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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자기만의 방’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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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자기만의 방’
영화는 서른 살의 주인공 율리에가 「공감」 관계를 체험하고, 성숙하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의 연인으로 다섯 명의 남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핵심 인물은 (네 번째 남자인) ‘악셀’이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발랄하지만, 후반부에서 묵직해지는 이유는 바로 악셀 때문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인공이 생의 마지막을 앞둔 악셀과 재회하며 비로소 한 ‘어른’으로, 예술가로 성숙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녀의 성숙에 슬픔이 수반되는 이유다.
영화는 이처럼 슬픈 우울함이 뒤섞인, 조용한 성숙을 통해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조용한 내적 성취는 그녀가 자신의 방에서 차분하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이 영화에서 자기애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애 개념은 정신분석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미국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 (Self psychology)을 참조하며, 주인공의 공감 관계와 성숙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려 한다. 먼저 주인공의 인물 설정에서 배경이 되는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자.
• 율리에의 <절규>
오프닝은 전반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다. 장소는 악셀의 출판 기념회다. 그녀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지 않고, 혼자 밖에 나와 있다. 처음부터 그녀가 베돌았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다시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그녀는 다른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주인공이 질색하는 대화다.
남자 : 까먹어서 그러는데 어떤 일 하시죠?
율리에 : 서점에서 일해요
여자 : 그래요? 어디 있는 서점이요?
율리에 : 대학가에 있는 노를리 서점이요
여자 :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그녀는 홀로 에케베르그 언덕을 걸어 내려온다. 이곳은 바로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절규> (Skrik, 1893)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눈물은 ‘절규’에 조응한다.
• 사회학적 관점
율리에의 눈물은 어디서 비롯한 걸까. 먼저 거시적인 관점, 또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 불안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44세의 그래픽 노블 작가인 악셀은 20세기 후반 (1970년대~1990년대) 사회를 특징짓는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이고, 율리에는 2000년대 이후의 사회를 특징짓는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세대다.
포스트모더니즘 세대가 전통 (종교, 도덕, 규범)을 해체하고, 「현실을 허구 (픽션) 세계로 대체」하려 했다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세대는 전통도, 허구도 불신한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세대가 허구 세계 속에서 「비일상, 타인의 이야기」에 몰입한다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세대는 그것보다 「일상,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주인공은 악셀에게 이별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리에 : 난 내 삶의 구경꾼인 기분이야.
내 인생인데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달리 말해 그녀는 일상으로서의 자기 ‘인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자신의 에너지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자율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따라 자신이 정의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이빈드를 처음 만날 때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뻔한 질문 안 하세요? 내 이름, 직업 같은…. 그런 질문 정말 딱 질색이에요.”
율리에는 또한 자신의 삶을 우연성에 열고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가령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해서 꼭 의사가 되어야 하는 법은 없다고 여긴다.) 이런 삶의 태도는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다.
하지만 불안하다. ‘절대적 가치관’ (종교, 권위, 도덕, 규범)을 따르지도 않고, 허구로 현실을 대체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신의 동기, 진취성, 자율성에 따라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자유」이면서도 「부담」이다. 이 부담이 불안을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보편적 규율이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은 상대방이나 상황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 이처럼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한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 간극에서 현대인은 지쳐 간다. 또 최종 목적이 없어진 개인은 현재의 위치도 불안하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살고 있는 걸까’).
• 율리에, 자기애적 인물
이 점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은 현대 사회가 낳은 불안이다. 도입부 내레이션 또한 그녀의 불안과 현시대 (인터넷, 스마트폰…)의 연관성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반론에 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율리에의 성격에는 또 다른 지층이 있다. 영화가 일반론을 넘어, 구체적인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율리에가 자기애적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자기중심으로 행동한다. 마음 가는 대로 직업 (진로)을 바꾸고, 그때마다 남자 친구도 바꾼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악셀의 희망은 뒤로 한 채, 자기 정체성을 탐색하고 자기실현을 모색한다.
