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6월 피프레시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추락의 해부>에 관하여2024-09-03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컷 이미지



[6월 피프레시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 - <추락의 해부>에 관하여


6월 24일 노철환 영화평론가 발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를 통해 월요 시네마를 진행하고 있다. 첫 월요시네마는 지난 3월 25일 심영섭 피프레시 한국지부 회장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 >로 문을 열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되어 올해 심영섭 평론가가 2년 임기의 13대 회장에 취임했다.



심영섭: <추락의 해부>는 프랑스 영화인데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요. 2023년에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비영어권 작품상 2개 부분을 트로피를 수상했고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에서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카이에 뒤 시네마, 버라이어티, 더 가디언, 인디와이어, 배너티 페어, 사이트 앤 사운드 등 14개 매체로부터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혔던 <추락의 해부>를 인하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노철환 교수님과 함께 월요시네마 피프레시 코리아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자기반영성: 작품과 삶의 은밀한 관계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Anatomie d’un chute)>(2023)는 남편의 추락사로 인해 아내가 용의자로 기소되었고, 재판정에 올라 죽음을 둘러싼 부부의 과거를 헤집는 법정물입니다. 보통 장르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리쾨르(Paul Ricœur)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전(前)지각(pré-perception, paraesensio)-기대’로 이루어지는 상관관계 위에 형성됩니다. 법정물에 대한 기억 그리고 지각을 바탕으로 관객은 공정한 재판정에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이런 기대를 흥미롭게 배신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추락의 해부>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골든 글로브에서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을, 오스카에서 각본상, 무엇보다 피프레시상을 수상했습니다. <기생충>처럼 작품성과 각본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명성만큼이나 이미 많은 평론가와 매체에서 다룬 바 있는 작품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전 1:9)라는 성경 말씀을 위로 삼아, 조금은 신선한 <추락의 해부>를 둘러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978년 생 쥐스틴 트리에는 현대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입니다. 트리에는 파리 보자르를 졸업했지만 화가가 아닌 감독의 길을 택합니다. 2007년 첫 단편 다큐멘터리 연출 이후, <에이지 오브 패닉(La Bataille de Solférino)>(2013), <빅토리아>(2016), <시빌>(2019), <추락의 해부>(2023) 등 네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트리에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이념, 여성, 일과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트리에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자기반영성(auto-réflexivité)이 두드러진 작품 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마크롱 정권의 연금 개혁과 문화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트리에의 2023년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화와 현실 양측면에서 적극적인 발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만들고, 감독하고, 여성이 판단하는 영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On a besoin de récits faits par des femmes, réalisés par des femmes, jugés par des femmes. On est encore très loin de la parité)” 트리에는 페미니즘 사회 혁명으로서 영화가 기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On a besoin de récit faits par des femmes(우리는 여성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던 본인의 말처럼, 트리에는 항상 전문직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일하는 여성이자 아내이고 엄마인 트리에의 삶이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트리에의 작품 속 여성들이 겪는 문제의 근원은 항상 가정입니다. <에이지 오브 패닉>, <빅토리아>, <시빌>, <추락의 해부>까지 기자, 변호사, 정신과의사, 작가 등 전문분야에서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은 육아와 일의 병행, 협력보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커플 문제로 고생합니다. 그녀의 영화들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고, 어머니의 존재감도 흐릿합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부재와 함께 자란 배다른 형제, 어머니의 가족 부양이라는 환경 속에서 트리에가 남녀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남자들은 여주인공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트리에의 여주인공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야망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제 삶을 정리하고 있다(Je m’organise pour ne pas sacrifier mes ambitions)”고 말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트리에 자신도 유사한 문제를 항상 고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풀어 놓고 있다’는 식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트리에의 삶과 영화에 따뜻한 한 스푼을 더해주는 ‘동반자(compagnon)’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작가이자 배우인 아르튀르 아라리(Arthur Harari입니)다. <시빌>과 <추락의 해부>를 공동 집필한 아라리는 트리에 보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습니다(<추락의 해부>에서 사뮈엘이 비슷한 불평을 하는데, 이 시나리오를 아리라와 같이 썼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아라리는 트리에의 모든 장편영화에 출연했는데, 특히 <에이지 오브 패닉>에서 취재와 육아, 그리고 전 남편의 사생활 폭로 속에서 괴로워하는 여주인공을 돕는 남자친구, <시빌>에서도 정신과의사인 주인공을 상담해주는 동료 Dr. 카츠로 등장합니다. 


