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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서스페리아> - '그림자를 마주하다'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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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 '그림자를 마주하다'
2019.5.16(목)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서스페리아>(Suspiria, 2018)는 1977년 독일 베를린의 한 무용학교를 무대로 주인공 수지가 사회, 심리, 신체의 세 지층에서 부정적 과거를 대면하며 겪는 고통과 성장을 그린다. 먼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항들을 살펴보자.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 제작에 영향을 줬던 두 권의 책을 말한다.
하나는 『제3제국의 언어』(LTI: Lingua Tertii Imperii, 1947)다. ‘제3제국’ 즉 나치독일이 정치 이념의 선전선동을 위해 일상 언어를 장악하는 모습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빅토르 클렘페러(Victor Klemperer)다. 영화에서 요제프 클렘페러 박사의 이름은 저자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는 유대인 언어학자이다. 영화와 반대로 독일인 아내 덕분에 살아남았다.
저자의 일기장을 바탕으로 <언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Language Does Not Lie, Stan Neumann 2003)는 다큐 영화가 만들어졌다. 다큐에는 나치가 일상생활 차원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내용과 함께 저자가 일기장을 쓰는 모습의 재연 장면이 여러 차례 있는데, <서스페리아>의 박사가 진료 일지를 적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이 말하는 두 번째 책은 <미네-하나Mine-Haha 또는 소녀들의 신체적 교육에 대하여>(1903)이다. 독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가 지은 이 소설은 무용을 중심으로 음악과 신체 교육에 집중하는 가상의 여학교를 무대로 한다. 학교는 폐쇄적 공간으로 설정되고, 교사들은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려고 학생들을 성(性)적으로 이용하며, 고학년 학생이 저학년을 관리한다. <서스페리아>의 아카데미가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마더의 부활을 위해 학생들을 이용하며, 아카데미 출신 교사들이 학생을 통제하는 점이 비슷하다.
감독이 말한 책은 이처럼 두 권으로 그치지만, 우리는 또 한 권의 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영국 작가 토마스 드퀸시(Thomas De Quincey)가 지은 『심연의 탄식』(Suspiria de Profundis 1845)이다. 작가의 심리적 환상을 그린 산문인데, 책 제목인 ‘탄식’에서 영화 제목이 나왔다. 특히 <레바나와 슬픔의 모후들>(Levana and Our Ladies of Sorrow) 장에서는 ‘슬픔의 모후들’로 불리는 세 자매의 성격과 이름(눈물, 탄식, 어둠)이 소개된다.
• 레바나와 슬픔의 모후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1977)는 이 책의 설정(제목과 세 모후들)을 가져왔다. 거기에다 공동 각본을 맡은 ‘다리아 니콜로디’(Daria Nicolodi)가 중요한 모티브를 덧붙였다. 그것은 다리아의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인데, 할머니가 소녀 시절에 다니던 기숙학교 교사들이 마녀였고, 이들이 학교에서 흑마술(black magic)을 가르쳤다는 괴담이다.
이번 영화는 1977년 <서스페리아>의 무대와 인물 설정을 따른다. 그런 한편 1977년 영화에 비해 책 내용과 좀 더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레바나와 슬픔의 모후들>을 살펴보자. 레바나는 고대 로마 여신이다. 고대 로마인은 갓 태어난 아기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의식을 행하며, 레바나를 호명했다고 한다. 레바나는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상승의 동작과 연관이 있다. 그 이름 자체가 라틴어로 ‘들어 올림’을 뜻하는 레바레(levare)에서 유래했다.
레바나는 이처럼 “신생아에게 최초로 고귀한 지위를 부여하는 자애로운 임무”를 맡았을 뿐 아니라 유아기의 교육도 관장한다. 토마스 드퀸시의 말처럼 교육 또한 인간을 들어 올리는 일이고, 인격을 고양시키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이번 영화는 레바나의 ‘들어 올림’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가져온 것 같다. 블랑쉬가 수지에게 ‘점프’를 교육하고, 이를 통해 수지의 잠재력이 각성되고 새로운 자아로 고양된다는 설정은 레바나의 상징성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레바나가 아이들을 수호하는 여신인 만큼 슬픔의 모후들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토마스 드퀸시는 구체적으로 “슬픔으로 말미암아 죽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레바나는 슬픔의 힘을 얼마나 경외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슬픔의 모후들 가운데 광기, 분노, 절규 대신 절망과 웅얼거림으로 상징되는 ‘탄식의 모후’(Mater Suspiriorum)를 묘사한다.
