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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 - ‘글쓰는 기계와 인간의 내밀한 동맹’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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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 - ‘글쓰는 기계와 인간의 내밀한 동맹’
2019.08.09(그) 19시 영화의전당 소극장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더그 니콜 Doug Nichol 감독, 2016)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서사 전개는 두 인물이 형성하는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켄(Ken Alexander)이다. 타자기가 곧 인생이고, 삶에서 일이 중심인 인물이다. 지난 20년 동안 일한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가 폐점될 위기를 맞으며, 타자기 인생 최대의 고비에 빠진다.
또 하나는 마틴 하워드이다. ‘과거와 접속’에 꽂힌 인물이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며, 지난 22년 동안 1880년대, 1890년대의 타자기를 수집했다. 콜렉터 입장에선 미국 최초 타자기인 ‘숄즈& 글리드’가 마지막 빈 곳이다. 하지만 이 타자기를 매입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며, 정신적 위기에 빠진다. 이제 켄과 마틴은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날 건가.
두 사람은 저마다 지혜롭게 고비를 넘긴다. 켄은 역설적으로 타자기를 위기에 빠뜨린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해 가게를 홍보하고, 판매 상품 목록을 올리며, 온라인 판매를 병행한다. 말하자면 구시대의 기술을 구하려고 지금 시대의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 한편 오프라인에서 친목 행사를 마련한다. ‘타이프 인’(Type-In)은 ‘타자로 입력하다’란 뜻이지만, 타자기 애호가들이 가게에 모여 생각과 정보를 나누는 행사에 이 이름을 붙였다. 동호회 ‘가입’ 행사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마틴은 ‘숄즈& 글리드’를 직접 소유하는 대신 ‘향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옛날 타자기에 대한 열정을 나누는 게 참 좋아요.” “골동품을 다 가질 순 없겠죠.” 마틴 또한 타자기 애호가 모임에 참석하고, 타자기 문화를 공유하며, 타자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지속해 나간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신시내티의 대학교 철학 교수인 리처드(Richard Polt)는 ‘타자기 혁명’이란 문건을 통해 옛 기술인 타자기가 지닌 적극적 가치를 선언하고, 알린다. 타자기 애호를 문화운동으로, 대안(또는 대항) 문화운동으로 드높인 것이다. 또 타자기 부품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제레미(Jeremy Mayer)는 가게의 온라인 홍보를 제안하고, 홈페이지 제작을 도와준다. 가게가 새 시대에 맞게 진화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처럼 위기를 극복하는 가운데 가게는 각자 다른 이유로 타자기를 사랑하고, 타자기의 대안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연결점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가 다양한 타자기 애호가의 ‘링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같은 내용을 담았다. 예술가 세 명의 ‘타자기 파괴’ 퍼포먼스를 사진과 텍스트로 담은 『로열 로드 테스트』(Royal Road Test, 1966)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영화의 처음과 끝에 배치한 것은 대런 워쉴러(Darren Wershler)의 저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 속 내레이터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대런은 캐나다 퀘벡의 시인이자 미디어 연구자다. 대런은 타자기의 역사에 관한 책 『강철의 변덕 : 타자의 파편적 역사』(The Iron Whim: A Fragmented History of Typewriting, 2005)를 썼는데,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C h a p t e r 1
Conclusion:
Royal Road Test
“제1장, 결론: 로열 로드 테스트.” 시작이 결론이란 이야기다. ‘로열 로드 테스트’는 가수인 메이슨 윌리엄스(Mason Williams)와 미술·사진가인 에드 러샤(Edward Ruscha)의 퍼포먼스이자, 그 기록이다. 제목을 끊어 읽는 방식에 따라 언어유희가 일어난다. ‘로열’은 이 퍼포먼스에 사용한 타자기 브랜드이지만 ‘로열로드’는 왕도, 지름길을 뜻한다. 또 일반적으로 ‘로드테스트’는 자동차의 주행 테스트, 도로주행 시험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로열 타자기의 도로 성능 시험’을 말한다.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타자기를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도로 성능 시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이 사건을 수사했다면 사고였을까요, 살해였을까요?” 메이슨의 물음처럼 ‘로열 로드 테스트’는 사건 수사의 뉘앙스를 풍긴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이 퍼포먼스 이야기를 처음과 끝에 배치하며, 영화 전체에 타자기 사건의 현장수사라는 문제의식을 설정한다. 타자기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 누가 죽였는지. 다만 영화가 그리는 ‘타자기 사건’은 로열 로드 테스트 당시처럼 타자기가 주류 매체였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타자기가 사라져가는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말한다. 메이슨은 『로열 로드 테스트』에 담았던 문장을 읽어준다.