(※ 이때 율리에의 정체성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모습,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변신하는 모습, 그 「정체성의 다면성 (복수성)」이 드러내는 리듬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 『올랜도』의 주인공은 수 세기에 걸쳐 정체성을 바꾼다. 『파도』는 여섯 명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만의 방』은 ‘네 명의 메리’를 통해, 한 인물의 정체성이 유체처럼 흐르고, 섞이고,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율리에는 버지니아 울프와 동일시되는 면이 있다. 도입부, 악셀과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사귀기로 했을 때 카메라가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포스터를 비춘 것은 상징적이다. 악셀이 ‘버지니아 울프 =율리에’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귀기로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감독이 주인공 캐릭터 설정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했다는 뜻일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자기애 심리를 ‘초점 변화’ (Racking Focus)로 표현한다. 자기애 심리가 두드러지는 장면에서 카메라 초점은 ‘자기중심 / 타자(풍경)중심’의 축을 오간다.
오프닝 출판 기념회에서 테라스 장면과 도입부 강의실 장면에서 카메라는 다른 사람, 풍경을 흐릿하게 비춘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에케베르그 언덕을 내려오다 멈춰 풍경을 볼 때, 자신에게 초점이 모이는 순간부터 그녀는 울기 시작한다. 풍경에 빼앗겼던 자의식을 회복하자 불안감, 공허감이 밀려왔다는 뜻이다.
또 악셀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프로이트를 논하고, 자신의 출세작이자 최애작인 밥캣 만화의 영화화 방식을 열띠게 비난하는 가운데 카메라는 어느덧 율리에 얼굴만 또렷하게 비춘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다. 그녀가 대화에서 이탈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다는 뜻이다. 이 모습은 침대 장면으로 이어진다. 율리에는 또렷하고 악셀은 흐릿하다. 다음날 그녀는 악셀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역설
어떤 사람은 ‘자기애’라는 말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애에는 여러 층이 있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격려하는 감정도 자기애에 속한다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야’ ‘살아있어 다행이야’). 이런 감정은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감정이며,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버팀목이다.
또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타인을 사랑하고, 사물과 자연을 아끼는 마음도 모두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자기애는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는 긍정적인 힘이다.
다만 자기애는 다양한 원인으로 쉽게 훼손된다.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의 경우는 자기애가 현저히 낮아지고, ‘자기애성 인격 장애’의 경우는 자기애가 지나치게 커지며 과도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 두 경우 모두 자기애가 균형을 잃은 것이다. 자신도 불행해지고, 주변과도 불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화는 흥미롭게도 율리에의 자기애가 마침내 균형을 찾고 ‘건강한 자기애’로 성숙한 모습을 그린다. 이는 곧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엔딩 (에필로그)은 앞서 묘사된 인물 성격과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녀는 현재 혼자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전에 악셀과 사귈 때는 악셀 집에 들어가 살았고, 에이빈드와 사귈 때는 에이빈드 집에 들어가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방에서 평온하게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야말로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듯하다.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보여준 방황 (끊임없는 변신, 「자기실현과 일」을 일치시키려는 덧없는 시도, 또 그로 인한 불안감), 그리고 심하게 말하자면 ‘자기중심적으로 제멋대로 구는 천방지축’에 대비되는 이 균형감, 평정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주인공의 긴 ‘방랑기’와 에필로그 사이에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악셀과 재회」가 있었다. 열두 챕터로 이뤄진 영화의 마지막 두 장은 두 사람의 재회를 그린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율리에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처럼 자신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소리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상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하인즈 코헛’ (Heinz Kohut, 1913~1981)의 자기심리학을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코헛은 「자기애와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정밀하게 기술한 정신분석가다. 코헛은 자기애에서 대인관계 (타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 자기심리학의 기초 명제
키워드는 「자기애, 의존, 공감」이다. 인간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코헛은 행복이 자기애의 충족에서 나온다고 본다. 우리가 기쁘거나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는 자기애가 충족됐을 때이고, 반대로 슬프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자기애가 상처받았을 때이다.
