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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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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기로디 특별전 <호수의 이방인>2017-09-27


 

호수의 이방인 단순함의 미학 

박성찬 부산시민평론단

 알랭 기로디 특별전 <호수의 이방인> 이미지

 

<도주왕>을 찍은 뒤, 알랭 기로디가 준비한 영화는 추운 겨울 도시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에다 이성애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가볍게 끝날 줄만 알고 시작한 시나리오 작업은 갈수록 종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8개월이나 잡고 있었던 작품을 엎어야만 했다. 잔뜩 풀이 죽은 기로디는 자신이 정말 잘 알고 있는 세계, 즉 게이 공동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심기일전한다. 형식은 심플하지만 복잡한 것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시나리오가 필요했고 여섯 번째 영화 원고가 마무리 될 즈음에 기로디가 손을 놓은 작품과 대척점에 있는 영화의 윤곽이 드러났다. 여름, 한적한 교외의 호수, 동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 그것이 <호수의 이방인>이다.

 

프랭크는 한동안 뜸하던 호수를 다시 찾는다. 남자들만 모여 있는 호수. 물고기가 아니라 호감이 가는 상대를 낚는 장소. 호수는 게이들의 파라다이스다. 호숫가 외진 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외톨이 앙리는 프랭크와 말동무가 된다. 호수에 파문이 생긴 것은 멋진 근육과 콧수염을 기른 미셀이 나타나면서부터다. 프랭크는 미셸을 본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는 이미 파트너가 있는 몸이다. 어느 날 해질 무렵에 호숫가가 보이는 숲에 혼자 남아 있던 프랭크는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 미셀이 그의 파트너를 익사시켜 살해한 것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갑자기 퀴어 느와르로 급변한다. 손에 피를 묻힌 살인마이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미셸. 프랭크는 두려움과 욕망 사이에 괴로워하지만 미셸과 연인이 된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점점 커져간다.

 

알랭 기로디가 의도했던 대로 영화는 단순하다. 그 단순함은 고전 희곡의 삼일치 법칙을 떠올리게 하는 형식상의 제약과 관련이 있다. 장소, 시간, 행위의 일치라는 기본 골격이 일관되게 유지되면서 영화의 다양한 톤을 만들어 낸다. 한마디로 단순함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움이 영화의 매력이다.

 

1. 장소

주차장은 호수로 접어드는 첫 관문이다. 모든 신은 주차장에서 시작해서 숲길을 거쳐 호수로 이어지는 첫 신의 변주다. 프랭크가 호수를 방문할 때마다 주차된 자동차 수가 변하거나 숲길 장면의 몇 쇼트가 빠지기도 한다. 반복과 차이는 영화적 리듬을 만들 뿐만 아니라 관객을 장소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여기에 시점 쇼트가 더해지면 프랭크와 점차 감정적으로 일치가 되어 관객은 어느새 호수를 찾는 방문객이 된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프랭크의 미묘한 감정에 관객이 점차 공감이 되는 까닭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장소에 배치된 사물이 인물의 부재를 환기시키고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미셸의 단짝이 가지고 있었던 물품들, 예컨대 밤의 주차장에 남아 있는 자동차, 호숫가에 뒹굴고 있는 비치 타올과 스니커즈는 살인의 낙인이며 프랭크에게는 두려움의 흔적이 된다.

 

2. 시간

프랭크는 늘 늦은 오후에 호수에 나타나 날이 저물 때까지 남아 있다. 매번 같은 시간대이지만 화면이 변화무쌍하고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클레어 마통의 카메라가 골든아워를 전후 한 빛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누런 자연광이 화면에 넓게 번져 있다가 점차 광량이 줄어들면서 어둠으로 변화하는 호숫가의 모습은 낮의 열정이 밤의 공포로 전환하는 시간의 마술이며 프랭크의 내면 풍경이다. 프랭크는 그런 시간과 풍경 속에 웅크리고 앉아 고민에 빠져 든다.

 

3. 행위

<호수의 이방인>에서 액션은 인물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프랭크, 미셸, 앙리의 삼각관계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설정이지만 그들 사이의 시선과 말의 불일치가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 내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프랭크가 앙리를 처음 만나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멀리 미셸이 등장하고 그를 본 프랭크가 한 눈에 반하는 장면은 세 사람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압축한 놀라운 장면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을 한 공간에 처음 두는 이 장면에서 기로디는 투 쇼트, 시점 쇼트, 롱 쇼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호수 이편의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우정), 호수 저편의 근육질의 동성애자(사랑)의 배치로 욕망의 삼각구도가 만들어진다. 이 장면을 기로디는 <투 로드 투게더>에서 두 남자의 개울가 대화 신만큼 다정다감하게, <죠스>에서 망망대해를 지켜보는 경찰 서장의 신만큼 감각적으로 찍었다. 미셸이 호수 저편에 등장하기 직전, 앙리는 프랭크의 직업을 묻는다. 프랭크의 답변. ‘예전에는 야채 장사를 했는데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순간 프랭크의 시점 쇼트로 미셸이 등장한다. 마치 프랭크가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곳에 파트너를 낚으러 왔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프랭크가 앙리의 직업을 묻고 앙리가 벌목공이라고 대답을 하는 순간, 다시 프랭크의 시점 쇼트로 미셸의 근사한 몸매가 보이고 이어지는 프랭크의 대답. ‘(벌목공이라는 직업은) 참 근사하네요. 숲 속에서 하는 일은 대개 좋죠’. 이제 프랭크는 숲으로 사라진 미셸을 쫓아 자리를 뜬다. 이 대사들 사이에 두 번 등장하는 시점 쇼트의 주체는 프랭크이기때문에 대화 중에 시점 쇼트가 나온다는 것은 그가 앙리를 보지 않고 있거나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4. 신화적 차원으로 도약

인간은 고립적이고 불연속적인 존재인데 연속성을 얻게 되는 것은 죽음이나 섹스와 같은 금기를 위반하면서 가능하다는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 생각이다. 죽음의 두려움과 관능적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프랭크에게서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감독 스스로가 인터뷰에서 조르주 바타이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이다(기로디의 장편 데뷔작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도 죽음과 연속에 대한 바타이유적 성찰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오히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바타이유가 아니라 신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의 구조가 호수 밑바닥을 헤엄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랭크와 앙리가 호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앙리가 호수 밑바닥에 살며 사람을 헤치는 메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4~5미터 크기의 굵고 검은 메기는 말할 것도 없이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다. 미셸이 자신의 파트너를 익사시키고 호수를 헤엄쳐 뭍으로 나오는 장면은 살인 메기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는 전지전능하고 파괴적이며 매력적인 신이다. 변신은 데이빗 린치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도 즐겨 다루는 소재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기형에 가깝다. 하지만 기로디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게이 감독들이 다루는 변신은 신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마치 동성애자들을 변종과 같이 바라보는 이성애자 위주의 세상에서 변신 모티브로 새로운 버전의 신화를 쓰는 것과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단순한 이야기에 신화적 구조까지 스며들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알랭 기로디. 그는 현존하는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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