자기 성취와 가사/육아의 분담을 놓고 발생하는 커플 간 분란, 그리고 죽음이라는 극단적 결말, 곁을 지켜주는 조력자까지 이전 작품들을 관통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작품, <추락의 해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름의 해부1: 제목의 비밀


라는 제목은 자연스럽게 오토 플레밍거의 <살인의 해부(Anatomy of a Murder)>(1959)를 연상케 합니다. 부부 관계와 불륜, 살인에 대한 변호를 다룬 법정물이라는 점, 특히 제목의 유사성에 대해서 감독 역시 인정한 바 있습니다. 


Anatomie(여성명사)는 해부(학)이 대표적인 뜻이지만, 해부학적 구조, (심미적 시점에서) 육체, 나체를 뜻하기도 하며, 면밀한 분석 즉 analyser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불어로 Chute는 추락, 낙하이지만, 나폴레옹의 실각(chute de Napoléon), 아담의 타락(chute d’Adam)처럼, 실각, 타락, 몰락, 붕괴, 실패, 종결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추락의 해부’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표면적으로 남편인 사뮈엘이 추락사했고, 그 진실을 파헤치는 법정물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한(une)’ 남자 또는 한 부부의 몰락과 실패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트리에가 제작사인 르 팍트(Le Pacte)와 인터뷰에서 영화 초반 사뮈엘의 추락사(la chute mortelle)를 한 커플의 붕괴(la chute d’un couple)에 비유하면서 오랫동안 관계의 실패(la défaite d’une relation)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남편 사뮈엘의 추락(chute)사가 유발한 유명 작가 산드라의 몰락”. 


타이틀 이야기를 한 김에 잠깐 포스터를 보고 가겠습니다. 추락사한 사뮈엘과 아들 다니엘을 위로하면서 경찰에 신고 전화를 하는 산드라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뮈엘의 자세는 <살인의 해부> 포스터와 유사합니다. 하얀 눈 밭 위 시체의 핏빛과 차가운 푸른 빛 텍스트가 대조를 이룹니다. <살인의 해부> 포스터를 주도하는 색은 파랑, 하양, 빨강입니다. 프랑스의 국기 색깔이죠. liberté(자유), égalité(평등), fraternité(동지애)를 의미하는 이 색깔에서 아마도 사뮈엘은 자유를 꿈꿨는지도 모릅니다. 추락이라는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한국 포스터 역시 충분히 멋집니다.



이름의 해부2: 예정된 결말


<추락의 해부>의 등장인물 이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주인공 산드라(Sandra)라는 이름은 알렉산드라(Alexandra)와 카산드라(Cassandra)에서 기인했습니다. 알렉산더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드라는 ‘밀어붙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alexein과 ‘남자’ 또는 ‘투사’라는 의미의 andros가 결합한 이름입니다. 또 카산드라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트로이의 마지막 공주 이름입니다.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받았지만, 구애를 거부했다가 설득력을 잃은 예언 밖에 할 수 없게 된 인물입니다. 산드라는 적을 물리치는 투사이지만,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비운의 인물이죠.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해 산드라와 이상야릇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젊은 여성 문학도의 이름은 조에(Zoé)입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이름이죠. 혹시 코타바(Kotava)라는 언어를 들어보셨나요? 스테이런 펫시(Staren Fetcey)가 문화적 중립성을 강조하며 1978년 개발한 국제 보조어인데요. 이 코타바어로 조에는 ‘유혹하다’, ‘유인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입니다. 좀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는 해석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코타바어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이들 대부분이 불어권 인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여깁니다.