이때 자기애가 충족되려면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안심시켜주고, 지지해주는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심리학의 포인트다. 자기심리학은 「타인에게 건강하게 의존할 때 인간은 자기애를 충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는 타인의 존재 없이는 자신의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이란 누군가가 봐 주고 인정해 줌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코헛은 이처럼 자신이 ‘자기 자신’이기 위해서 필요한 상대를 「자기대상」 (selfobject)이라 불렀다. 자기대상은 ‘자기의 일부’로 경험하는 대상이다. (『자기의 분석』, 1971, 서론)
아이는 자기대상에게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고, 자기 자신으로 성장한다.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자기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변형적 내재화」로 부른다. 자기대상이라는 음식을 소화, 흡수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다. (『자기의 분석』, 2장)
이로써 아이는 점점 자기대상이 하던 기능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기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코헛은 이 과정이 성장 과정뿐 아니라 평생 동안, 심지어 죽어가는 과정에도 계속되고, 또 계속돼야 한다고 봤다.
누군가 죽어가는 과정에 함께하며 “당신은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 나는 이 과정에 함께하며 너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것이다. 그런데 네가 이 과정을 이겨나가는 모습이 나에게 큰 영감을 준다. 이런 너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힘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 자기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고 코헛은 생각했다. (최영민, 『쉽게 쓴 자기심리학』, 1장)
실제 코헛은 만년에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려 쇠약해졌지만, 생을 마감하기 사흘 전까지 자기대상들 (동료, 학생…)에 둘러싸여 강연을 했다. 자기대상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다. 우리는 악셀이 율리에와 함께 마지막 날을 보내는 모습에서 비슷한 사례를 본다.
• 인간은 약하다
의존이라는 말에서 ‘나약한 마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생을 시작하지 않는다. 생의 초기부터 ‘누군가’와 항상 함께 연결되어 있다. 코헛은 인간이 신체적으로 생존하려면 「산소」를 필요로 하듯, 정신적으로 생존하려면 「공감적인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회복』, 1977, 2장)
아기는 생애 초기에 특히 어머니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더 없이 행복한 상태다. 이 시기의 두 주인공은 아기와 엄마다. 사람들은 이때의 ‘가장 완벽했던 자기’ (‘나는 완벽해요’)와 ‘가장 이상적이었던 엄마’ (‘당신은 완벽하고, 나는 당신의 한 부분이에요’)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코헛은 이 욕구를 ‘자기애적 욕구’로 부른다. 이처럼 자기애(적 욕구)는 상대를 필요로 한다. 자아 단독의 자폐적인 욕구가 아닌 것이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강하다」고 생각했다. 또 「자아 단련」이 인간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자아는 ‘이성’과 비슷한 것이다. 반면 코헛은 「인간은 약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포용하려 한 것이다.
또 코헛에게 인간의 성장은 「다른 사람에게 건강하게 기대는 능력」의 성장과 같다. 타인의 존재 없이는 자신의 존재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다 히데키, 『자신감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심리학』, 2017, 국역 『잠시만 기대겠습니다』, 2018, 2장) ‘인간의 성장’ (=변형적 내재화)은 자신이 의지하는 자기대상과 함께 공감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된다.
이 관점에서 ‘프로이트주의자’인 악셀과 주인공의 말다툼을 볼 수 있다. “이게 우리 관계의 가장 큰 문제야.” 그녀가 바란 것은 이성적인 ‘분석’보다 ‘공감’이었다.
율리에 : 자기는 항상 강하게 행동하려고 해.
자기한테 있어서 강하다는 건 정확한 의사 표현이지.
심리학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을 분석해야만 강한 거라고 생각해.
나는 분석적이지 못해서 약하다고 생각하지.
