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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 ‘세상은 됐고, 나를 바꾼다’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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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세상은 됐고, 나를 바꾼다’
2019.7.16(화)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Le Grand Bain 2018)은 남자 싱크로 수영 팀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 중년 남녀의 ‘통과의례’ 이야기를 담았다. 출연 배우들은 프랑스 국립체육연구소(INSEP)에서 7개월 간(2016.10~2017.5) 전 올림픽 국가대표 팀 코치인 줄리 파브르(Julie Fabre)의 지도를 받으며 연습했고, 영화 속 싱크로 장면은 대부분 배우들이 직접 연기한 장면이라 한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2003년에 결성된 스웨덴 팀이 2009년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이야기를 기초로 하는 것이다(물론 이 국제대회는 비공식 경기이다). 스웨덴 팀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40대 남자들로 구성됐고 엔지니어, 정육점, 교사, 문서보관소 직원과 같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졌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0년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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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코미디의 특징
어쩌면 이 작품은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벗어나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특징으로 ‘사회적 코미디’를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조롱하고, 사회 모순을 비웃는 내용을 비롯해 계급 갈등과 문화(종교, 언어…) 차이를 희극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또 표현의 측면에서 이른바 PC(Politically Correct, 정치적 올바름)에 관련된 금기의 기준이 다른 것 같다.
프랑스 코미디는 계급 갈등과 문화 차이에 관련된 내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희극화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사회적 갈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끌벅적하게 싸운 뒤 화해와 통합을 시도한다고 할까(어쨌거나 희극인 만큼 화해와 통합을 시도한다). 이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프랑스 식 코미디의 특성을 지닌 듯하다.
<컬러풀 웨딩>(Qu'est-ce qu'on a fait au bon dieu 2014. 제목을 직역하면 ‘우리가 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의 경우, 프랑스에선 비교적 호평을 받았지만, 당시 미국에선 상영되지 못했다. 유대인, 이슬람, 중국인, 아프리카인의 특성을 놓고 언쟁하는 장면(영화 대부분을 차지한다)에서 PC 윤리를 위배한 대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질 를루슈 감독은 엔딩 크레디트에서 올리비에르 나카셰와 에릭 토레다노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이들이 만든 <언터처블: 1%의 우정>(Intouchables 2011)과 마찬가지로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또한 PC 금기에 가까운 내용을 희극화하는 장면이 몇 차례 있다.
반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사회성이 짙지 않다. 가령 등장인물의 실직 상태나 불행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에서 찾는 대신 자연, 인생의 의미,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이렇게 볼 때 영화는 등장인물의 갈등을 모두 꺼내놓고 싸운 뒤 화해를 시도한다는 면에서 프랑스 코미디의 흐름 속에 있지만, 갈등의 본질을 파고드는 방향이 사회성보다 철학 성격을 띤다는 면에서 프랑스 코미디의 흐름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 ‘뉴스채널’(LCI) 영화평론가 베르믈렝(Jérôme Vermelin)의 말처럼 기존 프랑스 코미디가 공동체를 조롱하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와 닮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우리를 감싸 안는다.
• 주제 명시
이 관점에서 영화의 구성을 살펴보자. 영화는 동그라미(이하 ●)와 네모(이하 ■)에 관한 ‘형이상학적’(?) 멘트를 던진다. 일단 ■는 규격, 모럴, 경쟁을 의미하고 ●는 거기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영혼’ 정도로 생각해두자. 카메라는 베르트랑이 잠자는 2층 창문을 클로즈업한다. 창틀이 네모란 것은 베르트랑에게 집=■이고, 집이 ‘감옥’으로 여겨짐을 표현한다. 오프닝 이미지와 함께 <누구나 세상을 지배하길 바란다>(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1985)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할까. 노래는 현대 사회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경쟁과 ‘파워게임’을 비판하는데, 이 메시지는 영화 전체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베르트랑은 2년 간 실직 상태이고, 온종일 캔디 크러쉬 게임만 한다. 자신감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었으며,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 “잘 모르겠어요.”가 이 인물 성격을 대표하는 말이다(수영 코치인 델핀과 면접을 할 때도 이런 태도로 일관한다. 델핀이 “아는 게 뭐래”라고 핀잔을 주지만, “좀 그래요”라고 수긍한다). 영화 타이틀이 나오며 베르트랑이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아 정면을 바라보다 수면 위로 올라가 헤엄치는 모습이 나온다.