“그것은 자멸의 씨앗을 제 안에 품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비명을 지르는 일 외에 뭐라도 해보려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어쩌면 영화 속 등장인물의 생각, 언어, 활동은 모두 타자기의 소멸에 저항하는 ‘비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비명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먼저 메이슨과 에드의 퍼포먼스처럼 타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의 예술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 메타(meta)적 관점
메이슨은 위의 문장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온 다다이즘의 정의 중 마지막 부분”이라고 말한다(사실 여부는 논외로 하자). 다다이즘의 특징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모두 부정하고 조롱하는 데 있다. 이 관점에서 메이슨 일행의 퍼포먼스가 다다이즘과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66년 당시 타자기는 기존체제를 대표하는 기록 매체였으니까 말이다. 이때 타자기의 파괴는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과 연결된다.
주목할 것은 메이슨 일행이 타자기를 예술화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타자기를 메타적 관점에서 예술화했다. 타자기의 주된 용도인 글쓰기의 관점이 아니라, 시간의 지평에 놓여 있는 한 존재로서의 타자기를 바라보는 관점, 즉 ‘생명체로서의 기술적 존재’란 관점에서 타자기의 죽음을 추적하며, 예술화했다. 이것은 기록 매체라는 기존의 본질을 넘어(meta-), 대상의 상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면에서 메타적 시선이다.
예술가는 메타적 시각에 뛰어난 경우가 많다.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듣는 예술가가 그런 사람들이다. 기술적 존재의 경우, 이런 상위 인지(meta-cognition)가 폭넓게 일어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한 기술이 새 기술로 대체됐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과거의 기술적 존재를 미적으로 향유한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맥루언은 이에 대해 “과거의 (미디어) 기술은 새 예술형식이 된다”고 정의했다. 새 차원(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쇠퇴한 기술은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니라 재구성되고, 용도 변경되는 것이다.
‘보스턴 타자기 오케스트라’(BTO)는 타자기를 음악적 매체로 사용하며 행위예술, 코미디, 풍자를 결합한다. 여기서 타자기는 또 다른 용도로 예술화된다. 그들의 말처럼 “악기”로, “또 다른 목적으로”(repurposing) 바뀌는 것이다. 이들은 공연 끝에 타자기를 부순다. 그야말로 스스로의 음악적 성과를 파괴하는 행위다. 끝없는 자기혁신을 알린다고 할까. 공연의 토대인 타자기를 없애며, 공연의 일회성을 확보한다. ‘예술 행위는 단 한 번만 실연돼야’ 한다는 해프닝 예술운동 규칙을 떠올리게 한다. BTO는 “피트 타운젠드(Pete Townshend)”가 스스로 기타를 부술 때처럼 타자기를 예술적 대상으로, 인격체로 여긴다고 말한다.
한편 제레미는 오직 타자기 부품들만 사용해 실물대(life-scale)로,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간과 동물 형상을 만든다. 납땜, 용접, 접착을 하지 않고 타자기 부품들을 연결, 조립한다. 그는 “프랙탈”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타자기를 소우주로 여긴다는 것을 말해준다. 타자기가 모든 형상을 다 갖췄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타자기의 요소를 재조합하면 또 다른 존재(소우주)를 얼마든지 재창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세상의 존재가 일정한 요소들의 재조합으로 이뤄진다고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런 발상을 르네상스 후기의 ‘마니에리즘’에서 찾을 수 있다. 좁은 뜻에서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었던 예술 사조로 사물을 부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경향을 말한다. 반면, 넓은 뜻에서 마니에리즘은 사고방식에 관한 것으로 변형, 순열, 배치, 결합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뜻에서 마니에리즘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처럼 조합술(ars combinatoria)을 이용해 소우주를 (재)구성하려 한다. 제레미의 작업도 비슷하다. 그는 기술적 대상의 세계를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한다. 기술적 대상을 메타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타자기의 본래 용도에 집착하는 대신 그것을 다양한 형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 순수한 사용, 촉각
이처럼 영화는 타자기의 또 다른 사용, 즉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사용하는 메타적 시선을 보여주는 한편, 그 외의 인물들이 타자기의 순수한 사용을 통해 예술적 향유와 창조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타자기의 순수한 사용은 아날로그적인 것이다. 영화에는 ‘아날로그 세계’ ‘아날로그 삶’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기계 없이 사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날로그 기계와 함께하는 삶’을 말한다.