나중에 그녀가 ‘마법의 버섯’ 환상 속에서 아빠와 악셀의 모습을 겹쳐 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진정한 관심도, 공감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악셀을 아빠처럼 느꼈다. (아빠는 딸 생일 파티에도 오지 않고, 딸이 보낸 글도 읽지 않는다.) 또 그녀가 악셀과 헤어지고 나서 아빠와 연락을 끊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는 없다. 그만큼 악셀과 아빠를 동일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핵심자기
신생아의 자기는 두 살 무렵 ‘핵심자기’로 나아간다. 핵심자기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나는 완벽해요’에서 발전한 ‘야심만만한 자기’, 곧 ‘과대 자기’다. 다른 하나는 ‘당신은 완벽하고, 나는 당신의 한 부분이에요’에서 발전한 ‘이상화된 부모의 이미지’다. (『자기의 분석』, 1장, 2장)
두 개의 자기는 두 개의 극 (pole)을 대변한다. 바로 ‘야심’ (=상향심, ambition)과 ‘이상’ (목표, 가치)이다. ‘야심’은 아이가 ‘칭찬’ 받고 싶어 노력하는 마음과 연결돼 있다. ‘이상’은 아이가 불안할 때 자신의 이상이 되는 대상에 의존하는 마음과 연결돼 있다. (『자기의 회복』, 4장)
이때 아이가 부모로부터 ‘적절한 반응’을 얻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반응은 진정성 있는 반응, 공감을 말한다. 만약 부모가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무조건 나무라기만 하면 아이는 상처를 받는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의 구조가 깨진 채 발달이 멈춰 미숙한 ‘과대 자기’에서 머문다. 코헛은 이것이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언제나 특별해지려 한다. 그런데 율리에도 이런 면을 살짝 보여준다. 물론 ‘장애’로 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야심만만하나 이상 (목표, 가치)이 없다.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자이나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부모의 무시, ‘영혼 없는 리액션’에서 비롯된 성격이 아닐까.
• 적절한 좌절
부모의 적절한 반응이 없으면 아이가 ‘최적의 좌절’ (=‘적절한 욕구불만’, optimal frustration)을 경험할 수 없다. 자기심리학에서 최적의 좌절은 중핵 개념이다. 최적의 좌절이란 부모의 태도가 좌절을 주지만,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코헛은 최적의 좌절을 통해 아이가 성숙한다고 했다. 즉 ‘변형적 내재화’는 최적의 좌절을 전제로 한다. (『자기의 분석』, 2장, 3장)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의 꿈 (야심과 이상)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야, 슈퍼 히어로가 될 거야.…’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반응에 불만을 느낀다. 이때 좌절이 개인의 대처 능력 내에서 이뤄지는 좌절일 경우, 차츰 강한 자기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 개인의 대처 능력을 넘어서는 심한 좌절을 겪을 때는 ‘변형적 내재화’ (=성숙)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유아 수준의 자기애에 머무르고, 유아적인 전능감의 상태를 보인다.
그런데 부모가 언제나 아이가 원하는 반응만을 보인다면 어떨까. 이 경우에도 아이의 성장은 방해를 받는다. 오직 ‘작은 좌절’을 반복해 느끼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점차 현실적인 수준으로 수정될 수 있다. 그 욕구와 불만을 스스로 해소하며 낙담하는 법, 자기를 위로하는 법, 새롭게 시작하는 법을 배운다.
‘적절한’ 좌절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일본 정신과 의사 ‘사이토 다마키’의 말처럼 아이에게 부모의 사고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아이의 요구와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옳지 않다. (사이토 다마키, 『사회적 우울증』, 2011, 4장)
율리에는 부모의 ‘적절한 반응’을 받지 못해 ‘최적의 좌절’ 경험이 부족한 듯하다. 엄마는 언제나 딸이 원하는 반응만을 보인다. 건성건성 대답한다 싶을 정도로. “심리학을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렴.” “사진작가라고? 그렇구나. 네가 진짜 하고 싶다면…” 한편 아빠는 딸에게 관심도, 공감도 없다.
코헛은 핵심자기에서 ‘과대 자기’ (=야심)는 주로 엄마와 함께 형성되고, ‘이상화된 부모의 이미지’ (=이상)는 주로 아빠와 함께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율리에의 경우 ‘야심’ (자신감)이 거침없이 커지는 데 비해 ‘이상’의 형성이 어려웠을 수 있다.