산드라를 돕는 변호사 뱅상의 이름은 보다 극적입니다. ‘빈센트’의 프랑스식 발음인 뱅상은 라틴어에서 온 남자 이름입니다. 로마 세례명 Vincentius는 ‘이겨내다, 승리하다’를 의미하는 vincere의 파생형인 vincens, vincentis에서 온 것입니다. 다른 파생이름으로 ‘빅토르(Vitor)’가 있는 데, 이 이름들은 기독교가 로마에 자리 잡은 2세기 경 ‘악에 대한 승리’, ‘죽음에 대한 승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상당히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뱅상이 변호를 맡은 산드라의 재판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겁니다.


한때는 워너원의 멤버로, 현재는 뉴진스의 멤버로 잘 알려진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왕의 꿈을 해석해 높은 자리까지 오른 성경의 예언자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단은 심판(자),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죠. 아들 다니엘이 사건의 종지부를 짓는 증언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뮈엘은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시라”를 의미합니다. “신께서 들으셨다”라는 형태로 이스마엘(Ismael)과 연결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뮈엘은 머리에 기름을 부어줌으로써 사울을 유대의 첫 번째 왕으로 인정한 선지자입니다. 위대한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타락함으로 인해 사뮈엘은 잘못된 선택을 한 인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사뮈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messiah)라고 하는 데,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처럼 외세로부터 유대민족을 지켜줄 구원자 또는 해방자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한편 메시아를 프랑스어로 Messie라고 쓰고 메씨라고 읽습니다. 유명한 축구선수 바로 리오넬 메시(Lionel Messi)와 같은 발음인데요. <추락의 해부> 말미에 보면 이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로 분장한 강아지의 본명입니다. 나중 스눕의 역할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드릴 예정입니다만, 영어로 ‘염탐꾼’, ‘기웃거리다’를 의미하는 이름을 그냥 붙였을 리는 없겠습니다. 여담으로 쥐스틴 트리에가 얼마나 이름짓기에 진심인지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트리에는 올해 3월초 자신의 제작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름은 JT Films입니다. 



오프닝 시퀀스: 모든 것의 설계도


트리에는 오프닝 시퀀스에 영화 전반을 이끌어나가는 거의 모든 복선들을 깔아두었습니다. 문학 전공 여학생 조에와 산드라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중 산드라와 사뮈엘의 다툼 이유이자 법정 논쟁의 핵심인 작품 창작 방식, 작품과 실제의 연관성 언급이 나옵니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왜 산드라가 조에에게 웃음을 지으며 사생활 질문으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는 것도 이 인터뷰를 ‘녹음’한 음성 파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남편 사뮈엘이 산장을 수리하고 있다는 것도, 말을 않고 크게 음악을 튼다는 것도 이곳에 다 있습니다. 대화를 방해하는 커다란 음악 소리에 눈치를 주거나 소리치며 반박하지 않고 인터뷰를 파하는 산드라의 행동 역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강아지 스눕의 등장입니다. 스눕은 영화 맨 처음 등장하는 캐릭텁니다. 첫 번째 시퀀스는 강아지 스눕에서 시작해 스눕으로 끝납니다. 산드라와 조에의 대화 소리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다락방 계단에서 통통 떨어지는 공입니다. 이어 강아지 스눕이 나타나 공을 잽싸게 뭅니다. 그리곤 잠시 대화하는 (프레임 바깥에 위치한) 둘 쪽을 응시하고선 “스눕 이리와”라는 산드라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은 사뮈엘이 작업하는 공간입니다. 스눕은 아들 다니엘이 아닌 아빠 사뮈엘의 공간에서 나타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이어 다니엘이 스눕을 씻기고 나자 음악이 큰 소리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인터뷰는 중단되고, 다니엘은 스눕을 데리고 산책을 나섭니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스눕이 갑자기 뛰어갑니다. 아빠 사뮈엘의 죽음을 직감한 다니엘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릅니다. 달려 나온 산드라는 경찰에 전화를 겁니다. 바로 포스터로 활용된 그 장면입니다. 큰 음악소리와 흐느끼며 사정을 설명하는 산드라, 울고 있는 다니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카메라는 바닥에 엎드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스눕에게 천천히 다갑니다. 이어 경찰들이 도착해 있는 상황입니다. 카메라는 스눕의 뒤를 따라갑니다. 경찰에게 진술하고 있는 산드라 근처로 간 스눕에 카메라가 접근합니다. 이내 (마치 스눕의 시점숏처럼) 책장에 있는 사뮈엘 사진으로 줌인 합니다. 사진이 프레임 전체를 채울 만큼 다가간 후, 한참을 머무르더니 환한 조명이 보입니다. 방금 전 사진으로 본, 사뮈엘이 해부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살아 있던 순간을 기록하던 사진은 죽음에 도달한 사뮈엘의 촬영 장면으로 붙어 있습니다. 사뮈엘, 산드라, 다니엘을 거쳐 그리고 다시 사뮈엘에게로 돌아간 스눕의 ‘염탐’을 끝으로 이제 본격적인 사뮈엘의 죽음에 대한 해부가 시작됩니다. 