1942년 철학자 하이데거는 손 글씨를 옹호하며, 타자기가 “도구와 기계의 중간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올바른 분석이다. 타자기는 인간이 없이도 작동하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타자기는 손 글씨와 컴퓨터 사이의 중간물이다. 이 점에서 타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날로그 기계와 생명체의 혼종’ 상황을 경험한다. 이 경험에서 두드러지는 감각은 촉각이다. 손 글씨가 시각에 종속되는 것(손으로 글을 쓸 때는 눈으로 글씨를 봐야 한다)에 비해 타자기는 촉각 중심이다. 초창기 타자기 상당수는 맹인을 위해 제작됐다. 프랑수아-피에르 푸코처럼 맹인이 직접 설계한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도 정확하게 타자를 칠 수 있다. 1882년 시력을 잃어가던 철학자 니체가 말링 한센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다. 니체 스스로 “글쓰기 도구는 사고 작용에 참여”한다고 밝힌 것처럼 타자기는 니체를 간결한 문체의 작가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니체가 “논증에서 아포리즘으로, 사유에서 단어 유희로, 수사에서 전보 문체로” 옮겨간 것이 타자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말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거나 타자기가 촉각 중심이란 사실은 손 글씨에 비해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타짜>의 대사처럼 말이다.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실천한 ‘자동기술’에 적합한 매체는 타자기였다.
• 직관과 즉흥성
이 관점에서 영화 속 대런이 타자기와 함께 발생하는 영감을 이야기하는 것은 흥미롭다. 대런은 “기계를 통해 글이 내게 오는 느낌”을 이야기한다. 또 타자기가 “사고 작용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타자기는 중세의 음유시인, 즉흥시인을 부활시킨다. 시인 실비는 대부분의 경우 “제가 [시詩를] 쓰는 게 아닌 듯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시詩를 말로 하라면 못할 텐데 타자기로는 쓴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타자기 이야기』(2002)에서 화가 샘 메서는 소설가 폴 오스터의 손가락과 타자기가 흰 실로 연결된 그림을 그리며, 폴을 타자기의 마리오네트처럼 묘사했다. 소설가의 영감이 타자기로부터 나온다는 걸 그린 것이다. 한편 싱어 송 라이터인 존 메이어는 창작 과정이 “다 의식의 흐름”인데, 타자기가 의식의 흐름을 함께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손 글씨는 느리기 때문에, 또 컴퓨터는 맞춤법 교정 같은 편집 기능 때문에 의식의 흐름을 끊는다는 것이다. 리처드의 ‘타자기 혁명’ 장면에서 “타자 무기”(weapons of writing)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타자기 사용에서 나타나는 직관과 즉흥성, 그리고 속도에 연관된 것이다(“타자 무기를 들고 나와… 씁시다. 모든 단어가 소중한 듯 칩시다”). 미국 최초의 타자기가 총기 제작사인 레밍턴에 의해 상용화됐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의식의 흐름에 맞춰 즉각적인 글쓰기를 실현하는 기계는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탄환을 발사시키는 기술을 갖춘 총기 제작공장에서 생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20년대 ‘시카고 타자기’가 ‘톰슨 기관단총’을 의미하고, 고다르 감독이 <영화의 역사>에서 타자기 소리로 기관단총 효과음을 의도하며, ‘보스턴 타자기 오케스트라’의 “이 기계는 파시스트를 죽인다”는 문구는 또한 타자기 사용자의 사고, 손가락, 글쓰기의 즉각적인 연결이 탄환 발사라는 비유로 연결된 것이다. 게다가 톰 행크스의 말처럼 타자기가 지니는 촉각, 소리, 물질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글쓰기의 탈성화(脫性化)
이 대목에서 우리는 피아노를 떠올리게 된다. 타자기 자판의 아이디어는 피아노 건반에서 도출됐다. 영화 속 ‘숄즈& 글리드’ 제품의 광고 이미지는 명백하게 피아노 연주의 인상을 준다. 영화가 피아노 연주곡을 많이 포함하는 것 또한 타자기와 피아노의 연관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타자기가 보급되자 여자 타자수가 급속하게 늘어난 데에는 여자들이 피아노 연습으로 터득한 손가락의 숙련이 타자기 사용에 큰 도움이 됐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때 타자기는 단지 여성이 산업사회에 참여하는 비율을 높였을 뿐 아니라, 글쓰기의 젠더 지형을 바꿨다. 전통 사회에서 문서 처리는 남성의 특권이었다.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시인, 비서, 식자공은 모두 남자였다. ‘처녀작’이라는 낡은 표현 속에는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처녀, 여성으로 여기고, 글 쓰는 펜을 남성으로 여기는 이분법이 들어있다. ‘텍스트’의 어원은 직물(texture)이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여자가 다룬 것이었지만, 문장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남자가 다룬 것이었다.
하지만 타자기의 보급과 함께 여자 타자수는 베틀처럼 생긴 타자기로 과거에 남자의 전유물인 문장 텍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키틀러는 “타자문서(Typescript)가 글쓰기를 탈성화(desexualization)”했다고 말한다.