코헛은 인간을 행동으로 내모는 게 ‘야심’이고, 이끄는 게 ‘이상’이라고 했다. (『자기의 회복』, 4장) ‘이상’은 자신이 활동하고 목적을 추구할 때 방향을 제시하는 신호등처럼 작용한다. 또 ‘이상’이 잘 자리 잡으면 자신의 행동이 실패하더라도 이른바 ‘회복 탄력성’이 높아진다. 이로써 율리에는 ‘가족의 외부’에서 자기대상을 찾는다.
(※ 엄마, 아빠라는 표현을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좁게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남성이 엄마 역할을 하는 경우, 여성이 아빠 역할을 하는 경우, 또는 하나의 성이 양쪽 모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린 시절에 정신적 결손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뒤에 적절한 자기대상과 만나 관계를 쌓으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자기심리학의 입장이다. 바로 이 점에서 율리에와 악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 자기대상의 세 유형
유아기의 핵심자기는 점차 복잡한 구조로 발전한다. 이때 자기가 발달하려면 자기대상이 필요하다. 코헛은 세 종류의 자기대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거울 (=반영적 mirroring) 자기대상, 이상화 (idealizing) 자기대상, 동반적 (=쌍둥이 twinship) 자기대상이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려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자기대상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거울 자기대상은 (자신도 잘 모르는)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이다. 제대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말한다. 핵심자기에서 ‘과대 자기’의 상대 역할을 해준다.
이상화 자기대상은 의지가 되는 사람이고, 불안할 때 안심이 되는 사람이다. 핵심자기에서 ‘이상화된 부모 이미지’가 반영된 것이다.
동반적 자기대상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다. 두 자기대상 (거울, 이상화)의 중간 영역에서 기능하며, 두 영역을 이어준다. 인간은 야심과 이상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실패하거나 자신감을 잃었을 때 안정감을 주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이런 친구, 동료가 동반적 자기대상이다.
세 종류의 자기대상은 세 종류의 공감에 조응한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자기대상과 공감하며 자기가 성장한다. 자기가 성장한다는 말은 「상호의존적인 자기」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대상 관계는 복합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가령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쪽이 ‘거울 자기대상’이 되고 다른 쪽이 ‘이상화 자기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학창 시절부터 자신을 챙겨준 최수연의 별명을 ‘봄날의 햇살’로 지어준 장면이 바로 그 사례다.
최수연에게 자신의 성격을 칭찬해 주는 우영우는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거울 자기대상’이다. 한편 우영우에게 최수연은 진정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이처럼 우영우의 한마디에 최수연의 자기애가 충족됐고, 둘 사이에는 상호의존 관계가 형성됐다.
• 에이빈드, 동반적 자기대상
에이빈드와 주인공이 급속히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다. 에이빈드의 전 여자 친구는 ‘대의’와 ‘환경 문제’에 몰두했고, 에이빈드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서도 상대를 ‘지배’하려고 드는 사람과 사귀고 있었다. (적어도 이 당시 악셀과 주인공은 충분한 공감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에이빈드와 동반적 자기대상 관계만 형성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에게 에이빈드는 거울 자기대상도, 이상화 자기대상도 아니었다. 그녀는 에이빈드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 우연하게 글을 읽게 된 에이빈드의 반응도 그녀가 기대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냥 좋다는 이야기만 거듭할 뿐, 구체적인 호응이나 실질적인 격려가 없었다. 그녀는 에이빈드의 반응에 불만을 느끼고, 분노를 터뜨린다.
확실히 그녀는 지나치게 반응했고, 스스로 미성숙함을 드러냈다. 그녀가 퍼부은 폭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내적으로 깊은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에이빈드: 나도 정말 공감되더라. 진짜 잘 쓴 것 같아.
율리에: 잘 쓰지 않았어.