다니엘이 본 것: 꿰어 맞춘 이야기


1년 후 시작된 재판, 말이 없는 사뮈엘의 추락사에 관한 진실 여부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습니다. 검찰은 산드라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취지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다니엘은 증인입니다. 불어로 témoin(증인)의 동사형은 témoigner인데, ‘증언하다’는 뜻 외에, ‘표시하다, 나타내다, 보여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말을 하는 것(證言)에 그치지만, 불어로는 증명하고자 하는 말에 보여준다는 시각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보이지 않지만 마치 상대를 보는 것처럼 항상 말하는 상대에 눈을 맞춥니다. 실은 다니엘은 볼 수 있습니다. 검찰이 산드라의 살인 취지로 범죄 상황을 설명하는 순간과 변호인 측에서 이를 반박하는 순간들을 트리에는 마치 다니엘이 이 장면을 상상하는 것처럼 편집해두었습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닌 다니엘이 마음으로 보는 이미지입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보고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불어 이스투아(histoire)는 영어의 히스토리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조사(調査), 조사로 알아낸 지식, 지혜, 증언, 재판관, 탐구 등을 아우르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스투아는 ‘역사’라는 뜻만큼이나 ‘이야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더불어 문제나 사건, 학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독어의 게쉬히트(geschichte)처럼 여러 유럽어에서는 여전히 이야기, 역사, 사건, 학문을 아우르는 단어가 존재합니다. 즉 사건-역사-이야기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지나온 사건들의 축적이 역사(histoire)라면, 역사는 이야기(histoire)로 재구성됩니다. 이야기 역시 사건들로 이루어지며, 사건들의 배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미토스 즉 플롯입니다. 플롯은 현재와 과거의 밀접한 인과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나중 다니엘은 엄마의 법정 증언을 통해 아빠가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스눕이 아파했던 증상의 원인과 스눕을 치료하러 오가는 병원에서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의 의미를 인과관계로 엮어 냅니다. 모든 존재는 기억과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가 말한 것처럼 ‘과거에-의해-영향받는-존재(l’être-affecté-par-le-passé)’입니다. 나아가 이 존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를 향한 기대를 연결해 자신만의 이스투아, 즉 이야기(story)를 만들어냅니다. <추락의 해부>는 법정이 진실을 밝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판사가 합리적인 판결을 내리기 위해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편이 승리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사망 원인은 중요하지 않고 작가가 남편을 죽였다는 그 설정 자체가 어느 교수의 자살보단 훨씬 더 흥미롭구요”라고 영화 속 TV 방송에서, 실제 트리에인 동반자인 아라리가 출연자로 분해 한 말처럼, 재판은 점점 산드라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산드라를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사뮈엘의 죽음 전날 발생했던 부부간 다툼입니다. 재판정에서 사뮈엘이 녹음한 음성파일이 공개됩니다. 사뮈엘은 산드라가 불륜과 표절을 저질렀고,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고 비난합니다. 산드라는 글쓰기를 포기한 자의 피해망상이라며 논리적으로 반박합니다. 말싸움은 감정적으로 흘러가고 폭력적인 소리로 끝나는 녹음 파일. 이어 검사는 공격합니다. 모친 죽음, 부친과 불화, 아들의 사고, 부부 갈등까지 산드라의 작품들은 모두 삶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해명하고 반박해도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산드라의 말은 거짓 취급당합니다. 충격적인 부모의 다툼을 들은 다니엘은 마지막 증언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최후 증언: 상상의 힘