“이 자매[탄식의 모후]는 찾아간다. 천민Pariah, 유태인, …노예, 외딴 노퍽 섬에 수감되어 머나먼 고향의 호적에서 말소된 영국인 범죄자의 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참회하는 자의 곁으로. 한 외로운 무덤을 향해 끊임없이 눈길을 돌리지만, 그 무덤은 과거에 피의 제물이 바쳐진 제단의 잔해처럼 보이며, 이제 그 제단에선… 용서를 위해서건… 배상을 위해서건 그 어떤 봉헌도 무용해진 탓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의 곁으로 찾아간다.”(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은 클렘페러 박사를 떠올리게 한다. 나치독일에서 유대인은 ‘불가촉천민’ ‘노예’였고, 전후의 박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참회하는 자’였다. 또 ‘외로운 무덤’은 박사가 아내를 추억하며 찾아가는 동베를린의 작은 집을 연상하게 한다. 그 집은 유대인 학살과 연관해 ‘피의 제물이 바쳐진 제단’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용서를 위해서건 배상을 위해서건 그 어떤 봉헌도 무용해진’ 곳이다. 마침내 라스트신에서 탄식의 모후는 클렘페러 박사를 찾아간다. 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의 곁으로.
• 베를린 vs. 마르코스 무용학교
영화는 1977년 베를린을 무대로 한다. 여기서 마르코스 아카데미는 당시 베를린의 상황을 압축한 성격을 지닌다. 가령 베를린이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된 것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는 독일어 이외에도 네 가지 언어가 들리고, 각각 의미 있는 인물 성격을 맡는다. 또 서베를린이 동독 속에 위치해 ‘육지의 섬’으로 여겨진 것처럼 아카데미도 그야말로 베를린 장벽 앞에 자리 잡았다.
마르코스 아카데미도 한때는 여성과 예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 같다. 새라가 마담 블랑에 대해 “전쟁 때도 무용단을 지켜낸 강인한 분”이고 “나치 독일the Reich이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만 볼 때도 저항”했다고 말하는 것은 마담 블랑의 아카데미가 요새 역할을 했다는 말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아카데미는 한때 소중한 ‘보호소’였지만 현재는 ‘감옥’으로 변질됐다. 우리는 이 ‘변질’이란 관점에서 영화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바더-마인호프, 또는 적군파(RAF)의 형성과 변질을 생각해보자. 적군파는 1968년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백화점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으로 행동을 시작한다.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독일 백화점을 폭발시켰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적군파의 행동에는 분명 공감하기 어렵고, 치기 어린 면이 있다. 또 1970년 바더-마인호프의 탈옥에서 이어지는 은행 강도와 군·경·언론에 대한 테러는 과도했다.
그럼에도, 반(反)제국주의, 반자본주의란 명분만큼은 당시 청년문화의 한 부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72년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대부분이 체포되고, 2세대 적군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달라진다. 2세대는 1세대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이념적 지향이 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그 대신 과격한 테러만 전면에 나서는 상황을 만들었다.
1974년 1세대의 멤버인 마인스가 교도소 안에서 식사를 거부하다 사망하고, 1976년 마인호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2세대의 테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1977년 검찰총장과 금융인을 살해하고, 그해 9월엔 경제인 협회 회장인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10월엔 여객기 루프트한자 181편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아 1세대의 석방을 요구한다. 특히 9월과 10월에 걸쳐 일어난 테러 사건들을 통칭해 ‘독일의 가을’로 부르는데, 영화는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 속 패트리샤와 새라는 적군파의 주장에 다소 동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관점에서 지하에 감금된 패트리샤와 새라가 적군파 1세대를 상징하고, 마더 마르코스는 나치(파시즘)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독일 정부이며, 이에 맞서는 수지는 적군파 신세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등식은 피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적군파에게 마냥 우호적인 눈길을 보내진 않는다. 영화는 적군파의 한계와 부정적인 측면에도 시선을 돌린다.