이처럼 내적으로 무가치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거울 자기대상을 갈망하는 것이다. 또 방향성을 잃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기대고 존경할만한 요소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를 바란다. 이상화 자기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녀가 악셀을 다시 찾아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악셀, 이상화 자기대상
전반부 악셀은 주인공이 의지할 만한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주인공 아빠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무책임하고 회피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악셀은 ‘어른스럽게’ 아빠를 나무란다. 마치 그녀의 진짜 아빠 같은 역할을 한다. 또 악셀은 주인공의 글을 칭찬하며, ‘지적이면서도 에로틱’하다고 평가한다. 이때 악셀은 주인공에게 거울 자기대상이 된다.
하지만 동반적 자기대상의 관점에서는 충분한 공감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다. 한쪽은 강하(게 보이려 했)고 다른 한쪽은 약했다. 악셀은 주인공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보다,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아이를 갖는 문제로 다투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악셀: 대체 뭘 기다리는 건데? 뭐가 먼저인 거야?
율리에: 나도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일단 뭔가를 더 하고 싶어.
악셀: 알았어. 뭘 하고 싶은데? 걸리는 게 뭐야? (…)
알았어. 그럼 넌 뭘 원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야심과 이상만으로는 살 수 없다. 같은 인간, 동료로서 자신을 지탱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동반적 자기대상은 동료의식을 같이 하며, 사회생활을 위한 대인관계법을 비롯한 갖가지 ‘기술과 재능’을 배울 수 있게 돕는다.
또 코헛은 동반적 자기대상이 ‘고도로 세련된 심리기능’의 발전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 심리기능은 ‘창조성’, ‘공감 능력’, ‘자신의 유한함 (=덧없음, transience)을 수용하는 능력’, ‘유머’, ‘지혜’다. 코헛은 이들을 「자기애의 변형」이라고 불렀다. (『자기의 분석』, 12장)
후반부 악셀은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주인공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주인공의 마음이 열린다. ‘이 사람도 나처럼 약하구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동반적 자기대상이 된다. 이로써 두 사람은 ‘자기애의 변형’을 함께 이뤄갈 수 있었다. 영화는 특히 ‘예술적 창조성’과 ‘자신의 유한함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모습에 주목한다.
• Give and Take
주인공 성격은 밝다. 스스로를 ‘얼음 위의 밤비’로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 그런데 중증 환자에게 자신의 고민 상담을 하러 찾아가고, 그것도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임신 문제를 의논하러 간다는 것은 확실히 자기중심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해맑은 표정은 그 ‘천방지축’ 자기애적 성격을 잊게 만든다.
또 그녀의 행동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악셀과 재회하며 성숙해진다. 코헛은 ‘타인 (자기대상)에게 건강하게 기대는 것’이 자기 성장의 근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올바른 안목을 길러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그 선택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녀가 악셀을 찾아간 행동은 자기 성장의 첫걸음이었다.
한편 주인공의 행동은 악셀에게도 힘을 줬다. 악셀 또한 율리에의 고민을 상담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자신도 힘을 얻은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자기대상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자신의 자기대상으로 얻는 것」이다.
악셀이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푸념’하자 주인공은 그를 위로한다. 이때 악셀에게 자신의 창작 자세를 칭찬해 주는 주인공은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거울 자기대상이다. 한편 주인공에게 악셀은 인생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율리에: 자기는 작품을 만들었잖아.
난 자기가 정말 부러워.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의심이나 고민하지 않고 그리기에만 집중하는 거.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
또 그녀는 악셀이 ‘남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자 악셀은 그녀의 장점을 칭찬한다. “난 네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믿었어. (…) 내가 너와 헤어지고 후회되는 게 있다면… 네가 얼마나 멋진지 깨닫게 해주지 못한 거야.” 이때 그녀에게 악셀은 거울 자기대상이고, 악셀에게 그녀는 이상화 자기대상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울 자기대상이란 것을 확신하게 된다. “너는 잊은 네 특징들도 내가 더 잘 기억할 거야.” “나도 그럴 걸.” 그리고 악셀은 주인공에게 말한다. “넌 참 좋은 사람이야.” 영화 제목과 반대로 말한 것이다.