• 웨스턴 스타일
영화는 전반적으로 ‘웨스턴 스타일’의 분위기를 띤다. 도입부에 이어 샘 셰퍼드의 집으로 가는 여정과 황량한 도로의 풍경은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특히 Robert Frank,
/u.s.>, 1955) 그리고 도입부 자연 풍경은 ‘캘리포니아 인상파’의 바위와 사막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상당수가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감독인 더그 니콜은 LA 출생이고, 남가주대학(USC)에서 공부했다. 톰 행크스는 대표적인 캘리포니아 사람으로 영화의 무대인 버클리와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콩코드(Concord)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레미 또한 버클리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오클랜드에서 활동한다. ‘로열 로드 테스트’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에드 러샤도 LA에 살고 있다.
실비 앨시바도 20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시 가게’(the Poetry Store)를 운영하고 있다. 켄은 1975년 버클리로 이주한 뒤로 20여 년 간 살고 있다. 허브(Herb Permillion III)은 뉴올리언스의 재즈 음악가 집안 출신인데, 버클리에서 나고 자랐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지역적인 장소를 무대로 지구적인 문화변동을 그리며, 캘리포니아 웨스턴 스타일의 특수한 생활양식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삶의 문제를 담고 있다.
영화는 ‘고독한 노마드’, ‘개척자’와 같은 인물 성격을 표현한다. 샘 셰퍼드는 ‘작가는 혼자다’라는 입장을 보여주며 “아기 때부터 늘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작가로서 내 최고 강점은 혼자란 거예요. 혼자여야 글을 쓸 수 있죠. 괜찮은 글을 쓰는 작가는 다 혼자예요. 전부 다.”라고 말한다. 또 존 메이어가 타자기를 이용하게 된 계기를 회고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존이 몬태나 파라다이스 밸리의 사람 없는 들판에 서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레미는 타자기 애호가들의 반대와 오해를 무릅쓰고 꿋꿋이 작업한다. 오랫동안 산에서 혼자 살았고(“산에서 거의 18년을 살다 3년 전 오클랜드로 왔어요”), 트레일러에서 생활한다. 뭄바이에서 100대의 타자기로 만든 ‘연꽃’(Lotus) 작업을 마무리하며, 끝없이 다른 경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작업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도 있고,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몰라도, 한길로 매진한다. “제가 좋아하는, 원하는 일을 할 거예요. 6개월 후엔 어디 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한다.
• 개인주의
개인주의는 웨스턴 스타일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샘은 ”우리 각자every individual가 다 문화”란 신념을 말한다.
“우리 각자가 다 문화에요. 한명 한명이 각각 다 문화인데… 문화를 크게 하나로 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획일적이고 유일한 문화에 따르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실비가 자신의 타자기(“이 특별한 기계”)를 아무도 못 쓰게 한다는 것 또한 개인적 경험의 소중함을 지키려는 의지로 볼 수 있다.리처드의 ‘타자기 선언’은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의존, 감시, 분열에 반反한 독립, 사생활, 결합.”
여기서 결합은 ‘coherence’(일관성)를 번역한 것으로 생각과 논리의 일관성, 정합성을 말한다. 현대 정보사회는 특정한 소통 방식(디지털, 인터넷, 멀티미디어, SNS...)으로 통일하기를 요구하고 있어 사람들은 분열적인 삶을 산다. 가령 아날로그 세계를 좋아해도 그것을 마음 한 곳에 접어놓고 디지털적으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영화 후반부 ‘타이프-인’ 행사에 찾아온 페이스북 직원의 고백처럼 말이다(“저도 종일 인터넷과 SNS를 하지만, 그런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해요”). 이에 대해 리처드는 시민 개개인의 고유한 생각, 가치, 삶이 현재의 체제 또는 주류 패러다임 때문에 분열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주류 패러다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타이프-인 행사에 모여든다. 웨스턴 영화에서 각자 사연을 가진 총잡이들이 마을의 바(Bar)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저마다 타자기를 좋아하는 이유와 타자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타자기를 메타적 관점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순수한 사용과 촉각적 사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가게로 모여든다.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가게에 있던 사람들은 호기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이 사람은 무슨 사연으로 여기를 찾아왔을까. 한 고객의 말이 인상적이다. “여기 온 모두 서로가 편해요”(this whole group of people enabling each other). 영화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생각과 가치를 서로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서로 ‘허용하고’(enable) 도와주는 것.
• “타자기는 더는 생산되지 않아요.”
영화 전반부, 톰 행크스는 타자기가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며 씁쓸해한다. “흑흑”(boo hoo). 또 엔드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영상에서 톰은 말한다. “이것들도 다 사라지겠죠.” 영화 처음과 끝에서 보여준 타자기의 죽음 문제가 또 한 번 제기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 타자기를 사용하고 향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유한함 속에서 사랑하고 향유해야 한다는 것. 이 유한함이야말로 우리가 타자기를 더 생명체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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