원 제목인 ‘Le Grand Bain’은 공식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형 수영장’을 말한다(‘힘든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경쟁의 장이란 점에서나, 형태 자체에서나 대형 수영장은 ■다. 또 베르트랑이 가라앉았다 수면위로 올라가 헤엄치는 모습은 영화의 영어 제목인 ‘Sink or Swim’을 표현한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문제다. 이처럼 영화는 주제를 명시한다. 이 ‘사각의 정글’ 속에서 어리바리한 베르트랑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데 수영장 어디선가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우아하게”(Grace. Elegance)를 외치는 여자 코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베르트랑은 뭔가에 홀린 듯 그곳을 바라본다. 바로 싱크로 수영을 강습하는 곳이었다.
• 베르트랑의 낙원
어린아이의 마음, 놀이, 그리고 우아한 미학이 그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사실 싱크로는 가라앉음과 헤엄침이란 두 모순적 행위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Sink or Swim’이라면, 싱크로 수영은 ‘Sink and Swim’인 것이다.
수영장 관리인인 티에리가 베르트랑을 안내하며 말한다. “우리는 즐거움 plaisir 때문에 오는 거지… 여긴 군대가 아니니까.” 즐거움은 ●이고, 군대는 ■다. 싱크로 강습은 대형 수영장의 ■ 속에 있는 ●다(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이들이 무서운 여자 코치 아만다와 함께 군대식 훈련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펜바흐의 뱃노래(Barcarolle)가 울리는 가운데 델핀은 수강생들을 지도한다. “쭉 펴고… 너무 뻣뻣해요(coincé, rigide).” 뻣뻣함은 ■에 갇힌 모습이고, 팔을 쭉 편다는 것은 그 틀에서 벗어나는 ●이며, 우아함이다. 그리고 여성적이다. “인어처럼… 내 안의 여자를 찾아봐요. 여성성을 찾으면 더 남자다워질 수도 있어요.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베르트랑이 싱크로 팀에서 감동 받은 활동이 하나 더 있다. 연습을 마치고 탈의실(또는 사우나)에 모여 저마다 이야기를 털어놓는 시간이다. 이 자유 토크의 원칙은 단 하나다. “서로 흉보지 않는 것”이다. 이때 ‘흉본다’로 번역된 것은 ‘재판(판단 심판 평가 비판)’을 뜻하는 프랑스어 juger이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같은 것이고, 영화 속 아내의 언니 부부는 이 차가운 시선을 인격화한 인물이다.
델핀이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알코올 중독자 치료 모임과 마찬가지로 싱크로 팀 친구들은 각자가 자유롭게 사연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이 행위 자체만으로도 베르트랑은 정신적 위안을 얻는다. 집으로 돌아갈 때 티에리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는데, 이 포옹은 베르트랑의 우울함을 달래준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들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티에리가 남자 싱크로 국제경기에 참여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 국제 대회 참여를 결정하다
델핀과 싱크로 팀이 들떠있는 와중에 로랑 혼자 ‘현실 원칙’을 앞세우며 반대한다. 또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사람’(revanchard)의 결정 때문에 마지막 남은 품위(dignité 위엄)를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때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사람’은 베르트랑을 말한다(또 로랑이 말하는 ‘품위’는 나중에 영화에서 인용될 릴케의 문장에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어른들의 품위’에 상응한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보자).