• 적군파의 한계
영화 도입부, 패트리샤는 시위대를 만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켜본다. 우리는 지켜본다.” 영화 자막에는 나오지 않지만, 시위대는 이 구호를 연이어 외친다. 또 어떤 사람은 “마더 마인호프를 기억한다”고 외친다. 그러지 않아도 아카데미의 마더와 마녀들이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두려워하던 패트리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시위 소리는 박사의 상담실에서도 들린다. 카메라는 『전이의 심리학』에 이어 『프리메이슨의 비밀』이란 책 표지에 그려진 눈을 비춘다. 마침내 패트리샤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시위대, 나치, 아카데미가 공유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감시의 눈과 신비적 우상화이다. 1974년 마인스가 교도소 안에서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하자, 적군파는 고등법원장에게 그 책임을 묻고, 살해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지켜본다”는 목소리는 한갓 구호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감시와 테러를 동반하는 것이다.
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은 “마더 마인호프를 기억한다”고 외친다(자막엔 ‘마인호프를 석방하라’고 했지만, 마인호프는 이미 한 해 전에 죽었다). 이때 ‘마더’란 호칭은 아카데미의 마르코스와 비슷한 양상으로 신비적 우상화가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미스 테너와 마담 블랑의 대화는 마더 호칭을 둘러싼 문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미스 테너 : 마더 Mutter가 원하셨어.
마담 블랑 : 그 호칭은 안 쓰기로 했을 텐데?
마담 블랑은 “정말 마르코스가 세 마더 중 하나라면, 이런 고생도 안 했어”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이 말은 마인호프의 딸인 베티나 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신문 인터뷰(B.Z. 2018. 5. 13.)에서 베티나는 “엄마는 모성 본능이 없었다”고 말했다. ‘마더’가 아니란 이야기다. 마인호프가 정말 모성애를 지닌 엄마였다면, 1970년 ‘언더’로 들어갈 때 당시 7세인 딸을 혁명전사로 기르겠다며 팔레스타인 고아원에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1976년 하필이면 ‘어머니의 날’에 자살하진 않았을 거라고 했다.
영화는 소설가 하인리히 뵐과 영화감독 파스빈더와 비슷하게 ‘기우뚱한 균형’의 관점을 취하는 듯하다. 적군파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정부와 적군파의 폭력을 함께 비판한다는 말이다. 뵐은 1974년 적군파의 고법원장 살해와 1977년 인질 납치를 두고, 생명으로 흥정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호소했다. 그런 한편 소설 <배려 깊은 포위>(Fürsorgliche Belagerung 1979)에서 감시가 시민 모두의 삶을 황폐화하는 모습을 그리며, 독일이 경찰국가로 되는 것을 경계했다.
영화 <가을의 독일>(1978)에서 파스빈더 감독 또한 적군파와 정부의 테러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호소한다. 감독은 ‘독일의 가을’의 와중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서스페리아>에서 패트리샤의 공황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또 감독의 아내였고, 그의 영화에 다수 출연한 배우 잉그리트 카벤이 <서스페리아>에서 아카데미 교사인 미스 펜데가스트로 캐스팅된 것은 감독에 대한 오마쥬로 봐도 좋을 것 같다.
