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로스트 메모리즈 2018 <잔 다르크의 어린시절>2018-02-27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lost memories 로스트 메모리즈 2018 2018.2.27.(화) ~3.15.(목)


 

 

 

 

 

 

 

  

가장 이질적인 잔 다르크 이야기, 그 보다 이질적인 뒤몽의 시도들

-브루노 뒤몽의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Jeannette, The Childhood of Joan of Arc>-

 

 

장지욱(부산영화평론가협회)

 

브루노 뒤몽의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2017)은 제목대로 어린 잔 다르크, 자네트의 어느 기간 동안의 이야기다. 영화는 영국과의 백년 전쟁 중에 자네트가 신의 계시를 받은 뒤 이어지는 내적 고뇌와 신을 향한 질문, 이윽고 출정을 결심하기까지를 뮤지컬로 그렸다. 자네트의 성장을 기준으로 영화를 전,후반부로 나누어보면 전반부는 그녀가 살면서 양을 방목하는 어느 산속과 계곡에서, 후반부는 성장한 자네트가 역시 같은 산을 배경으로 그리고 그녀의 집과 몇몇 장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도입부터 신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자네트는 끊임없이 기도와 질문을 반복한다. 전반부를 채우는 어린 목동과의 만남이나 친구와 수녀들과의 대화는 전쟁을 매개로 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논쟁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출정을 결심한 자네트의 내적 갈등, 친구나 삼촌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대화와 만남이 연속되는 과정은 뮤지컬이라는 형식 안에서 기이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메탈 음악을 주로 쓰는 것이나 수녀와 함께 헤드뱅잉을 하는 장면, 어수룩한 삼촌의 랩으로 채워지는 장면들을 통해 반영되는 잔 다르크의 이미지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부조리한 이러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일차적인 감상은 성웅이거나 마녀로서 자리하는 통념상의 잔 다르크라는 존재를 부정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소격효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이상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만약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을 통해 처음으로 브루노 뒤몽을 만나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왜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질문을 가질 법 하다. 반면에 브르노 뒤몽의 필모그래피를 쫓아왔던 관객이라면 왜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지?’에 가까운 질문을 지닐 수도 있다. 첫 번째 질문이 영화의 결과물에 대한 인상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연출의 의도에 보다 다가가는 질문이라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이 영화를 보고 만듦에 관한 질문을 갖게 되는 기저에는 이 영화 속에 깔려 있는 아마추어적인 요소들이 큰 이유로 작용할 것 같다. 비전문 배우와 작업하고 독립적인 제작 방식과 로케이션 촬영을 고집하는 뒤몽의 아마추어리즘은 사실 브레송이나 에릭 로메르가 그러했듯 기존에도 있어왔던 방식이다. 하지만 <잔다르크의 어린 시절>에서 드러나는 그의 의도와 결과물은 기존 그의 영화와는 매우 다른 좌표에 자리한다. 뒤몽이 그간 보여줬던 선명한 폭력과 욕망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것은 물론이며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알아왔던 기존의 경향들과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뒤몽은 초기작에서 욕망을 드러내고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 인간성과 사회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 왔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섹스 장면을 빌어 이를 축약하자면, 연인끼리 바위산과 야외 수영장과 같은 개방된 장소에서 과장된 성행위를 나누고(<트웬티나인 팜스>(2003)), 강간 살인 현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친구와 나눈 뒤 이어지는 그 친구 커플의 성관계를 목격하며(<휴머니티>(1999)) 전쟁의 참전을 전후로 가지는 상반된 성질의 성관계(<플랑드르>(2006))를 그린다. 뒤몽의 세계에 내재하는 인간성과 욕망은 이렇듯 과장되거나 어긋나게 묘사되며 때로는 카메라가, 때로는 인물의 응시에 뒤따르는 동요가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도록 한다. 뒤몽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고집하는 로케이션 촬영과 어우러져 그가 바라보는 내재된 욕망과 폭력의 시대상으로 직조된다. 그러다가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2016)을 기점으로 <잔다르크의 어린 시절>까지 최근 내놓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뒤몽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시도를 이어간다.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에서 마치 몰리에르 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과장됨을 고스란히 담아낸 인물들이 연극적 향연을 펼쳐내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져와 우화적인 서사를 펼치는 장면들은 그의 초기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그가 뮤지컬 영화를 선택한 것 또한 그렇다. 