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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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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계절과 도덕이야기 '희극과 격언'2018-02-01
Review 1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로메르의 계절과 도덕 이야기' Tales of eric rohmer 2018.1.26.(Fri)~2.10.(Sat)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연작 :

로메르가 모순을 껴안는 방법

 

시민평론단 심미성

 

 

희극과 격언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로맨스의 탈을 쓴 인간탐구서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각각의 사랑에 관한 담론을 소환시켜 놀라울 정도로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 낸다. 사랑을 대하는 개인의 방식은 전 세계의 인구와 맞먹을 만큼 가지각색일 것이다. <비행사의 아내>(1980), <아름다운 결혼>(1982), <해변의 폴린느>(1983), <보름달이 뜨는 밤>(1984), <녹색광선>(1986),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 6부작을 통해 완성된 희극과 격언 연작은 각각 하나의 격언으로부터 시작하는 섬세한 우화다. 이를테면 <보름달이 뜨는 밤>의 경우, ‘두 여자를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격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발점이 그렇다는 것이지, 하나의 짧은 문장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되려 로메르의 흥미로운 시선은 디테일에 훨씬 농도 짙게 녹아있다.

 

아이러니의 세공술

관심 있는 상대에게는 조금의 매력도 끌지 못하면서 엉뚱한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여자(<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연인의 품에서 자유를 갈망하다가 정작 자유를 얻게 되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여자(<보름달이 뜨는 밤>), 결혼 상대로 점 찍은 남성에게 다가갈수록 번번이 자충수를 두고 마는 여자 (<아름다운 결혼>). 로메르가 섬세하게 엮어 놓은 아이러니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인물의 관계를 복잡하게 꼬아 놓는다.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오해’하면서, 또 스스로를 ‘착각’하면서, 또 다른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이 설계가 어떤 캐릭터에게는 가혹할 만큼 느껴지기도 해서, 감독의 악취미가 시나리오에 깃든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얼핏 든다. 그러나 다시 이 설정들은 말이 되는 아이러니 즉, 가능한 아이러니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의 정곡을 찌를 만큼 예리한 현실감각에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이러니의 가능성은 청춘 남녀들의 대화에 드러난 로메르의 세공술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해변의 폴린느>에서는 사랑에 대한 주관적 이론이 펼쳐지는 흥미로운 시퀀스가 있다. 마리옹(아리엘 동발)은 찰나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꿈꾸지만 사촌동생 폴린느(아망다 랑글레)는 그런 사랑이 불러올 실수를 경계하고, 잘 모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마리옹의 연인이었던 피에르(파스칼 그레고리’ 역시 폴린느처럼 깊고 지속적인 신뢰가 가능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한다. 앙리(페오도르 앳킨)는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탐험가의 성향대로 자유로운 사랑을 하는 타입이다. 네 사람의 담론으로 도식화 해 본다면 마리옹과 앙리는 이상주의자의 사랑을, 폴린느와 피에르는 현실주의자의 사랑을 원하는 셈이다. 그러나 피에르는 마리옹의 사랑을 원하고 마리옹은 앙리에게 빠져든다.

 

자기 암시의 처세술

이런 전개는 어찌 보면 이들의 대화에서 이미 예견된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읽어냄에 있어 때로는 대화보다 중요한 것이 비언어적 레토릭이다. 희극과 격언 6부작에서 눈에 띄는 비언어적 수사가 있다면 발화자의 눈이다. 어떨 때, 눈빛은 언술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가령,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자기합리화에 도취돼 끝내 눈물까지 흘리고 마는 ‘안(마리 리비에르)’은 길고 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프랑수와(필립 마를로)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비행사의 아내>). 누구보다 강한 확신이 깃든 말을 하는 사빈(베아트리스 로망)의 커다란 눈은 자기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불안해 보인다(<아름다운 결혼>). 뿐만 아니라 에드몽(앙드레 뒤솔리에)에게 매료된 사빈은 둘을 이어주기 위해 전화를 넣겠다는 클라리스(아리엘 동발)에게 이렇게 반응한다. “절대 안돼 (전화하지마).” 그러나 사빈의 눈은 꼭 다르게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 고맙겠는데.’ 안과 사빈처럼 <녹색광선>의 델핀(마리 리비에르) 역시 언행일치가 어렵다. 스스로를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자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는 누구보다 그렇지 못한 소심하고 답답한 사람이다. 로메르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이 자주 꺼내 놓는 변명과 합리화가 그들이 휘두를 수 있는 최소한의 방패막이라면, 그 처세술은 결국 모순적인 자기암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들추어낸다. 이쯤 되면 ‘의미’란 얼마나 작위적인 것인가 싶어진다. 이 작위성은 편의에 의해 선택한 것이기도 하고(<해변의 폴린느>), 자존심을 다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아름다운 결혼>).