• 선함의 변질
영화는 원래의 선함이 변질되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도처에 독선의 위험이 도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라는 적군파에게 납치된 슐라이어가 나치 친위대(SS) 출신이란 사실을 말한다. 실제 나치 협력자들의 상당수가 전쟁 이후 독일 사회에서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 점에서 적군파와 정부의 갈등에는 과거 역사와 연관된 세대 갈등의 성격도 있다. 달리 말해 적군파는 독일 정부가 은폐하고 싶은 과거의 그늘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런데 적군파 또한 온전하지 못하다. 적군파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나치와 닮았다. 영화에 묘사되진 않았지만, 적군파의 인간·여성관에는 문제가 있다. 조직의 수장인 바더는 ‘여성은 보지(Votzen)’라고 공언했다. 심지어 적군파 동지 여성들도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 마인호프는 경찰과 ‘제복 입은 사람’은 모두 돼지다, 인간이 아니다, 당연히 총으로 쏴도 된다고 선언했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을 대하듯 마구 죽이라고 설파한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고,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적군파는 과거에 나치가 유대인을 돼지와 동일시하던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독일 정부와 적군파는 나치의 쌍생아란 비난을 받을 만하다. 서로는 서로의 그림자란 말이다. 한편 아카데미 마녀들은 마르코스를 지도자로 재선임하며 외친다. “마르코스 만세!”(Lang lebe Markos!) 이 표현은 ‘하일 히틀러’와 다르지 않다. 여성과 예술을 돌보던 아카데미가 광기의 공간이 된 것이다.
수지가 자라난 집도 비슷하다. 현대문명의 부정적 환경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려던 애미쉬 교파는 어느새 독선에 빠진 듯하다. 수지가 옷장 속에서 자위행위를 하다 엄마에게 들키고 가혹한 처벌을 받는 장면은 ‘어머니의 집’ 또한 광기와 감시의 공간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수지의 꿈에 나오는 구더기는 변질과 죽음의 상징이 아닐까. 엄마 역을 맡은 배우가 후반부 ‘무터하우스’(어머니의 집)의 마녀 의식에서 사신(死神) 역을 맡은 것은 엄마의 선함이 독선에 빠질 때 ‘마더=압제자=죽음=죽임’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클렘페러 박사도 단순히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정신분석가의 독선을 묘사한다. 패트리샤가 고통을 호소할 때 박사는 진료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의 망상은 공황으로 발전했고, 자신이 만든 괴담 mythology을 사실로 믿는다.” 영화 후반부 미스 훌러는 박사에게 외친다. “여자들이 진실을 말할 땐, 듣지도(동정하지도) 않았지. 망상이라고 매도해버렸어.” 클렘페러 박사도 독선에 빠진 것이다.
정신분석의 특성상 환자와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박사가 자신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그런 태도를 견지한 것은 문제다. 그것은 현실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사는 정신분석가의 직업윤리인 ‘거리 두기’를 자신의 무능함 또는 비겁함에 대한 변명거리로 삼았을지 모른다. 자신이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방패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 심리학적 구성
이처럼 영화는 선함이 변질되고 독선에 빠지는 양상을 다양한 지층(정부, 적군파, 가족, 정신분석)에서 그린다. 여기에 주인공의 역할이 설정된다. 그것은 이 일면적이고 편향된 지층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 인물 성격이 심리학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가령 틸다 스윈튼은 마르코스, 마담 블랑, 클렘페러 박사 역을 맡았다. 이들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각각 무의식(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에 상응한다.
이 가운데 마르코스는 자신의 부활을 위해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인물로 무의식을 대표하고, 본능·충동의 영역에 해당하는 성격이다(본능·충동은 쾌락을 즉시 충족하려 들며,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다). 마르코스가 지하에서 활동하고, 무터하우스가 건물 지하에 있다는 설정, 또 마르코스가 연습실 아래에서 수지의 신체를 느끼는 장면은 인물의 심리적 특성을 공간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적어도 <서스페리아>에 관해서는 칼 융의 심리학이 좀 더 포괄적인 관점을 주는 듯하다. 집단 무의식 ‘원형’의 관점에서 마담 블랑은 ‘어머니’ 원형과 그 긍정적 이미지인 ‘여신’에 상응하고, 수지는 ‘어린아이’이며, 박사는 ‘늙은 현자’, 그리고 마녀들은 ‘트릭스터’다(마녀는 경찰과 박사를 속인다). 칼 융은 수많은 원형 가운데 네 가지 원형이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본다. 그것은 페르소나, 자기(Self), 아니마/아니무스, 그림자이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외면, 즉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페르소나(=마스크)라면, 그림자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감추는 우리 성품의 어두운 측면이다. 달리 말해 그림자는 페르소나에 대항하는 힘이며, 페르소나 뒷면에 숨겨진 존재다. 이제 주인공 수지는 진정한 자기로 거듭나기 위해 다른 원형들(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에 의해 재현되는 자신의 다른 부분들과 대면하고 자기 속으로 통합해야 한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수지의 진정한 자기가 영웅적인 어머니, ‘탄식의 모후’로 통합되어 간다는 것을 안다. 또 그녀에게는 어머니의 감시와 처벌에 연관된 ‘그림자 과거’가 있는 한편, 자신과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며 ‘부정적인 어머니’ 역할을 하는 ‘나쁜 마녀’(마더 마르코스)가 있으며, 그런 반면 자신을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위로하고 양육하며 고양시키는 ‘성스러운 어머니’ 역할을 하는 ‘좋은 마녀’(마담 블랑)가 있다는 것을 안다.
