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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과 우리의 이분법을 넘어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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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우리의 이분법을 넘어
이시현 2023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호불호가 갈리지언정 나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박상영의 소설에는 제대로 된 철학이 부재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통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아찔한 감각과 내가 경험할 수 없는 퀴어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한 삶에 뚜렷한 철학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누군들 있겠는가?), 나는 그들로부터 현대인이 가지지 못한 덕목인 열정과 순수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완전하다고 느껴졌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작단편집인 『대도시의 사랑법』 중 「재희」를 원작으로 삼아 ‘미친 년과 게이’(오해하지 마라, 홍보 문구다!)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한다. 그런데 왜 「재희」였을까? 아마 여성인 ‘재희’와 게이인 ‘흥수’의 동거를 통해 소수자와의 연대를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는 좋은 부분이 다수 존재하지만, 이는 모두 원작에 빚지고 있다. 반면 <대도시의 사랑법>이 원작을 넘어 적극적으로 모종의 메시지를 말하려는 순간, 영화는 순식간에 초라한 프로파간다로 전락하고 만다.
박상영의 문학은 퀴어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그의 소설 속 게이는 때때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타인의 시선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친구들과 클럽에 다니며 청춘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다. 대중이 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달리 게이는 우리와 그렇게 다르지 않으며, 설령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에 불과할 정도로 사소하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구시대적 폐쇄성에 불쾌해할지언정 사회를 뒤엎을 분노를 품지는 않는다. 이는 그들이 이미 충분히 체념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이는 그들이 사회 구조에 유달리 더 분노할 심성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우리가 사회의 부당함에 특별히 더 분노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박상영은 퀴어가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즉 애초에 ‘그들 대 우리’의 구도가 성립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성적 지향성과 관련하여 ‘영’(‘흥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영’의 어머니지만, ‘영’은 시한부인 자신의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간병하기를 선택한다.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인물을 사랑하는 주인공의 양가적 감정을 엿보며 독자는 비로소 다른 사람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도 그렇게 간단하게 취급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중반부까지는 ‘재희’와 ‘흥수’(영’)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하지만, 원작에는 부재했던 감정적 절정을 만들기 위해 악역을 설정하는 작위적이고 편의적 전개를 선택하며 한계를 드러낸다. ‘재희’의 집에는 팬티를 훔치려는 변태가 찾아오며 ‘재희’의 전 남자친구는 변호사임에도 ‘재희’의 집에 무단침입하며 ‘재희’를 폭행하기까지 한다. ‘그들 대 우리들’의 구도 속에서 피해자가 된 ‘재희’와 ‘흥수’는 정의를 구현하는 영웅이 된다. 상당히 통쾌하며 교훈적인 서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혐오자들이 점점 영악해지는 현실 속에서 이런 도식에 실질적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욕설과 폭행이 아닌 차가운 조소의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데, 마음 놓고 분노할 대상을 설정해도 허수아비 때리기밖에 더 되겠냐는 회의감이 든다.
비판이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되었든 나는 여러분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의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했다는 점만으로 가치가 있으며, 음악감독인 프라이머리의 ost를 듣는 재미 역시 상당하다. 기왕이면 원작과 드라마까지 보기를 권유한다. 그들과 우리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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