 

포착하는 카메라, 의심하는 관객

로메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주관적으로 내린 판단들은 자주 본질과 동떨어져 곡해되어 있으며, 어떤 인물들은 제 말에 제가 걸려 넘어지는 자가당착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이와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렇다는 점이다. (<비행사의 아내>에서는 아예 세 인물의 생물학적 나이를 15세, 20세, 25세로 설정해 놓고, 나이가 많은 쪽일수록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드러내는 인물로 그리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열 다섯 살 루시(안-로르 뫼리)는 셋 중 가장 명석해 보인다. 그렇게 스스로가 뱉어낸 확언에 가장 크게 흔들리는 자신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때 ‘말’은 곧 ‘투명한’ 방패가 돼버린다. 명징한 주관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대사가 관객들에게 합리적 의심이라는 열쇠를 쥐어주는 꼴이다. 로메르의 카메라는 줄곧 단조로운 방식으로 인물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다지 인식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인물의 발걸음을, 대화를 자연스럽게 좇는 카메라 사이에 드물게 줌인(zoom-in) 쇼트가 끼어들어 관객을 당황시킨다. 그 때 우리가 갖는 당혹감의 정체는 말의 피상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대화의 진정성에 대해 품는 의구심이다. 돌연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카메라는 말의 주체를 더 가까이 응시하며 관객들을 향해 언어에 가리워진 실체에 주목하길 부추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연민과 자조가 교차하는 감흥을 겪는다.

 

불완전한 존재에 보내는 위로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개인의 너절한 내면들은 마냥 타인의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씁쓸한 공감대를 형성해간다. 에릭 로메르는 아무래도 인간의 가냘프고 예민한 구석들, 지리멸렬한 모순들이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 가장 잘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인 것 같다. 이 휴머니즘 가득한 인물들의 불완전한 모습들은 분명 관객을 웃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단 조롱과 풍자가 로메르 영화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 불완전함을 폭로함과 동시에 찬미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꾸준히도 인간의 어설픈 면면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영화가 보여주는 너절한 인간군상과 갈등의 얼개 뒤에 이따금씩 행운 같은 결말을 선사하기도 했던 로메르를 보면 그 추측은 훨씬 선연해진다. 가령, 그의 성격대로 갑갑하게 흘러가는 델핀의 우울한 일상에 마침내 녹색 섬광이 비치는 결말은 그 자체로 수많은 ‘델핀들’에게 보내는 위로이며 (<녹색 광선>), 사빈은 갈수록 연민을 갖기 힘들 정도로 매력을 잃어가는 인물이지만 영화가 끝나기 직전, 희미한 인연의 불씨를 발견하게 된다(<아름다운 결혼>). 로메르는 사랑의 경계에 머문 남녀의 심리를, 특히 여성 심리의 윤곽을 대단히 잘 포착하는 감독이다. 남성 감독의 입장에서 여성에 대해 이렇게 명민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결코 흔한 재능은 아닐 것이다. 사랑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한다면 감히 그가 박사 학위를 따고도 남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해변의 폴린느>에서 앙리는 “완벽한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로메르가 인간의 투박한 본성을 보듬는 까닭을 이 대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메르 자신도, 로메르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도 이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매료된 자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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