• 어머니-그림자의 통합
어째서 수지가 이 부분들을 대면하고 통합해야 하냐고? 마르코스와 블랑을 생각해보자. 두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상호 보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블랑이 마르코스처럼 강한 힘을 지녔다면 마르코스를 물리치며, 새로운 아카데미와 예술을 창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온순한 시골소녀였던 수지가 자기 속에 폭력을 통합하고, 폭력적으로 변해야 하는 이유다. 사이코 마녀를 처치하고, 자신과 친구들과 예술을 지키기 위해 수지는 자기 마음속의 폭력적인 부분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수지의 폭력적인 부분은 어머니와 연관된 심리적 외상에 잠재했다. 수지는 거기서 폭력성을 끌어올렸다. 영화는 이 심리적 통합에 대해 과거의 어머니가 사신으로 나타나 마르코스 일당을 처치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감독은 이때 힌두교 칼리 여신을 생각했다고 밝혔는데, 칼리는 파괴와 창조의 양면을 지닌 여신이다. 칼 융의 제자인 에리히 노이만은 『위대한 어머니: 원형 분석』(1955)에서 칼리를 ‘무서운 어머니’로 분류했다.
노이만의 책은 <서스페리아>의 관객에게 흥미로운 관점을 준다. 책은 세 종류의 대립 쌍(‘좋은 어머니/무서운 어머니’ ‘영적 변화/부정적 변화’ ‘긍정적 아니마/부정적 아니마’)으로 이뤄진 여섯 가지의 어머니 원형을 제시했고, 이 원형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원환’(Great Round)을 이룬다고 말한다. 융 심리학에서 대립 쌍은 균형을 이룬다. 부정적 원형은 긍정적 원형의 어두운 면, 즉 그림자이지만,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 속에 대립 쌍을 지닌 ‘자웅동체’ 어머니, 또는 여러 가지 원형을 모두 아우르는 어머니가 태어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은 수지의 각성과 연관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 속 어머니가 여신과 마녀 양자 모두의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걸 안다. 자녀에게 헌신적인 어머니가 늘 좋은 인물인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하게 사악한 인물도 아니다. 이 관점에서 마녀 의식 장면을 보자.
수지 : 넌 누구에게 기름부음 받았지? 세 마더 중 누구에게?
마르코스 : 탄식의 모후…
수지 : 내가 그녀다(I am she).
어머니-사신의 손을 빌려 사악한 마녀들을 처치하는 가운데 수지는 두 손으로 가슴을 열어 심장을 내보이며, 법열에 가득 찬 얼굴과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는 유일한 어머니”(I am the Mother)라고 말한다. 수지가 나머지 여자들 사이로 다가가자 그동안 경련에 가까운 몸짓을 계속하던 여자들은 그녀를 가운데에 두고 원환을 이루며 춤을 춘다.