로랑은 자신도 실패자이지만, 메달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델핀은 ”누구나 각자의 메달이 필요해요”(On a tous besoin d’une medaille. ‘우리 모두 메달이 필요해요’)라고 말한다. 이때 메달의 의미는 뭘까. 우리는 현재 델핀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사는지, 또 과거의 영광을 증명하는 메달이 현재의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고 있다.
델핀이 말하는 메달은 삶의 버팀목이다.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존재이자, 우리가 정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징표다. 다시 말해 메달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상징이고, 자기존중의 상징이며, 스스로에게 주는 상인 것이다. 델핀은 이런 의미의 메달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 국제경기의 경우처럼 ‘비공식’ 메달이란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랑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참여를 결정한다. 데스크의 투명한 차단벽 가운데 있는 동그란 창이 눈에 띈다. 조금 전 로랑과 베르트랑은 이 둥근 창을 사이에 두고 언쟁했다.이 창은 ■ 속 ●다. 평소 티에리가 외부를 내다보는 창이었지만 이제 친구들과 함께 꿈을 꾸는 창이 됐다. 비유적으로 이 영화의 전개는 앞으로 이 ■ 속 ●가 커지는 과정이고, ●와 ■가 뒤섞일 때까지 커져가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베르트랑은 새로운 앞날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야말로 점화(點火)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베르트랑의 두 눈동자가 빛나고, 카메라는 한쪽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눈동자는 당연히 ●다.
• 위기
이처럼 싱크로 팀에 하나의 ‘목표’가 들어오면서 규격, 경쟁, 모럴, 즉 ■가 다가온다. 델핀이 수영장 물속으로 침몰(sink)하고, 그 대신 과거에 델핀과 듀엣으로 경기를 하던 아만다가 새 코치로 나서며 긴장이 고조된다. 이전에 싱크로 연습은 유희적이고 ●였으며, 델핀의 인물 성격 또한 베를렌의 시를 읽어주고 ‘남성 속 여성’을 이야기하는 ●이었다. 반면 아만다는 ■의 화신이다. 아만다가 산악 지대에서 친구들을 닦달할 때 군대 음악이 깔리는 장면은 델핀의 연습 장면과 대비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발생하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새 목표가 설정되면서 기존의 팀 문화와 갈등(●와 ■의 갈등)이 생기고, 팀에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주어진 일’(■)을 그 자체로 즐김(●)으로써 갈등을 해소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이 상황의 국면 전환을 가져오는 것은 릴케의 편지다. 팀에 다시 합류한 델핀은 시인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여섯 번째 편지를 읽어준다.
“꼭 필요한 것은 고독, 거대한 내면의 고독입니다. 사람들과 유대감이 없다면 사물 쪽으로 접근해보세요. 사물들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여전히 밤이 있고, 나무들 사이로, 대지 위로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당신이 어렸을 때와 똑같은 모습입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 고독한 아이들 속에 다시 살 수 있을 겁니다. 어른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의 품위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번역은 필자가 조금 고쳤다).
편지의 메시지는 ‘당신 내면의 아이를 되살려라, 어른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의 품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어른은 무의미한 경쟁과 욕망 세계를 뜻한다(오프닝 노래가 묘사한 것처럼). 사물, 아이, 고독은 이 어른의 욕망 세계를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며, 인위적인 세계에 대비되는 본연의 자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영화가 루소 철학의 주제로 충만하다고 말한 이유다. 그럼 ■/●, 일/여가가 이처럼 꼬여버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처럼 일/여가를 다시 분리해야 하나? 아니, 이들은 그리 행동하지 않았다. 델핀이 낭송을 마치자 이들이 활기차게 산악 훈련을 하는 모습, 또 각자의 집, 직장, 버스 정거장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연습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습 자체가 좋아서 열심히 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 살아있다는 존재감
로버트 M. 피어시그가 지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1974)는 산행(山行)하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산행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자존심과 상관없이 산행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목적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햇빛도, 나무도 즐기지 못한다.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여기에 없고, 어서 더 높이 오르기만을 바란다. 반면 자존심과 상관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행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존재감에 충만해질 건가를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태도의 문제다. ‘무엇을 성취하느냐’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느냐’에 관한 문제다. 델핀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고 말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목표 달성, 1등 달성의 ‘자존심 만족’을 위해 뛰지 마라. 로랑이 말하던 품위(위엄)에도 연연하지 마라. 그런 허영심보다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존재감, 생명으로 충만한 존재감을 위해 뛰어라.
