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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폴라와 드 팔마의 21세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론201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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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코폴라 : 날카로운 빛과 혼란한 흐름
한창욱(부산영화평론가협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대부>(1972)와 <지옥의 묵시록>(1979), <컨버세이션>(1974)과 같은 굵직한 작품 목록을 만들어가며 영화 팬들에게 오래 기억될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탓인지 그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요즘 그는 감독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와인 농장 경영자이자 영화제작자,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아버지이자 코폴라 영화 가문의 수장으로만 얘기되는 듯하다. 그가 연출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그는 21세기 들어 세 편의 장편영화를 내어놓았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아직 활동하는 노장 감독 중 이스트우드가 그의 영화 세계를 더욱 빼어나게 쌓아가며 동시대 영화 팬과 감독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과 고다르가 자신만의 실험 정신을 보이며 새로운 영화 담론을 자극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21세기 연출작 중 <트윅스트>(2011)와 <테트로>(2009)는 대중적이기보다는 다소 독특하고 과격한 화법을 구사하는데, 그런데도 새로운 담론을 자극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코폴라가 마구잡이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그는 뚜렷한 주제 의식과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것은 빛, 아버지, 죄의식, 디지털 이미지, 흑백, 글쓰기와 같은 것들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코폴라의 21세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선 코폴라의 두 작품에서는 모두 ‘디지털 룩digital look’이 도드라져 나타난다. 지금이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작품이 디지털로 찍히고, 그 화면의 품질과 질감 또한 필름에 가까워져 ‘디지털 룩’과 ‘필름 룩film look’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테트로>와 <트윅스트>를 이야기하며 디지털 룩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영화 모두 필름 룩과 디지털 룩을 나누어 이야기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디지털 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영화의 디지털 룩은 매우 의도적으로 보인다. <테트로>가 개봉된 2009년은 필름 작품과 디지털 작품이 동시에 나오던 시기이며, 이 시기의 프로용 디지털카메라는 필름 룩에 흡사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트윅스트>를 만든 2010년 즈음에는 ‘RED’와 ‘Sony CineAlta F-24’, ’ALEXA’같은 카메라가 이미 영화 제작자들 손에 보편적으로 쥐어졌고, 동시대 디지털 작품은 이전의 필름 작품과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유사한 수준과 질감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코폴라는 그 시기에 <테트로>와 <트윅스트>를 만들며 Sony HDW-F900 카메라(이하 F900)를 선택했는데, F900은 디지털 영화가 보편화되는 초입에 많이 사용된,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2004)이나 이와이 슌지의 <하나와 앨리스>(2004)를 만들어낸 카메라다. 대규모 와인 농장과 영화 제작사를 거느린 코폴라가 시중의 고급 기종 카메라를 놓아두고 F900을 선택한 것은 그 특유의 디지털 질감, 흔히 날카롭고 차갑다고 여겨지는 질감이 필요했거나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된다.
디지털 룩은 두 작품의 내부와 반어적 관계를 맺는다. <테트로>와 <트윅스트>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점은 두 영화의 시대 배경이 애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테트로>는 아르헨티나의 한 지방을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초반부는 마치 60~80년대 정도의 시대로 보인다. 지금과 비슷한 시대라고 생각될 법한 휴대전화나 컴퓨터와 같은 IT 기기는 찾기 힘들다. 아무리 제1세계 서방 국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터넷이 전 세계를 연결하는 시대에 동시대 문화의 대표적 표상들이 보이지 않기가 힘들지 않은가. 우리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베니(엘든 이렌리치)가 쓰는 맥북 컴퓨터의 외형을 통해 영화 속 시기가 영화가 제작된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휴대전화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코폴라는 의도적으로 디지털 기기로 나타나는 시대적 표상들을 지워낸 것이다.
이런 점은 <트윅스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홀 발티모어(발 킬머)는 지도를 보며 운전을 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길을 찾기 위해 구글맵을 사용하는 대신 종이 지도를 사용한다. 그가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동네의 풍경도 동시대라기에는 조금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곧 그의 손에 쥔 휴대전화와 컴퓨터 화상 전화는 영화의 시대 배경이 요즘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 영화의 풍경은 마치 시간이 뒤섞인 듯 나타난다. 컴퓨터 하나 없는 도서관과 경찰서, IT기기 하나 없이 7,80년대 히피같이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 톱니바퀴 종탑 시계와 홀 발티모어와 아내의 화상 전화는 서로 공존하면서도 마주치지 않는 위치에 자리한다.
<트윅스트>와 <테트로>의 이런 시간성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베니와 홀이 과거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과거로 들어간다는 말은 지극히 관념적일 수 있는데, 코폴라는 그러한 관념성을 디지털 룩의 흑백 이미지를 활용해 담아낸다. 그럼으로써 상이한 시간대의 공존과 그러한 공존으로부터 발생하는 혼란을 화면에 새긴다. 이는 내용적 측면과도 상통한다. 베니는 고향을 떠난 자신의 형 테트로(빈센트 갈로)를 이국땅 아르헨티나에서 재회하며 자신과 관련한 과거의 진실과 마주한다. 홀은 과거의 형태를 간직한 어느 마을에서 자신의 지난 상처와 만난다. 베니와 테트로, 홀은 과거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움을 견뎌야 하고, 우리는 디지털 룩의 날카로움과 작품 내부의 불분명한 시대적 형상에서 발생하는 혼란으로부터 인물들의 혼란스러움을 간접 체험한다.