 

이제 다니엘의 마지막 법정 증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증언대에 선 다니엘은 스눕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눕이 아팠던 날 병원에 다녀오며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헤어질 때가 언젠가 온다는 것. 강아지가 죽는 것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울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아버지 자신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이 상상 장면의 매력은 듣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인 사뮈엘의 얼굴과 대사가 다니엘의 목소리와 결합되는 순간, 부자는 마치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이 최후 증언을 할 때, 이를 듣는 산드라가 오랜만에 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옵니다. 상상으로는 부자가, 현실에서는 모자가 함께 있게 된 셈입니다. 다니엘은 붉은 색 상의에 청바지를, 산드라는 흰색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를 인정하고,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진 다니엘이 자유롭고 평등한 부부 관계를 지향했던 엄마 산드라를 다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이제껏 보아온 인물의 맥락과 동일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법정에서 결과적으로 다니엘의 증언은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다니엘의 감각에 대한 기억은 ‘산드라=무죄’라는 결정을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사실인 것 같아야 하는 개연성의 규칙(rule of possibility)에 관해 <추락의 해부>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간직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퀀스: 모든 것의 결말


<추락의 해부>는 큰 의미에서 액자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바라본 ‘염탐꾼’ 스눕의 시점에서 말이죠. 스눕은 살아 있는 사뮈엘과 함께 있었고, 산드라와 조에가 인터뷰를 하는 분위기도 보았고, 사뮈엘이 세상을 떠난 것도 가장 먼저 목격했습니다. 과거 자살을 기도한 사뮈엘과 똑같이 아스피린을 먹기도 했습니다. 사뮈엘 추락사의 해부 개시 장면에서도 마지막 산드라가 무죄 판결을 받은 것도 항상 스눕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기억 속에서 스눕은 세상을 떠난 사뮈엘과 동일시됩니다. 스스로 고립되어가던 사뮈엘은 이제 없지만, 스눕은 산드라와 다니엘 곁에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의 증언 이후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변호인들과 축하 만찬을 한 후 산드라는 집에 돌아옵니다. 자는 척 하던 다니엘이 몸을 일으킵니다. 그를 바라보던 산드라가 몸을 낮춥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앞서 어색한 둘의 관계처럼 원 숏으로 각각을 보여줍니다. 이내 산드라가 다니엘 품에 안기고 다니엘은 독특한 행동을 합니다. 마치 강아지처럼 산드라의 머리 냄새를 맡습니다. 그렇습니다. 잠깐이지만 비슷한 장면이 첫 번째 시퀀스에 있었습니다. 산드라가 조에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 욕실에서 스눕을 씻기던 다니엘의 행동입니다. 


이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법정의 유무죄 판결이 아닌 후각과 촉각을 통해 아들와 엄마는 관계를 회복합니다. 영화는 다니엘을 재우고 1층에 내려와 누운 산드라가 곁에 엎드린 스눕을 안는 것으로 끝납니다. 앞서 사뮈엘과 등치된 멋진 강아지이자 염탐꾼 스눕이 엄마와 아들과 연결되며 한 부부의 파국에 관한 해부는 조심스레 봉합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다루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약속된 기호 체계에 해당하는 언어와 관련된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시간 여건상 다루지 못했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쇼팽, 알베니즈 그리고 50센트의 음악도 넘어갔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을 아무리 꼼꼼히 ‘해부’한다고 할지라도, 쥐스틴 트리에가 표현하고자 했던 진의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추락의 해부>를 보며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이 느낌이 진실이라고 선택하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결국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1. 심영섭: 간단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산드라는 남편을 죽였습니까?


