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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맥커리 특별전 작품론20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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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커리적 풍부함 혹은 모호함에 대해
<나의 길을 가련다>와 <성 메리 성당의 종>
구형준(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틀고 구멍내기
레오 맥커리의 영화에는 장르적으로 뚜렷한 성질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러한 맥락 속에 포섭되지 않는 기묘한 순간들이 있다. 분명 맥커리의 영화들은 순도 높은 코미디이거나 섬세한 드라마이고, 그와 같은 장르적 컨벤션을 신선하고 능숙하게 직조해낸다는 것이 바로 맥커리의 장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맥커리의 영화가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바로 영화가 그러한 세계를 비틀어 버리거나, 그 세계에 구멍을 낼 때이다. 맥커리는 종종 송곳처럼 튀어나와 있는 장면들을 통해 평평한 영화에 모종의 입체성을 부과하고, 단순한 이야기와 인물들의 관계들 속에 복잡다단한 단면들을 켜켜이 쌓아 나가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길을 가련다>(1944)와 <성 메리 성당의 종>(1945)을 보자. 두 영화는 오말리 신부(빙 크로스비)를 비롯한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창조적으로 껴안는다. 두 영화는 종교와 종교의 바깥, 자본과 현실의 문제,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의 미묘한 경계 등의 테마들을 매우 동시다발적으로 오간다. 그러나 그것을 진중하고 엄격한 테마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노래를 부르거나, 코미디적 상황을 통해, 혹은 모호하고 (모호하기 때문에)풍부한 대화들을 통해서 간단하고 편안한 태도로 사유한다. 즉, 단순히 서사 속에서 주제를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미세하지만 돌출적인 순간을 통해 사유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맥커리의 이러한 특징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의 이러한 풍부함이 어디까지나 고전적 영화의 울타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맥커리의 이러한 생명력 넘치는 방식은 언제나 스튜디오 촬영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고전적 영화 문법을 준수하고, 장르적 토대를 지켜나가면서 실천된다. 맥커리는 고전기 헐리우드의 위대한 감독들이 그러하듯, 세계라는 울타리를 단단하고 폐쇄적으로 지어 올리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에 흠집을 내고 틈새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사람인 것이다.
야구공과 유리창
<나의 길을 가련다>의 초반부, 도미니크 성당을 찾아가던 오말리 신부는 얼떨결에 아이들이 깬 유리창을 책임지게 된다. 여기서 오말리 신부는 유리창 주인이 심술 궃게 던진 야구공을 주으러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다가, 하필 그때 지나가던 청소차가 뿌린 물세례를 맞아 흠뻑 젖고 만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자동차 밖으로 나온 오말리 신부는 화난 얼굴로 야구공을 유리창의 주인에게 다시 던지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고는 찝찝한 표정을 짓는다. 또한 <성 메리 성당의 종>에서도 야구공과 유리창이라는 모티프는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보가더스(헨리 트래버스)의 건물 아래에서 야구를 하던 베네딕트 수녀(잉그리드 버그만)와 아이들은 실수로 건물의 유리창을 깨버리고, 베네딕트 수녀는 보가더스가 있는 사무실로 올라와 그에게 사과한다. 하지만 애초의 목적과 달리 베네딕트 수녀는 보가더스의 건물을 보며 그 건물을 학교로 만들 상상에 마음이 부풀고, 보가더스를 설득하려 한다. 여기서 베네딕트 수녀는 보가더스에게 죽음을 상기시키고, 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계기로 보가더스는 이후 마음을 바꾸게 된다.
