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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왜 하늘이 아니라 영화를 봅니까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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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하늘이 아니라 영화를 봅니까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플라톤 이래로 상정된 허구와 실재의 이분법 하에서 예술은 항상 현실에 비해 열등한 무언가로 취급되어 왔다. 플라톤과 같은 극단적 입장이 아니더라도, 예술은 기껏해야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만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째서 하늘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가? 그저 우리에게 현실을 충실히 살아갈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마 홍상수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왜 영화이고 왜 허구인가? <수유천>을 통해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수유천>의 서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한 여대에서 촌극제가 열린다. ‘전임’이라는 이름의 강사가 외삼촌에게 자신의 학과 촌극 연출을 부탁한다. 외삼촌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몇 년째 일을 못하고 있는 배우 겸 연출자이다. 그는 사십 년 전 이 여대에서 대학 일학년의 신분으로 촌극을 연출했던 기억 때문에 연출을 맡았다. 촌극하는 학생들 사이에 스캔들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나고, 전임과 외삼촌은 그 사건에 가볍게 끼어들게 된다. 그사이 외삼촌은 ‘전임’의 지인인 한 여교수와 가까워진다.
홍상수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수유천>의 서사는 간단하지만,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오해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정서는 매우 복잡하다. 한 번에 세 명의 여대생을 만났던 것이 적발되고 학교에서 쫓겨난 전(前) ‘연출’은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전임’을 찾아온다. ‘연출’은 자신이 정말 그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냐고 묻지만 ‘전임’은 ‘연출’의 파렴치함에 분노하며 그를 학교에서 쫓아낼 뿐이다. 그러나 얼마 후 ‘연출’은 세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을 만나러 학교에 다시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가볍게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심이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며 상대에게 청혼한다. ‘전임’과 두 여학생은 ‘연출’의 행태에 경악하며 만약 진심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굴 수 있냐고 말한다.
‘전임’은 외삼촌과 여교수의 관계 역시 의심한다. 외삼촌과 여교수가 부쩍 가까워진 모습을 보이자, ‘전임’은 외삼촌에게 여교수와 잤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외삼촌은 전날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의심이 거둬지지 않은 ‘전임’은 며칠 후 외삼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외삼촌은 그날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이 가까운 사이가 된 건 어제부터라고 답한다. ‘전임’은 결혼한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외삼촌을 비난한다. 하지만 외삼촌은 자기는 이미 작년에 이혼을 마쳤으며 별거한 지도 이미 10년이 넘었다고 해명한다. 이렇게 외삼촌과 여교수의 관계, 그리고 외삼촌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전임’의 의심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약 앞 문장을 읽으며 ‘전임’의 의심이 잘못됐다는 명제에 동의했다면, 당신은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전임’은 그날 여교수의 집을 떠나는 외삼촌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외삼촌이 정말 이혼했는지를 검증하지도 않았다. ‘전임’은 그저 자신의 주관적 믿음을 진실로 간주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전임’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부여한다. ‘전임’은 학교를 찾아온 ‘연출’을 멀리서 보고는 “어, 저기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숏은 느닷없이 ‘연출’과 여학생이 있는 장면으로 이동한다. (<수유천>의) 세계는 ‘전임’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믿음과 오해들이 중첩되지만, 홍상수는 사실 그 불분명한 무언가가 곧 세계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홍상수는 우리의 주관적 인식과 분리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임’은 힘들었던 시절 눈에서 3일 동안 피를 철철 흘렸던 경험과 함께 붕대를 찬 자신이 봤던 신비한 광경에 대해 말한다. ‘전임’은 그 광경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고, 그리고 그 광경을 본 경험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고 고백한다. 만약 절대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통념을 따른다면, ‘전임’의 체험은 환각으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도대체 절대적 실재란 무엇인가? 홍상수는 무비판적으로 상정되는 이 절대적 실재란 개념에 대해 전작에서 이미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아름: 근데 실체가 뭔데요? 정말로 실체가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라면, 사실은 없는 거 아닌가요? 그 없는 걸, 안다고 아는 양 전제하는 게, 그게 거짓말 아닌가요, 오히려?
봉완: 없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말로 정리가 안 되는 거지 느낄 순 있는 거야, 그게.
아름: 느끼세요, 실체를?
봉완: 그럼
아름: 그게, 그 느낌이 실체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그 후>)
내 주관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이다. 나아가 홍상수는 자신의 주관적 진실은 곧 영화라는 발칙한 고백을 한다. <탑>과 같은 전작에서 그는 영화의 한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 바깥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실재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탑의 지하 1층으로부터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실체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지는 않으며 자신의 작업이 현실도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수유천>에서 홍상수는 옥상 위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 후 옥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촬영하는 다소 기이한 접근법을 취한다. 탑의 지하 1층에는, 그리고 수유천 책방의 옥상에 숨겨진 비밀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홍상수는 자신에게 있어 영화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에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 또는 타인이 그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배움/믿음/수양이 부족해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실재에 대한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들, 이를 테면 타인의 진심 그리고 예술과 영화가 거짓된 무언가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홍상수는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도 단지 너희들이 본 것을 믿을 뿐 아니냐고, 너희들이 믿는 것도 주관적 인식이 중첩된 무언가에 불과하지 않냐고 되묻는다. <수유천>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레임 바깥에서 다시 프레임 안으로 돌아온 ‘전임’은 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왜 영화이고 왜 허구인가? 잘못된 질문이다. 홍상수는 자신이 영화를 믿고, 자신의 삶이 영화로 인해 변화했다면 자신에게는 영화가 허구가 아닌 실재라고 답한다.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영화인가?
영화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는 홍상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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