발제자: 전, 산드라의 성품상 살인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집 안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크게 튼다면, 저 같으면 방문을 열고 좀 조용히 해달라고 말을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산드라는 “우리 다음에 하자”고 조에를 보내거든요. ‘정말 잘 참는구나’란 생각을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미 했답니다. 



Q2. 영화 초반부에 아들 다니엘이 엄마 아빠의 싸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부에 관해 진술을 번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니엘에게 부부싸움의 소리를 들었는지 여부는 상당히 중요해서, 실은 재판 과정에서 다투는 부부 관계에 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도 여겨지는데요. 


발제자: 소리를 들었는지 여부만큼이나, 들었다 또는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췄을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기억에 왜곡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 법정에서 재생되는 부부 싸움 소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의 의견 다툼에 이어 때리고 깨지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한 검사 측과 산드라의 해명이 크게 엇갈립니다. 녹음된 소리는 팩트지만 그 소리의 의미는 마치 흐릿한 기억처럼 진실과 다를 수 있는 거죠.



Q3. 이 여자가 이방인이잖아요. 중립 지역인 런던에서는 행복했었는데 프랑스에 와가지고는 그 고립된 곳에서도 산드라가 너무 당당한 거에 사실은 조금 놀랐습니다. 저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굉장히 여성의 입장에서 패배한 남편이 아내에게 복수를 한 것처럼 연출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자를 몰락시키려 했는데 결국은 몰락하지 않지 않았다는 점이 영화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발제자: 남편의 복수라고 생각하면 실은 자살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에서는 저 역시 동의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산드라는 대단히 자존심 상황을 경험합니다. 독일어는커녕 영어를 쓰는 것도 지적 받으면서 불어로 말하기만 강요당하면서 자신이 독일인임을 어느 곳에서도 드러낼 수 없잖아요. 멀리 샤를르마뉴 대제의 죽음 이후 분열된 왕국부터 2차 세계대전의 나치 점령기까지 프랑스는 독일과 적잖이 껄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만이 아니라, 산드라를 대하는 모든 프랑스인들의 태도를 통해 감독은 이성적으로 친한 척 하고는 있지만 의식의 기저 깔린 독일에 대한 패배의식을 비꼬고 있는 듯합니다. 



Q4. 저는 영화 초반 거짓말도 나중 강아지 스눕에게 약을 먹인 것도 엄마를 위해 아들 다니엘이 만든 알리바이라고 생각해요. 다니엘은 엄마가 아빠를 죽인 것을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 냄새를 맡은 것으로 보신 그 장면에서 엄마가 다니엘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중요한 거는 다니엘이 알리바이를 만들어줘서 엄마를 구했다는 거죠.


발제자: 지적해주신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동의합니다. 다만, 제가 이번 발제에 있어 방향을 정해야 했기 때문에 다니엘 보다는 강아지 스눕에 집중했던 겁니다. 수눕이 모든 것을 알았고, 이야기를 열고 닫았고, 모든 가족 사이를 오가며 연결해준다고 몰아가다보니 다니엘을 제쳐놓은 측면이 있습니다. 다니엘을 중심으로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면, 정반대의 결과를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살인의 해부>에서 유일하게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단 하나의 인물이 다니엘이거든요.



Q5. 저는 다니엘을 시각장애인으로 설정한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재판정에서 부부 싸움 녹음이 재생될 때, 오히려 청각만 가능한 다니엘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지는 장면이 있잖아요. 어찌 보면 각자의 정보나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지각이 다른 것처럼, 완전한 감각을 갖지 못한 다니엘을 통해 진실을 안다는 것의 불완전성을 얘기하려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발제자:다니엘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설정이 이 영화에선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부의 갈등, 경제 문제도, 프랑스로 이주도 모두 다니엘이 다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부모의 싸움 녹음을 들으면서 마치 다니엘이 보는 것처럼 교차편집해 둔 장면은 ‘시각장애인은 다른 형태로 본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감독은 그런 면에서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초반 다니엘이 진술을 번복하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라 의외로 잘 듣지 못했을 수도 있는 거죠. 



