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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기로디 특별전 <오래된 꿈>2017-09-27

 


어떤 삼각 로맨스의 기록, <오래된 꿈>

강소원 영화평론가


오래된 꿈 스틸컷


프랑스 남부 시골의 어느 공장. 이제 곧 문을 닫게 될 쇠락한 공장에 며칠 후면 실직자가 될 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고 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풀 사이로 여기저기 정체모를 철조물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이곳에 가냘픈 몸에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자끄. 자끄는 이 공장의 기계들을 해체해서 쓸 만한 부품을 분류해내기 위해 여기 왔다. 그가 맡은 일은 용도를 다한 그곳의 노동자들을 뒤로 밀어내고 사실상 공장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일에 가깝지만, 그에겐 그들이 모르는 다른 능력도 있다. (귓속말로 전해야 할 것만 같은데) 자끄는 에로스의 수호자다. 알랭 기로디의 2001년 작 <오래된 꿈>은 자끄가 이 공장에서 일하게 된 그 며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알랭 기로디의 탁월한 재능이라 해야 할지 남다른 의지라 해야 할지, 여하튼 기로디는 가장 그럴 법하지 않은 공간에, 그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상황에 놓인 인물들에게서 미묘하고도 강렬한 연애의 감정을 발견한다.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그 어떤 환상도, 티끌만큼의 활력도, 일말의 미래도 없이, 그저 지금 당장은 시간을 죽이는 게 일이라는 듯이 오로지 맥주와 카드놀이와 시시한 말다툼으로 하루를 메워 넣는 어느 남성 공동체에서의 이야기다.

기로디는 이 음울한 세계를 엄격하게 통제되고 세심하게 절제된 극소주의 스타일로 재현하였다. 출근하고 빈둥대다 퇴근하는, 공장 뒤뜰과 작업실과 탈의실로 구성된 이 세계는 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세부들로 닫혀있다. 기로디의 카메라는 프랑스 남부의 공장지대를 긴 트래킹 쇼트로 담은 엔딩 크레딧에 이르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치 이 공장이 그들 세계의 전부라는 듯이.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이 공장이 문을 닫으면 세상을 향한 그들의 문도 동시에 닫히는 셈이다. 이 공장의 그들에겐 출구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는 누굴 위해 또 무얼 위해 그렇게 일했었는지를 자문하고 탄식하는 일만이 남았다.


자끄는 이 암울한 운명 공동체의 외부인이다. 과묵하고 다소 무심해 보이는 그는 한 곳에 정착하기를 거부하는 떠돌이 기계공이며, 게이다. 제 기능을 상실한 죽은 공간으로 틈입해온 이 청년은 신비의 묘약이라도 숨겨온 양 제 주변의 공기를 바꿔놓는다. 자끄가 움직이자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또는 사회성 드라마처럼 전개되던 영화에 몽환적인 성적 긴장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움직인 것은 자끄가 아니라 루이와 도낭이었던가. 아니다, 루이와 도낭을 움직이게 한 것이 자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끄의 열망과 달리 초로의 유부남 루이가 친근한 말벗으로 그에게 접근해올 때, 공장 주임인 도낭은 자끄의 작업장 입구에서 자주 돌아선다.


네 개의 탈의실 신과 네 개의 출근 쇼트로 간명하게 구축된 나흘의 시간.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나날 속에 자끄의 작업실을 교대로 드나들던 루이와 도낭. 기계적이고 텅 빈 무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문득 깨닫게 되는 거대한 감정적 격변. 대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들 사이에는 호모에로티시즘의 저류가 흐르고, 기로디는 자주 그들의 관계를 삼각 구도로 시각화한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과 유혹의 삼각 로맨스는 고백과 거절의 쓰라린 드라마에 이른다.


얼마간은 슬프고 때로는 우습고 내내 놀라운 이 영화는 모든 측면에서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 여기에는 알랭 기로디의 세계에서 흔히 목격되는 성욕을 발산하는 육체들의 낙원 대신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는 불모의 현실이 있다. 아무 것도 자라날 수 없는 불모의 대지에 기어이 사랑의 싹을 틔워내는 순간은 경이롭지만, 되짚어보면 알랭 기로디의 주제는 언제나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같다. 기로디는 거의 신화적으로 보일 정도로 벌거벗은 육체들의 성적 향연을 노골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감독이며 또한 원초적인 육체의 희열을 열렬히 긍정하는 감독이지만, <호수의 이방인>이 그러하듯 치명적인 것은 (거의 언제나) 사랑이지 섹스가 아니다. 물론 <오래된 꿈>은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는다. 그보다 생을 추동하는 기묘한 유머로 샛길을 낸다. 나란히 공장을 걸어 나가는 자끄와 루이의 뒷모습을 길게 찍은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웃음의 여운을 길게 남긴다. “내가 너무 늙어서?”, “내가 너무 뚱뚱해서 그래?” 지금, 루이는 자끄가 자신을 거절한 이유를 알고 싶다. “네가 게이가 아니라면 몰라도...” 급기야 왜 난 안되느냐며 매달리는 루이에게 자끄는 차분히 대꾸한다. “나도 모두를 사랑할 순 없어요.” 때로는 원하는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자끄에게 충고하던 그 루이는 어디로 갔는가. 이쯤이면 아무 것도 바뀐 건 없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오래된 꿈>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영역 저 너머에서 움직이는 어떤 을 엿본다. 그런데 그 오래된 꿈은 누구의 꿈인가. 그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알겠다. 이 영화의 종반부에서 기로디가 자끄의 입을 빌어 내가 누군가를 원하게 되면 나는 그를 원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지 아닐지를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는 않는다고 말할 때, 그건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리라. 그렇게 알랭 기로디는 불가능성의 공간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거부당할지언정 결코 소멸시킬 수는 없는, 패배를 모르는 에로스를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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