이 일련의 장면은 수지가 자신의 다른 부분들을 자기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꿈속에서 “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외치는 장면이 실현되는 ‘자기이해’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통합과 자기이해는 함께 간다. 자기이해는 현재의 부분적 자신(페르소나, 가면)을 넘어, 전체로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꿈 장면은 무의식에서 그녀가 가면을 벗고 ‘전체’가 되려 하고, 그 전체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수지는 마침내 ‘나는 유일한 어머니’란 결론에 이른다. 유일한 어머니란 뭘까. 그녀는 마르코스의 힘과 폭력성, 블랑의 지혜와 예술성, 또 블랑의 미학을 넘어서는 여성적 미학, 그리고 미스 테너를 살려주고, 캐롤라인에게 점프 능력을 되돌려주며, 클렘페러 박사를 배려하는 모성적 포용성을 모두 아우른다. 그녀의 성격은 오프닝 크레디트의 문구와 공명한다.
“어머니는 그 누구의 자리도 대신할 수 있으나 그녀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수지는 유일하다. 여러 종류의 어머니 가운데 ‘가장 우월한 하나’ ‘진정한 하나’라기보다는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 ‘통합적 하나’란 뜻에서 대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통합을 상징하는 도상은 원이다. 여자 무용수들은 그녀를 중심에 놓고 둥글게 원을 이루며 춤을 춘다. 수지도 그들과 함께 춤을 춘다.
• 여성 영웅의 여정
수지의 종합적 성격은 자신의 어머니도, 마르코스도, 블랑도, 적군파도 넘어선다. 이들에겐 없는 것, 새로운 여성 정체성과 어머니 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도 알지 못한 길을 걸어간다. 일면적이고 편향된 입장을 통합, 극복하는 그 길은 신화적 여성 영웅의 여정이라 할 만하다. 모린 머독은 『여성 영웅의 여정』(1990)에서 여성 영웅의 신화적 구조가 남성 영웅 신화보다 내면적 여정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서스페리아>도 그렇다.
신화 속 남성 영웅이 공동체를 지키려고 원정을 떠난다면, 여성 영웅은 수지가 아카데미를 바꾸는 것처럼 공동체 변혁을 위한 내적 여정의 과정을 겪는다. 또 남성 영웅이 그 원정으로 보물이나 명예를 얻는다면, 여성 영웅은 수지처럼 자기 정체성을 자각·실현한다. 머독은 자기 정체성 문제에 관해 여성 영웅 내면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온전히 성숙한 여성 영웅은 끝내 양성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융 심리학에서 아니마/아니무스가 통합되는 과정과 같다(아니마는 남자 속 여성이고, 아니무스는 여자 속 남성이다).
<서스페리아>에는 ‘점프’가 매개 역할을 하는 듯하다. 블랑은 수지에게 점프 능력을 길러주려 한다. 처음에 수지는 점프를 거부한다. 그런데 연습실 아래에서 마르코스가 손을 내밀어 수지의 신체를 느끼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수지가 점프를 거부하는 것이 ‘하강’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하강은 수지를 아래로 잡아끌고 수동적 상태에 묶어두는 힘에 순응하고, 억압적 어머니, ‘부정적 어머니’의 그림자와 동화되는 것이다.
마담 블랑 : 점프를 싫어하는 것 같아. 땅에 붙어있는 게 그렇게 좋아?
수지 : 지금은 바닥의 일부가 되고 싶은 거예요
반면 점프는 남성적이다. 그것은 수지가 기존의 여성에서 분리되고, 지하의 마르코스에서 벗어나며, 중력을 이기고 자신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동작이다. 이때 블랑은 수지에게 점프를 선사하는 여신이다. 융 심리학에서 여신은 긍정적 어머니, 성스러운 어머니의 재현이다. 특히 이 경우에 블랑은 레바나 여신과 같다. 레바나는 ‘들어 올림’ ‘교육’ ‘고양’이기 때문이(이 점에서 블랑과 수지가 함께 있는 장면은 <레바나와 슬픔의 모후>를 재현한다).
“위를 향해 겨눠야 해” “널 떠오르게 해야 한다는 거지”(We need to get you in the air) “공중에서 머물러” “공간을 만들어”. 점프는 소극적 저항을 넘어, 새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부정적 어머니, 여성에서 벗어나는 대피소이자, 수지 자신의 공간이다.
