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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 <행복의 나라>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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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 <행복의 나라>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이미 벌어진 역사를 다루는 일, 그것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누구도 상기하고 싶지 않은 암울한 결말을 지니고 있는 역사의 한 장면을 그리는 일은 무척이나 암담한 일이다. 한국의 절망적이었던 근현대사를 다루는 일은 그래서 이제까지 드문드문 이어져 왔는지 모른다. 멀리는 2005년 10.26 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이 있었고, 가까이는 2020년 <남산의 부장들>이 있었는데, 두 영화는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곧 일어나는 12.12 군사 반란을 다루지는 않았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해 암시가 될 뿐이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신군부 세력의 만행과 민주화 운동을 그리는 영화들, <택시운전사>나 <1987> 등이 있었고, 이 영화들이 어두운 시대에도 민중들의 희망을 담을 수 있었다면, 12.12 군사 반란 자체를 다룬다는 것은 누구도 스크린에서 보고 싶지 않은 성공에 취한 얼굴을 절망적으로 지켜보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연달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다. 2023년 11월 <서울의 봄>이 개봉했고, 2024년 8월 <행복의 나라>가 개봉했다. 두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촬영되었지만, 여러 영화 외적인 상황들로 인해 개봉 시기와 결과가 달라졌다. 연대기 순으로 보자면,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 반란까지를 다룬 <행복의 나라>가 먼저고, 12.12 군사 반란 당일을 조명한 <서울의 봄>이 더 뒤일 것이다. 또, <서울의 봄>이 12.12 군사 반란의 당사자들과 그들을 막아보려 했던 군인들을 그리면서 군부 내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했다면, <행복의 나라>는 10.26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박흥주 대령을 변호하게 된 태윤기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건에 휘말려 있기는 하지만 권력의 주변부에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인물을 통해 민중들의 감정을 다루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러니까 <서울의 봄>이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결정적인 한순간을 그리면서 절망감을 긴박함으로 뒤바꾸려고 시도했다면, <행복의 나라>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악인의 등장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절망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법에도 기댈 수 없고, 힘없이 스러져가며 ‘사람은 죽이지 마’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시대의 절망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후 7년 동안 계속될 독재와 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행복의 나라>의 이러한 선명한 절망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지 않던 변호인 정인후(조정석)가 박태주(이선균) 대령을 만나 재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대령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과정이 그려지지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상두(유재명)와 만나고 상명하복이라는 군대 문화에 대한 화두도 던져지지만, 모든 것들은 실제 역사의 선명한 절망감에 뒤덮여버린다. 그래서 문제는 정인후와 같은 인물들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물들이 있었다고 한들 역사가 결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오직 그것만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전상두가 반란에 성공한 뒤 의기양양하게 정인후를 내려다보는 골프장 장면, 전상두는 정인후를 내려다봄으로써 관객들 모두 위에 서서 악마처럼 으스대고 정인후와 함께 우리는 무릎을 꿇고서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 그 장면은, 그것이 개연성이 없는 허구라서 문제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절망감만을 새기고, 희망을 앗아가기 때문에 문제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롭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돈이 좋고 권력이 좋아도 출세하자고 사람을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그 단순하지만 취약한 정의를 지키고 있더라도, 언제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절망감 말이다.
바로 이 점이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역사를 다루는 일의 암담함일 것이다. 영화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결말을 바꿀 수도 없고, 역사를 옹호할 수도 없을 때, 더구나 자그마한 희망의 싹이라도, 그것이 말라비틀어진 거짓일지라도 심어놓을 수 없을 때, 영화는 그 원동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영화가 반드시 희망찬 결말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희망차게 끝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이 유의미해지려면, 그러니까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강직한 박태주의 상명하복과 전상두와 그 반란군들의 상명하복에 대한 질문이 유의미해지려면, 적어도 우리 시대를 돌아보며 정의가 무엇인지 되새길 수 있는 힘은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행복의 나라>에서 외쳐지는 ‘사람은 죽이지 마’는 누가 듣는 것일까? 영화 내적으로 전상두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박태주만을 가리키며 정인후가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더 큰 학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 전두환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가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관객들은 이미 정인후와 함께 무력감 속에 있다. 불분명한 정의의 외침은 그래서 힘을 잃는다. <서울의 봄> 역시도 전두광(황정민)을 막는 것은 실패하지만, 누군가 절박하게 막으려고 했고,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고, 이태신(정우성)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전두광이 하려고 했던 것이 내란임을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감과 위안을 남긴다. <행복의 나라>가 실패한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허공에 외쳐지는 물음이 가닿을 곳이 없다는 바로 그 절망감에서 멈춰 섰다는 것 말이다.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완전히 결말을 뒤바꿀 수도, 있는 그대로 옹호할 수도 없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상태로 멈춰 버려서도 안 되기 때문에 더 치열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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