이런 가운데 ●/■, 일/여가(놀이)의 경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자존심과 존재감은 각각 루소가 말한 이기심(amour propre)와 자애심(自愛心 amour de soi)에 상응한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이뤄지므로 ‘이기심’으로 전개되고 ‘경쟁 관계’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반면 존재감은 자신이 참으로 살아있다는 현재적 충실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아끼는 자애심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자신과 비슷한 ‘동류’와 역지사지할 때 동정심(compassion)으로 확장할 수 있다.
국제대회 참여에 관한 논쟁에서 베르트랑은 로랑이 동정심과 열정(enthusiasm)을 결여했다고 쏘아붙였다. 루소의 관점에서 로랑이 이기심에 갇혀있다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로랑이 품위에 연연하는 것은 당연하다. 품위 또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델핀이 읽어준 릴케의 문장은 이 같은 어른의 틀을 벗어 던지자는 것이고, 싱크로 팀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곧 싱크로 팀이 한 단계 성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트랑도 변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특히 그의 동서이자 직장 고용주인 티보와 벌이는 언쟁은 그가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며 내면적으로 성장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평소 생각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말한다. “아, 통쾌해!”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시몽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하고, 일행과 함께 해돋이를 기다린다. 일출이 시작되자 그는 함성을 지르고, 일행 모두 함성과 함께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 장면은 릴케의 ‘여섯 번째 편지’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앞서 인용된 문장의 바로 앞 문단이다). “그[고독한 개인]가 동트는 아침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세속적 지위는 모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때 세속적 지위는 세상의 평가에 기대는 허영(품위)과 같은 말이고, 그 반대말은 존재감이다. 이 장면은 ‘성공’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함축한다.
• 성공의 의미
진정한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 여부다. 남자 싱크로 경기는 비공식경기이기 때문에 싱크로 팀이 우승한 소식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성공인 이유는 그 대회를 거치며 싱크로 팀과 그들의 가까운 사람들 모두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처럼 성공의 의미를 세상의 평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다. 요컨대 나를 변화시켰으면, 그것은 성공이다.
이때 변화는 자기 존중, 또는 존재감의 상승과 연결되고, 이것이 바로 델핀이 말하던 메달의 의미(“우리 모두에게 메달이 필요해”)다. 시몽과 롤라를 보자. 시몽은 예술가로서 감독을 대변한다. 집 대신 캠핑카에서 잠자고,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급식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꿈에 충실’하다. 평생 히트곡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자신을 표현하는 거지 CD 파는 게 아니니까”라고 말하며 예술적 자유를 추구한다. 롤라는 이런 아빠의 예술적 능력을 불신하고 꿈을 포기하라고 말하지만, 아빠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롤라 : 아빠는 데이비드 보위가 아녜요. 그런 적도 없고, 앞으로도 될 수 없어요. 아빠를 위한 영광이 없다는 걸 모르시는 게 안타까워요.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시몽 :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아.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런데 국제경기에서 시몽은 자신을 25년 동안이나 믿고 따르던 음향·조명 기사인 로디와 함께 훌륭한 음악적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처럼 사람이 각자의 꿈에 충실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공연을 마치자 롤라는 “아빠, 최고예요!”라고 말하며 시몽을 끌어안는다. 영화 결말부 시몽은 롤라가 ‘아주 옛날’(“저 꼬마 때잖아요. 아주 옛날”) 일이라고 폄하했던 모습으로, 어깨 위에 딸을 태우고 걸어간다. 마침내 딸이 아빠의 꿈을 존중한 것이다. 이 모습은 직설적으로 두 사람의 상호 존중과 존재감의 상승을 표현한다.