“네 몸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해… 점프에선 높이가 아니라 밑 공간(the space beneath you)이 중요한 거야.”
‘몸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에는 사악한 마법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있다. 블랑은 새 작품에 대해 말한다. “부활에 관한 작품. 재탄생이 던지는 불가피한 유혹(pull 당김)과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노력.” 점프는 그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또 동작도 하나의 언어, 시, 기도문, 주문이라면, 점프도 주문이 될 수 있다. 마르코스는 공연 중에 수지의 몸으로 부활하려 했지만, 수지가 점프를 하자 사라의 마법이 풀리며 공연이 중단된다. 마르코스를 멈춘 것은 수지의 점프였다. 이제 블랑이 가르친 점프의 비밀이 밝혀진다. 점프는 마법을 깨뜨리는 주문이었다.
• 새로운 미학
이처럼 수지가 점프하는 모습은 꿈속에서 수지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과 공명한다. 수지가 자기 정체성을 자각·실현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란 뜻이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단계가 더 남았다. 그것은 수지가 내면의 여성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야 머독의 말처럼 여성 영웅이 양성의 심리적 균형과 전일성의 감각을 찾을 수 있다.
이 단계를 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블랑은 안무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지에게 말한다. “네가 알 리가 없지. 40년 전에 이 작품을 만들 때 우리가 어떤 삶을 겪고 있었는지. 우린 큰 대가를 치르며 균형의 가치를 배웠어.” 블랑이 말하는 ‘40년 전’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여기엔 춤 예술의 젠더 문제가 있다. 1937년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말했다.
“춤은 즐거워야 하고,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표현하며, 철학과 무관해야 한다.”
그러니까 블랑은 그 반대쪽으로 움직여 균형을 맞추고, 예술로서의 춤을 지키려 한 것이다. 블랑이 “춤에서 빼야 할 두 가지가 있지. 아름다움과 즐거움. 오늘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깨부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 생각은 실제 현대무용의 역사에 상응한다. 20세기 초 1세대는 이상적인 미를 추구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미국 중심으로 발전한 2세대는 ‘추’의 미학을 내건다. 그리고 현대무용은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선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패트리샤의 말처럼 “전쟁 이후 지하로 숨어버린” 것이다.
블랑의 모습은 피나 바우쉬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미학은 2세대에 부합한다. 독일 2세대를 대표하는 마리 비그만이 전형적 여성미와 거리가 먼 ‘마녀 춤’(Hexentanz)을 춘 것처럼 블랑은 춤에 부과된 작위적인 여성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것은 일견 남성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 지향성은 나치 미학의 대척점에 있다. 한편 1973년 피나 바우쉬가 부퍼탈 무용단을 이끌고 독일 현대무용을 부활시킨 것을 생각하면, 수지와 활동 연대가 비슷하다.
수지는 블랑의 미학에 머물지 않는다. 수지가 내면의 여성과 재결합하는 과정은 마녀 의식에서 완성된다. 수지는 성숙한 여성미를 보여주는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과거의 여학생 분위기에서 벗어난다. 이것은 앞 단계에서 스스로 분리시킨 여성적 요소와 재결합하는 것을 암시한다. 수지는 이난나 여신과 페르세포네 같은 여성 영웅이 지하 세계로 하강한 것처럼 어둠으로 하강한다. 무터하우스의 벽에는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커튼을 세 갈래로 늘어뜨렸는데, 슬픔의 모후가 세 자매인 것과 연관이 있다.
무용수들은 역삼각형 대열로 서있다(마법 세계관에서 정삼각형은 남성을 상징하고, 역삼각형은 여성을 상징한다). 그 외에도 삼각형 구성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겹쳐지는 구성은 하늘/땅, 남성/여성의 결합과 성적 생산을 상징한다. 무용수 일부는 의자에 앉아 희생자들의 창자를 주무르고, 나머지 무용수들은 꿇어앉은 자세로 격렬한 춤을 춘다. 이것은 출산 행위를 상징한다(전통적인 출산은 의자에 앉거나 꿇어앉은 자세로 이뤄진다).