뒤몽은 변화를 시도하는 두 작품에서 코미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이를 통해 <슬랙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에서는 계급적 분리와 부조화를 풍자하는 방식으로,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에서는 프랑스의 영웅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잔 다르크를 재인식한다. 또한 초기작에서 보여준 인간성과 욕망에 대한 관심사와 탐구적 시선이 조롱과 풍자를 통한 이념에 대한 재인식으로, 혹은 그러한 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와 질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에서는 자네트가 수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자네트의 기도장면은 부감으로 시작하다가 기도 말미에 하늘이 아닌, 카메라가 놓인 아래를 정면을 바라보는 자네트의 시선으로 연결된다. 이어 친구가 희소식을 전하고 자네트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에 안도하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데 이때 카메라는 신의 시점에서 자네트를 바라보는 극부감으로 마무리된다. 이 장면에서는 크게 세 개의 시선이 등장한다. 그리고 불안한 시선처리로 카메라와 몇 차례 눈을 마주치는 다른 장면들과는 달리 이 장면은 배우와 카메라 사이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진다. 따라서 자네트의 시선을 쫓아 이 장면을 이해하자면 신의 위치가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것 된다. ‘하늘에서 임한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주기도문의 주체가 신이라고 한다면 이 장면에서는 그 주체가 기도하는 자네트로 옮겨가는 것이다. 다소간의 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러한 독법이 가능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뒤몽의 변화된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서사 내용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별다른 재해석은 찾아보기 어려운 이 작품에서 유독 엄격하게 촬영된 이 장면은 뒤몽이 기존의 질서와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재인식하려는 시도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에는 의뭉스러운 지점이 남아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영화에 내재하는 아마추어리즘을 견지하고서라도 잔존하는 못 만듦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인물들이 불안정하게 시선을 처리하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정도는 애교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실수로 보이는 현장이 그대로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는 실소가 나온다. 영화 말미에 자네트가 출정길에 나서는 장면은 비장해야 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삼촌이 말에 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말에 올라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 장면은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도된 실수라기보다는 실수의 용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이 장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뒤몽의 최근 두 영화는 결과적으로 기성 장르와 뒤몽식 영화 만들기의 콜라보이다. 코미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비전문 배우의 연기나 로케이션과 같은 뒤몽 특유의 작업방식을 만나면서 발생하는 변주의 파장은 장르적 전형이나 관습적 웰메이드와는 결이 다르다. 혹시 뒤몽은 기성의 질서나 이데올로기를 재인식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를 영화라는 영역으로도 전이시켜 완결에 대한 강박과 웰메이드에 대한 관습적 문법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일까? 예술에 대한 가치와 공감은 불완전하거나 미완이어도 가능하다는, ‘만듦에 대한 전위적인 용인을 피력하는 방식으로서 말이다. 사실 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서 기술한 불완전미완이라는 단어에 내재하는 정치성부터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뒤몽의 이러한 시도가 전하는 괴리를 완전히 지우기 어려운 만큼 추가적인 언급은 유보하려고 한다. 다만 그의 전작 <까미유 끌로델>(2013)에서 까미유 끌로델이 정신병동의 환자들이 진행하는 서툰 연극 연습을 보다 눈물을 흘리며 정서적으로 동화하는 장면을 빌어 영화에서의 만듦이라는 관습적 질서에 대한 뒤몽의 재인식, 혹은 그러한 시도가 가능하리라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브루노 뒤몽은 폭력을 응시하며 고수했던 초기작의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근작에서 코미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그러했듯 앞으로는 보다 능글맞은 방식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이어나갈 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에서 그가 선보인 일련의 시도들은 기존에 인식되어 왔던 잔 다르크의 이미지를 해체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해체한 대상은 잔 다르크를 넘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기에 그 방향이 어디를 제시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 또한 기꺼운 일일 것이다.

 

다음글 로스트 메모리즈 2018 <어떤 여자들><더 파티><렛 더 선샤인 인>
이전글 나루세+오즈 '나루세 미키오 감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