한편 델핀과 아만다를 보자. 싱크로 경기에서 듀엣이던 두 사람은 아만다의 사고 이후로 각자 다른 삶을 살았다. ‘유리 멘탈’인 델핀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지만, 근본적으로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긍정적 어머니’ 성격이다. 결말부에서 델핀은 바람결에 머리칼을 날리며 출근하는데, 책상 위에는 예전에 듀엣으로 우승한 사진이 놓여있다. 델핀은 사진을 보며 미소 짓는다. 과거를 과거로 존중하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모습을 암시하는 것이다.
반면 ‘멘탈 갑’인 아만다는 차갑게 보이지만 따뜻한 성격이다. 델핀이 좌초하자 그녀 대신 팀을 지도해준다. 근본적으로 융 심리학의 ‘부정적 어머니’ 성격이다. 결말부에서 아만다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수영장 물에 두 발을 담그고, 따뜻한 표정으로 여자 싱크로 팀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만다가 내면의 여성(아니마)을 존중하고 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암시하는 것이다.
• 인생 두 번째 통과 의례
영화는 이처럼 ●/■, 일/여가(놀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다. 또 성공의 기준을 자기 존재감 상승, 자기 존중으로 고쳐 정의하며, 성공을 재해석한다. 영화는 이렇듯 ●/■가 상호 융입하는 상황을 카메라 회전으로 표현한다. 경기를 마치고 관중들의 환호를 받을 때 카메라는 네모난 수영장 전체를 둥글게 회전하며 보여주고, 베르트랑이 집 앞에서 아내와 포옹할 때 카메라는 영화 도입부에서 ■로 묘사했던 집을 둥근 회전으로 녹여버린다. 이제 우리는 영화의 메시지를 두 개의 문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받아들여라: 그래야 고통이 끝난다.’는 것이다. 베르트랑은 처형 동서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핵심은 그들과 자신의 만남이 ‘의도 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에 있다. 개인적인 의도가 없다면 그리 화낼 이유도 없다. “우리 두 사람은 친구로는 절대 안 사귀었을 텐데. 우리 만남은 우연한 사건(accident)이야. 이렇게 만난 게 비극이지.”
만약 처형 동서 관계가 아니었다면 서로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인척 관계로 엮여 서로가 불편하게 됐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통찰이다. 그들이 일부러 나를 괴롭히겠다는 악의를 품고, 특별히 개인적인 의도를 갖고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 통찰로부터 베르트랑은 고통에서 벗어난다. 가령 출근길에 비가 오는 것은 하늘이 우리의 화를 돋우려고 작정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비가 온다고 화낼 이유도 없지 않을까. 이 태도는 고대 스토아 철학과 가깝다. 또 ‘그 무엇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마라!’는 것은 선불교의 원칙 가운데 하나다.
로랑은 국제 경기 참여를 놓고 베르트랑과 언쟁하던 가운데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친구들이 자신을 ‘왕 재수’ 짓(faire chier: ‘짜증나게 하다’ ‘깝죽거리다’는 뜻의 저속어)을 하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로랑은 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러자 조금씩 일이 풀려나간다.
또 사업가 마퀴스도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한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리면 일이 돌아가게 만드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그런 능력자는 없다. 결말부 마퀴스는 (아마 처음으로) 몸소 땀 흘려 이룬 성과를 마케팅에 활용하는데, 영화는 그것이 효과를 볼 것이란 암시를 준다. 물론 마퀴스가 마케팅을 목적으로 수영 연습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영화가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나에게 상을 줘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뭔가를 해라.’는 것이다. 스스로 삶을 보상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재인식하고, 재기하는 힘을 준다. 이때 메달은 영화 전체에 걸친 상징이다. 그것은 비공식 경기의 메달이지만, 싱크로 팀을 바꾸고,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바꿨다. 이 글이 ‘DJ 래피’의 책 제목을 따와 ‘세상은 됐고 나를 바꾼다’로 제목을 내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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