인물들의 혼란은 ‘아버지’와 ‘죄의식’이라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아버지의 죄의식’이기도 하다. 두 작품은 모두 아버지들이 자신의 죄의식과 재회하며 상처를 극복해내는 내용을 담는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현 장소를 떠나게 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테트로가 고향을 떠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떠나고, 홀이 술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떠나듯, 그들은 모두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왔거나 도망치는 중이다.
두 영화 속에서 ‘결말’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것도 인물들의 그런 운명과 관련한다. 두 작품 모두 ‘글쓰기’가 이야기의 주요 동력으로 작동한다. 테트로와 홀은 글을 끝내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적절한 결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결말을 찾기 힘들었던 것은 그 결말이 자신의 죄의식과 연관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기를 그만둘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코폴라는 이 두 작가의 글을 어떻게 종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죄의식과 결부 짓는다. 그리고 죄의식과 정면으로 다시 마주하는 것을 그 해결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죄의식을 지닌 인물인 테트로와 홀은 또 다른 극복 대상과 마주해야 한다. 테트로에게는 베니가, 홀에게는 브이가 응답해야할 임무로서 다가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소용돌이에 휩싸이듯 예상치 못한 길로 들어서며 종결을 맞이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맞이해야 했던’, ‘오래전에 완료되어야 했던’ 종결이다. 코폴라는 과거에 있어야 했던 그 종결 맺기를 현재의 숙제로 다시 불러오고, 이를 위해 마치 인물들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간 듯한 인상을 만든 것이다.
코폴라가 ‘디지털 룩’이란 말이 더는 소용없어진 시대에 다시 ‘디지털 룩’을 상기시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가 이야기하려는 인물이 겪는 혼란함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필름이 주류였던 과거와 디지털이 주로인 지금 사이에 있는 어떤 중간 단계로서의 ‘디지털 룩’. 그러한 디지털 룩에 담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는 그 선명한 명암 대비를 통해 인물의 혼란함을 더욱 가중한다. 인물 신체 위에 놓인 날카로운 빛 무늬와는 달리 그들은 경계를 알 수 없는 어딘가에 머문다. 코폴라는 <대부>에서 키아로스쿠로를 인물 특유의 무게감을 전하기 위해 사용했다. 반면에 지금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의 무게감을 전하기보다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키아로스쿠로를 화면에 던져 놓는다.
날카로운 디지털 룩에 담긴 인물에게 빛 또한 부드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테트로>의 결말 부분에서 테트로는 차도에 뛰어든 베니에게 빛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위협은 곧 빛과 같은 것임을, 이 영화의 첫장면에 나왔던 나방과도 같이 어찌할 도리 없이 빛에 이끌리는 운명에 처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린다. 디지털 룩에 실린 빛은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눈을 찌르는 날카로운 것이 되어 인물을 향한다.
두 영화의 디지털 룩 이미지는 코폴라만의 독특한 인장처럼 보이기보다는 어딘가로부터 가져온 듯한 인상을 주는데, <테트로>의 발레 ‘분홍신’ 장면과 <트윅스트>의 호텔과 마을 형상, 다소 조악해 보이는 인물과 CG 배경 결합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와 프랭크 밀러의 <씬시티>(2005)를 즉각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영화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리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앞선 영화들과 비슷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트윅스트>와 <테트로>의 키아로스쿠로가 <대부>를 떠올리게 하듯, ’아버지’라는 요소 또한 <대부> 시리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대부> 시리즈가 아버지라는 존재의 지속적 영향력을 드러내고 그 힘 자체를 화면에 담는다면, <테트로>와 <트윅스트>는 아버지의 큰 영향력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아버지들에게 과거의 죄의식을 다시 마주하여 자식 세대를 구원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자신을 구원하는 길로 제시한다. 이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거부와 극복을 희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트윅스트>에서 마을에 죄악을 남긴 것은 악마처럼 분장한 청년 그룹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초월적 존재로 자리했던 목사였다는 것으로 나타나듯, <테트로>에서 테트로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레이트 원the great one’이라며 아버지가 초월적으로 자신에게 끼치는 힘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결국 베니가 그런 ‘그레이트 원’의 형상에 불을 지르는 것처럼, 코폴라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형상을 극복하고 거부하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이는 이전 작품들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자기 자신의 자리를 고민하는 코폴라의 자의식처럼 보이도 한다.
빛이 있고, 영화가 있다. <트윅스트>에서 홀을 안내하던 애드거 앨런 포는 홀을 어느 절벽에 데려가고, 거기서 아래로 등불을 비춘다. 절벽 아래는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고, 그곳에 영화 스크린과도 같이 영상이 나타난다. 홀은 그 물-스크린에서 죄의식의 근원을 지켜본다. 코폴라는 영화가, 혹은 지금 자신의 영화가 인간의 죄의식을 반영해내는 흐름으로서 형상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마치 <테트로>에서 테트로가 산의 암석에 의해 반사되는 빛에 의해 과거를 떠올리고, 베니와 테트로가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빛들 한가운데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과거를 극복하는 것처럼, 빛의 투사로 나타나는 영화는 죄의식을 상기하는 곳인 동시에 그것을 끌어안는 곳으로 나타나길 바랐던 것일까. 만약 21세기의 코폴라가 더 이야기된다면, 날카로운 빛과 혼란한 흐름으로서 과거 형상이 주요 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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