• “아름답구나”
마르코스가 외친다. “이건 허영(vanity)이 아니야. 이건 예술이 아니야!” 마르코스는 예술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마녀 의식을 진정한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예술을 종교나 현실(역사)의 하위 영역으로 여기는 것은 전통 종교와 철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관점이다. 하지만 블랑은 다르다. 블랑은 춤 동작 하나하나가 ‘에너지를 띤 형상’이며, 이 형상들의 연쇄가 공중에 기록된다고 했다. 예술이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예술이 곧 현실이란 말이다.
수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 사신의 남성적 폭력을 끌어내 마녀들을 처치하는 가운데, 수지는 두 손으로 가슴을 열어 심장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가톨릭의 ‘성모 성심’(Immaculate Heart of Mary)을 세속화한 모습으로 보인다. 성모 성심이 어머니로서 여성의 비애와 비통과 은총을 나타내는 것처럼 수지 또한 어머니 여성의 비애와 기쁨을 느끼는 듯하다. 수지는 마녀에게 희생된 친구들에게 다가가 이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껴안는다. “어머니, 어머니, 저는 지쳤어요.” “착한 아이구나.”
수지는 이처럼 여성적 요소와 재결합한다. 그녀는 여자 무용수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며 말한다. “그래 춤춰라. 계속 추어라. 아름답구나. 아름답구나.” 블랑이 춤에서 배제한 아름다움의 요소를 복권시킨 것이다. 무용수들은 그녀를 가운데에 두고 춤을 춘다. 이때 수지의 춤 동작을 자세히 묘사해보자.
수지는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제자리에서 몇 차례 회전한다. 그리고 마리 비그만의 ‘마녀 춤’처럼 고개를 숙이며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팔꿈치를 90도로 꺾어 두 손끝을 바닥 쪽으로 내린다. 그리고는 두 팔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고 위를 쳐다본 다음, 두 팔을 수직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바람결에 나무가 흔들리듯 두 팔을 좌우로 흔든다. 이렇게 해서 마녀 춤의 추함과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통합한 것이다. 무용수들은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 상처받은 아니무스의 치유
‘숙청의 밤’에서 살아남은 박사는 이날 새벽 아카데미를 나온다. 거리는 흰 눈으로 덮여 있다. 영화 도입부에 장대비가 내리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를 배웅하는 마녀는 “모든 것이 아름답네요.”(Everything is pretty)라고 말하며, 새로운 미학의 시대를 암시한다. 그리고 박사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이제 악몽은 끝났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전날 밤의 기억을 잊은 채 연습실로 모여들고, 한때 점프 능력을 뺏겼던 캐롤라인은 힘차게 도약을 한다.
그리고 박사가 침상에 앉아 아내의 추억이 담긴 노트를 펼쳐들 때 수지가 방으로 들어온다. 수지는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준다. 아내는 1943년 11월 11일에 죽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무용 공연이 열린 날이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반복을 의미한다. 그날 아카데미 학생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 앙카는 나치가 파놓은 올가미에 걸려 죽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또 수지는 아내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떠올렸는지를 박사에게 알려준다. 박사가 흐느끼자 수지는 박사의 볼을 어루만지며, 선물을 준다. “너와 관련된 모든 여자(Of all the women of your undoing)의 기억, 모든 기억이 사라지리라.” 여기서 자막은 ‘너와 관련된 모든 여자’라고 했지만, ‘네가 실패한(망친) 모든 여자’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박사가 그저 지켜보고 관찰할 뿐, 개입하지 않았던 여자 환자들, 어쩌면 박사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던 여자들을 가리킨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박사의 방관 때문에 수포로 돌아 가버린 여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지는 박사를 용서한다. 상처 받은 아니무스, 무능한 아버지를 용서한다. 이것은 여성 영웅의 마지막 업적이다.
영화는 이처럼 1977년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모두가 각자의 그림자를 회피하는 모습을 그리고,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집단들을 묘사하며, 끝내 사회적 통합에 실패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는 판타지 형식을 통해 새로운 어머니 상, 또는 여신이자 마녀인 여성상을 그 대안의 실마리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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