여기서 아이들의 야구게임과 ‘유리창이 깨진다’라는 모티프는 영화의 인물과 사건, 공간과 생각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는 마술 같은 오브제와 사건으로서, 기묘한 상황을 촉발시키는 힘을 지닌다. 가령 <나의 길을 가련다>에서 유리창이 깨진 후 오말리 신부 앞에 무신론자가 나타나고, 이후 분노에 차 야구공을 던지려 하는 오말리 신부의 모습은 그의 캐릭터를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들어준다. 단순히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으로서의 오말리 신부가 아닌, 화나고 실패하는 인간으로서의 오말리 신부가 스쳐 지나가듯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말리 신부의 ‘분노’는 단순히 인물의 복합적 감정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세계 자체를 다층적으로 확장하는데 일조한다. 유리창이 깨지고, 종교의 관용이나 어른의 마음가짐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갈등이 생기며, 거기서 비롯된 분노는 오말리 신부의 기지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즉 여기에는 영화의 서사나 단일한 주제 속에서는 풀리지 않는, 생동하는 삶의 문제가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 자체는 매우 단순하고 짤막하지만, 여기에 잠복 되어 있는 생생함은 일순간에 세계를 한없이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성 메리 성당의 종>에서 ‘유리창의 깨짐’은 마치 어떤 경고나 계시와 같은 역할을 하며 인물과 세계를 확장시킨다. 베네딕트 수녀와 보가더스는 서로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구공과 ‘유리창이 깨진다’는 우연적 사건은 베네딕트 수녀와 보가더스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맞닿게 만들어 주고, 그 만남은 보가더스로 하여금 다르게 사는 삶의 방식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항상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보가더스가 죽음을 인지하고, 내면적 풍족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는 보가더스라는 인물의 변화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를 더욱 풍부하게 확장 시키는 힘을 가진다.
즉 <나의 길을 가련다>와 <성 메리 성당의 종>에서 야구공과 유리창에서 비롯되는 이 작은 에피소드들은 모두 짧고 작지만, 동시에 중요한 변화의 씨앗을 내포하고, 시선의 확장을 가능케해주는 풍부함을 담보하고 있다.
맥커리적 풍부함
이 외에도 두 영화 속에는, 서사의 효율에서는 다분히 잉여적이지만 동시에 독립적이고 생명력 있게 영화의 틈새를 확장하는 순간들이 종종 나타난다. 이를테면 오말리 신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는 장면들, 사실은 오말리 신부가 주임신부로 발령 났다는 것을 알고 가출(?)을 감행했다가 비를 맞고 돌아온 피츠기븐 신부의 모습(<나의 길을 가련다>), 베네딕트 수녀에게 건물을 넘겨주겠다 말하고 나섰던 보가더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할 뻔 했던 순간, 아이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려고 연습을 하다 되려 아이에게 펀치를 맞고 쓰러진 베네딕트 수녀의 모습.(<성 메리 성당의 종>) 등이 그러한 순간들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모두 서사적 효율이라는 맥락에 있어서는 전혀 경제적이지 못하며, 또한 영화의 분위기로부터 모두 조금씩 떨어져 있거나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얼마간 잉여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장면들에는 거대한 서사의 흐름과 장르적 컨벤션만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생명력이 있으며, 다양한 삶의 문제를 획일화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활력이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는 전쟁과 대공황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 권력과 자본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젠더적 문제, 그리고 자본과 현실의 괴리, 삶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와 같은 심오한 테마들이 담겨져 있지만, 맥커리는 절대 그런 테마들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내리는 비와 스쳐 가는 바람, 혹은 다 함께 노래 부르기와 골프 치기의 쾌감, 갑자기 나타난 강아지와 훔친 칠면조 고기처럼 가볍고 일상적인 순간들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을 녹여낸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영화적 풍부함을 직조해내는 맥커리의 영화는 서사의 바깥에서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제시해주는 또 다른 이정표이자, 고전기 헐리우드 영화가 단순히 폐쇄적인 세계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며,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 에른스트 루비치, 혹은 그 외에도 영화적 ‘풍부함’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가졌던 감독들과 맥커리를 함께 놓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항상 서사의 진행방향인 앞을 바라보기만 할 때, 맥커리는 옆이나 위를 보라며 샛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나 이토록 깊고 풍부한 샛길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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