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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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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화의 봄 <베스턴>2019-02-13
Review 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독일 영화의 봄 Focus on the Contemporary German Cinema 2019. 2.1.(금) - 2.28.(목)

 

불확실한 것들의 아름다움

<베스턴> 발레스카 그리세바흐(2017)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불확실한 것들이 <베스턴>을 아름답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체로 고요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매순간 감정과 정서들의 입자가 진동한다. 장르의 기승전결이라는 안정된 구성을 영화가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카메라도 명료한 기존의 문법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는 영화 초반에 건설 현장으로 투입될 인력들이 모여 있는 장면, 그들이 불가리아 현장에서 일하는 장면, 그리고 그 곳에서 첫 점심식사를 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만, 발언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마저도 그리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당사자가 아예 프레임 바깥에 자리하거나 프레임 안에 있어도 카메라가 그 사람의 얼굴을 가려내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먼발치에서 그가 속한 사람들의 무리를 풍경인 것처럼 바라보기도 하고 이따금씩 그들을 둘러싼 진짜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도 있다.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 같은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가 어느 자리에 앉아있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보다도 한여름의 직사광선과 녹음이 우거진 먼 산, 차양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들, 그들의 붉게 그을린 피부, 노동으로 단련된 몸, 시시껄렁한 농담과 잼을 바른 나이프가 오가는 식탁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카메라는 인물과 세계 사이를 활보하며 인상(印象)과 공기를 채집하는 세심한 관찰자가 된다. 이들 건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것일 그들의 삶 일부분이 영화 내부에 안착할 수 있는 것은 그로 인해서다 

 

    영화는 주로 과묵하고 고독한 마인하르트의 모습을 좇는다. 하지만 일상이 언제나 평온하지만은 않듯이 어떤 이미지나 사건들은 종종 그 고요함에 다른 질감을 부여한다. 마인하르트와 빈센트가 언뜻 말 울음소리를 듣고 수풀 사이로 접근했을 때의 일이다. 그들은 공사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말로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중 백마는 유난히 하얘서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이나 백마의 존재 자체가 순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해가 뜨고 질 무렵의 어스름이나 나뭇잎들과 지붕 등 지형지물들이 피사체들에게 그늘을 만들 때, 아예 형체를 식별하기 힘든 어둠 속에도, 인위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밝히고자 하지 않는 영화 속에서 백마는 스스로 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착한 카우보이의 모자가 언제나 흰색인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반코가 장난으로 어둠속에서 마인하르트를 덮칠 때나, 모두가 기분 좋게 카드게임을 하고난 뒤 본인이 잃은 돈을 돌려달라는 사내의 출현,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가깝게 지내는 마인하르트를 고깝게 여기던 빈센트의 일격, 마을의 미인인 비아라와 그가 어울리는 걸 보고 시비를 거는 청년은 전환, 환기, 혹은 각성의 계기로도 작용하지만 그것들은 예측이 어렵고 돌발적이라는 측면에서 사건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 이전의 몸짓과 신호들이 이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또한 언어가 온전한 의사전달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불확실함에서 근원한다고 볼 수 있다. 마인하르트와 아드리안이 각자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언어만큼, 혹은 그보다 더 깊고 명료하게 와 닿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드리안은 자식들이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났다며 펼쳐 보인 손가락들을 접고, 마인하르트는 동생이 있었지만 죽었다며 하늘을 가리켰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여기에 있다고 한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던 마인하르트는 이 때만큼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더니 그 끝에 울음이 섞이고 만다. 아드리안은 그에게 형제가 돼주겠다고 한다. 각자의 모국어와 영어, 그 외에 더 있을지 모를 외국어들. 서로가 하는 말을 얼마나 세세히 전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느덧 슬픔이 스민 마인하르트의 얼굴과 손짓, 아드리안의 따뜻한 표정과 눈빛, 호의어린 어투, 말에 대한 부연으로 움직이는 손가락들, 두 사람이 나누는 악수에서 서로의 뜻이 제대로 전해졌다는 데는 의심할 바 없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없는 길 위의 방랑자 같은 마인하르트와 그에게 곁을 내준 아드리안의 관계가 그들에 따르면 형제로 정의되고 보편적인 언어로 말하면 두 사람에게 우정과 연대감이 형성된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단순히 서유럽, 독일()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당시 불가리아가 추축국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열강의 역사를 차치하고 보아도 선진국, 개척자, 카우보이는 동일항에 놓아도 무방하다. 그렇게 영화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와 만날 수 있다. 독일의 노동자 가운데 몇몇은 인프라를 구축해주러 왔다는 우월감을 갖고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강가에 놀러온 여자들을 희롱하고 남의 사유지에서 열매를 따려다가 저지당하며 공사 책임자인 빈센트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협상의 자리에 나와서도 통역 자격으로 온 비아라에게 무례하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지역민들은 적대감을 품고 경계하고, 그로 인한 두 집단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상대집단을 이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수정주의) 서부극에 빗댈 만 하다. 카메라가 광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도 어렵지 않게 서부극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눈치로, 몸짓으로, 혹은 알고 있는 외국어들을 모두 동원해 더듬거리면서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에서 혹자는 <수색자>(1956)의 한 장면이 변용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영어를 잘 하는군! 누구에게 배웠나? 코만치어를 잘 하는군! 누구에게 배웠나? 세월이 지난만큼 역마차, 총격전, 결투장면은 없다. 그 대신 <베스턴>의 남자들은 트럭을 몰고 중장비를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인물들은 여전히 말을 탈 줄 안다. 그뿐인가. 주인공만큼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총을 잡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거나 당기기도 했다.

    주어진 임무를 마친 뒤, 카우보이는 그의 상징적 고향인 황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 것도 확정짓지 않는다. 바닥에 쓰러졌다가 일어나 어둠 속을 향해 걷던 마인하르트는 별안간 방향을 바꾼다. 하지만 그쪽이 한창 흥에 겨운 마을의 잔치집인지 그의 숙소인지조차 금방 가늠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빛과 음악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서야 그가 댄스홀로 간다는 걸 알 수 있다. 물기가 어리는지 불빛이 비쳐서인지 그의 눈동자가 빛난다. 마인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춤을 춘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우리의 예측은 빗나갈 수 있다. 이 영화의 불확실함은 삶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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