흥미있게 본 것이 오키쿠의 아버지는 ‘세계’를 설명할 때 ‘하늘처럼 끝이 없는 것’이라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그 승려가 얘기할 때는 한쪽으로 가면 다른 쪽으로 돌아온다고 얘기했죠. 영어로 세계가 말하자면 월드의 번역어인데요, 월드는 특정한 지역이나 시대의 세상을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신세계니 동양세계라고 하면서 에도 시대가 지나가고 포스트 에도 시대가 되면서 일본이라는 세계 바깥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래서 끝이 없다고 아버지는 그 정도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 승려는 월드를 넘어서서 지구가 둥그니까 여기 돌아온다는 것, 불교적 사고도 있겠지만 월드를 넘어서 글로벌로 사유가 넘어간 것 같아요. 글로브, ‘지구’라는 의미의 글로브로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게 의식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황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계절의 순환이라든가 또는 비와 눈이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전에는 천하라고 그랬잖아요. 세계를 천하로 보면 천하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는 인간 세계인데, 그 삶의 경계가 없어지는, 그러면서 천하, 즉 하늘과 땅이 일치되는 그런 의미의 또 비와 눈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의 순환 계절의 순환 그다음에 인분과 채소 그다음에 인간 이러한 생명의 어떤 순환, 그 다음에 지구가 둥근 이런 세계 전체의 순환까지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닌 가라는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그리고 질문인데요. 인분을 설정한 것은 가장 천한 직업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는데, 굳이 왜 언어장애일까. 다른 신체장애로도 가능하거든요. 시력을 잃어버린다거나 신체의 일부를 쓸 수 없다든지 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언어장애로 했을까, 그건 아직 제가 잘 해석을 못하겠네요.


발제자: 언어가 인식의 세계 인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면서 시작이면서 끝이잖아요. 그래서 ‘세계’라는 제목하고 오키쿠가 언어를 잃은 것은 단순히 장애가 아니라 언어를 잃으면서 새로운 진정한 세계를 깨닫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갔다고 돼야 되기 때문에 언어장애를 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눈이 멀 수도 있죠. 귀가 안 들릴 수도 있고 코를 벨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그 상황에서 상처를 입어서 장애를 입을 수는 있는데, 우리가 타인과 한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고 국가가 다른 국가와 소통하고 이런 것들이 다 언어라는 글과 말을 통해서 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이 언어를 잃었을 때 어떤 세계가 열리는가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나 저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언어를 가지고 사람이 자기 세계를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언어 장애가 있게 되면 자기를 표현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잖아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나중에 서로 다른, 말하자면 신분의 차이도 있는 세계를 허물고 몸으로 이렇게 낮 추면서 서로 마음을 여는 건데, 거기엔 언어가 필요 없어서 감독은 우리가 표현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언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Q10. 참가자5: 저는 이 영화에서 주먹밥마저도 낮은 계급에서는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사는구나 수레바퀴에 깔린 밥을 먹는 장면에서 결국 생명은 위대한 것으로서 그걸 먹는 이런 장면이 짧게 나왔지만 굉장히 인상에 남았어요. 주먹밥마저도 수레에 깔려서 종이에 붙은 걸 먹는 이런 장면에서 굉장히 디테일이 좋은 것을 느꼈어요.


발제자: 근데 그 주먹밥은 생명이 아니라 오키쿠의 사랑이죠. 오키쿠의 사랑인 주먹밥은 눌린 주먹밥이지만 오키쿠의 사랑을 츄지는 버릴 수 없죠. 그걸 먹는 장면은 저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마무리 및 5월 월요 세미나 소개


사회자: 좋은 발제와 토론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음 세미나는 이탈리아의 여류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키메라>(2024)입니다. <행복한 라짜로>로 호평을 받았던 감독의 신작입니다. 아주 따끈한 영화고요. 아직은 VOD로 풀리질 않아서 아마 보기가 힘드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봉관도 적고요. 하지만 곧 VOD로 풀릴 것 같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길요. 책임감이 넘치는 이 도굴꾼이 한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를 찾아나서는 그런 영화라고 해요. 진행자가 아주 유명하신 김성욱 영화평론가십니다. 서울 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시고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영화 정말 많이 보신 분 중에 한 분이 김성욱 영화평론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또 어떻게 진행을 하실지 대단히 궁금하고요. <오키쿠와 세계>를 정말 풍부하게 이해하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또 다음 달에 5월 달에 김성욱 영화평론가의 세미나 도 많은 기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발제자 황영미

(현)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전)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숙명여대 교양교육연구소 소장, 대학교양교육연구소협의회 회장, 제26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제9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했으며, 칸, 베를린,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국제영화비평가상 심사위원과 국고지원 국제영화제 평가위원(문화체육 관광부)으로 활동했다. 저서 『필름 리터러시』, 『영화와 글쓰기』, 『다원화시대의 영화읽기』, 공저 『봉준호를 읽다』, 『영화로 읽기, 영화로 쓰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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