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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밀수>, 해녀들의 해양 액션 활극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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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해녀들의 해양 액션 활극
김경욱(영화평론가)
류승완 감독의 <밀수>는 흥행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업적 요소를 이리저리 변형해서 버무려 넣은 ‘하이컨셉트’ 영화이다. 먼저 투톱 영화는 대부분 두 명의 남성 스타가 중심인데, <밀수>에서는 여성 스타 김혜수·염정아를 내세웠다. 무더운 여름 개봉에 맞춰 시원한 바다를 무대로 한 액션 활극은 스펙터클 한 눈요깃거리를 연출해냈다. 여기에 1970년대를 배경으로 최근 유행인 ‘레트로’ 감성을 활용했다.
서해안의 어촌 군촌, 엄진숙(염정아)은 아버지의 어선 맹룡호를 타고 절친 조춘자(김혜수)와 다른 해녀들과 함께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한다. 그러나 바닷가에 세워진 화학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나오는 바람에 점점 상한 해산물이 늘어가자, 그들은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진다. 이때 엄 선장은 브로커로부터 밀수에 가담해 돈을 벌자는 제안을 받고 수락하게 된다. 밀수업자가 바다에 물품을 빠뜨리면, 해녀들이 그것을 건져서 판매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브로커는 밀수의 규모를 키우자며, 엄 선장 몰래 춘자와 진숙에게 금괴 밀수를 하자고 한다. 그런데 바닷속에서 금괴 상자를 건져 올리려는 순간, 세관 계장 이장춘이 세관선을 타고 나타난다. 다급하게 무마하려는 과정에서 엄 선장과 아들이 죽고 진숙과 해녀들은 검거되고 춘자는 도망친다.
몇 년 뒤, 세관에 밀고한 장본인으로 지목된 춘자가 전국구 밀수업자 권 상사(조인성)와 함께 군촌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 없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는 ‘팜므 파탈’ 캐릭터로 설정된 춘자는 진숙의 안타고니스트가 된다. 그러나 춘자는 배신에 치를 떠는 진숙에게 다시 밀수 일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자신이 아니라 엄 선장 밑에서 일하던 장도리(박정민)가 진짜 배신자라고 말한다. 진숙은 춘자에 대한 의심을 쉽게 거두지 않고, 관객도 진숙이 또 배반당하게 될지 궁금하게 된다.
곧 장도리가 악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후 영화는 고전 서부영화처럼 이분법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간다. 따라서 춘자와 진숙 그리고 해녀들에 다방 마담 고옥분까지 합세한 여성들은 신뢰와 의리로 똘똘 뭉친 긍정적인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반면, 장도리는 누나처럼 따르던 진숙을 제거하려 하고, 권 상사는 춘자를 이용해 다이아몬드 밀수를 추진한다. 여기에 밀수범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던 이장춘도 뒤로는 장도리와 결탁해 이익을 챙기는 부패한 공무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결과 남성들은 모두 악당 캐릭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은 공간에서도 작용해, 육지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바다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배신자의 정체를 찾아내고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제각기 음모를 꾸미는 등, 스릴 넘치는 요소들이 적지 않은데도, 영화는 매우 지리멸렬하게 전개된다. 그러다 장도리 일당과 권 상사 일당이 거액의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고 살육전을 펼치는 액션 장면이 등장하면서 다소 활기를 띠게 된다. 장도리가 장도리를 휘두르는 장면은 박찬욱의 <올드 보이>에서 그 유명한 오대수의 장도리 장면을 흉내 낸 건지 오마주인지 모호하다. 장도리는 권 상사 일당을 제거하고, 이장춘과 함께 해녀들을 위협해 보석 가방을 건지려고 바다로 간다. 장도리와 이장춘은 부하들을 시켜 해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지만, 여성들의 공간인 바다에서 오히려 남성들은 모두 수장되고 만다. 다만 권 상사는 장도리와 대결할 때, 춘자를 보호하려 애쓴 공로가 있기 때문인지 부상을 크게 입기는 했으나 목숨은 부지한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에 뮤지컬 장르가 낙관주의의 판타지를 제시하며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밀수>는 극심한 무더위에 암울한 뉴스가 즐비한 현실에서 유쾌한 해피엔딩의 판타지를 선사하며 흥행몰이를 하고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도입부에서 해안가 저 멀리에 즐비하게 건설된 공장의 이미지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데, 해녀들이 밀수를 하게 되는 설정으로 제시된 다음, 그 이미지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위험한 오염물질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는 더 이상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밀수 따위의 범죄에 이용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방출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죽어가는 바다의 출현은 매우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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