Q6. 다니엘을 시각장애인으로 한 설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 극에서도 테이레시아스라는 눈이 보이지 않는 예언자만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보는 자는 다니엘이었다’는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발제자: 영화에는 다니엘이 정말 보이지 않는 걸까? 싶은 장면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법정에 서기 직전 다니엘은 옛 사진을 열어보고, 엄마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TV를 보고, 다락에 혼자 올라가 아빠가 떨어진 장소를 내려다보거든요. 모두 시각하고 연결되는 행동을 합니다. 신탁대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시력을 잃게 되잖아요. ‘모든 것을 알게 된 자는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라고 정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7. 보통 법정 드라마라면 산드라가 당연히 범인으로 확정이 되는 식으로 끝났을 텐데요, 다니엘의 증언을 포함시켜 결과적으로 범인이 아닌 걸로 그러니까 기존의 법정 드라마를 전복시켜서 페미니즘적 텍스트로 완성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동시에 소통의 문제를 남녀 간의 관계로 풀어낸 것 같기도 합니다.


발제자: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당당한 페미니스트의 태도를 늘 보였기 때문에 ‘여성은 무죄’라는 생각을 깔아 놓았다고 봅니다. 동시에 알렉산더와 산드라의 이름을 연결해 제가 설명했던 것처럼 ‘페미니스트는 투쟁가고 전투가야!’라는 편견에 대해, 아들을 위해 요리하고 눈물 흘리고 안기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산드라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트리에 감독이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적해 주신 소통 문제에 대해서, 저는 이 지점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은 지점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농담 같은 건데요.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심사위원 정도 되는 분들이라면 너만 일하냐 너만 자기 성취하냐 너만 성공하냐라고 하면서 가사와 육아를 둘러싼 부부간 고민을 경험했을 거라 봅니다. 아마 여기 계신 선생님들도 그럴 테죠. 그런 측면에서 산드라와 사뮈엘의 싸움을 보고 들으며, 심사위원들은 통쾌함을 느꼈을 거라고 상상해봅니다. 우리가 부부나 가족, 연인 등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일에 대한 책임 여부를 놓고 소통하려다가 싸우고 또 실패하잖아요.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한번쯤 겪어 본 사랑하는 이와 소통의 실패를 극단적인 형태로 다룸으로써 안도감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Q8 사회자: 마지막으로 혹시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발제자:  오늘 실은 시간 관계상 말씀드리지 않은 것들 중에 하나가 잠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사뮈엘 사진을 보여드렸잖아요? 사뮈엘이 추락사했고, 초동조치를 하러 온 경찰이 산드라와 이야기 나누고 있을 때 집 안으로 들어온 스눕이 바라보던 책장 위 사진입니다.  실은 이 사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재판정에서 부부싸움 녹음이 재생될 때, 마지막으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산드라의 설명에 따르면 사뮈엘이 액자를 잡아 깨려는 걸 막으려다 실패했다고 하죠. 사진을 액자 없이 책장에 둔다는 게 좀 어색했지 않나요? 그러니까 실은 이 액자가 부부싸움 당시 깨진 거라고 상상해보는 거죠. 사뮈엘은 젊고 웃고 있던 자신의 과거를 파괴한 거고, 산드라는 이를 저지하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이 사진이 담고 있는 진실은 강아지 스눕은 알고 있는 겁니다. 해서 사진을 응시하고 이어 사뮈엘의 부검 장면이 나옵니다. 하여튼 오늘 제 이야기의 주인공은 ‘염탐꾼’ 강아지 스눕이었습니다.

다음글 물드는 삶, <한국이 싫어서>
이전글 [5월 피프레시 원고]피프레시 월요 시네마-<키메라>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