• 예술적 창조의 모티브
주인공은 아무도 자신처럼 악셀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반적 자기대상의 시선에서 삶을 섬세하게 보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적으로. 그녀는 (사진 모델인 애인과 헤어진 뒤로) 오래 동안 꺼내지 않던 카메라를 다시 잡는다. 어린 시절 악셀이 살던 집을 찾아가 건물 내부 계단, 삼색 유리창 앞에서 그의 모습을 담는다.
만화를 그릴 때 언제나 떠올렸다는 “이 색깔들” 앞에서 악셀은 자기한테 “참 잘해줬던 동네 주정뱅이 아저씨”를 기억한다. 여기서 만화 ‘밥캣’의 캐릭터가 이 주정뱅이 아저씨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애완고양이들 틈에 사는 야생 고양이”, “부르주아에 맞서는 반항아”는 소년 악셀에게 이상화 자기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반적 자기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신감을 얻는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믿음, 말하자면 자신의 예술적인 독특함과 목적에 대한 신념을 얻는다. 그녀는 앞서 자신이 부러워하던 악셀의 상태를 달성한 듯하다.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의심이나 고민하지 않고 그리기에만 집중하는 거.”)
그녀는 사진 예술을 통해 ‘불멸의 기억’에 전념한다. 악셀은 “내가 떠나면... 너에 대한 것들도 같이 사라지겠지.”라고 했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사진 작업은 자기애의 변형이다. 동반적 (=쌍둥이, 분신) 자기대상인 악셀이 사라지는 것은 곧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니까. 코헛은 이 같은 창조 작업을 통해 자기애의 성숙한 변형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 무상함과 충만함
이렇듯 마지막 나날을 함께할 때 그녀는 악셀에게 큰 힘이 됐고, 악셀 또한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그녀는 악셀을 통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실제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악셀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이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이로써 그녀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감독은 이처럼 ‘존재의 유한함 (덧없음, 무상함)’을 수용하면서도 가슴에 차오르는 충만함을 바다 일출 장면으로 표현한다. 노르웨이 자연주의와 심리학적 은유가 만나는 장면이다. 카메라 초점은 주인공과 자연 풍경을 오가며 자기애의 변형, 확대를 표현한다. 그녀의 뒷모습이 흐려지고 풍경이 또렷해진다.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율리에, 악셀, 자연이 메아리처럼 서로 울린다.
• 에필로그
자기심리학에서 자기 성장은 자기대상이 제공해 주던 기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는 곧 자기대상이 더는 기능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기능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코헛은 이 과정이 평생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말부 율리에의 모습에서 그런 가능성을 본다.
따라서 “처음엔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다.” 코헛은 누구나 한 사람의 자기대상과 제대로 공감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면,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확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필로그, 주인공은 자신의 공감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영화 제작에서 스틸 컷 촬영을 맡고 있다. 연기를 못했다고 자책하는 배우에게 그녀는 말한다. “그 감정 그대로 갈게요.” 배우의 자괴감이 바로 극중 역할에 일치한다고 말해준 것이다. 이 말은 매우 적절한 연기 지도이면서도 최고의 위로, 격려가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피사체와 ‘공감 대화’를 했다. 이때 그녀는 배우에게 거울 자기대상과 동반적 자기대상 역할을 해준 셈이다. 주인공은 이 공감 대화를 통해 감독이 연출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표정을 담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처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분명 악셀을 촬영한 경험을 확장한 것이다.
주인공은 자기만의 방에서 스틸 컷을 살펴본다. 약간 옆으로 기우뚱한 배우 얼굴을 따라 자신도 얼굴을 조금 기울인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 공감의 힘이다. 주인공이 이런 공감의 힘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대상이 되어 준다는 것은 「자기 성장을 향한 자기애가 ‘타자애’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셀의 말처럼 율리에는 이제 “참 좋은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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