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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을 위한 식탁> :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날까?202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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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위한 식탁> :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날까?
김경욱(영화평론가)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자식을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식을 (너무너무) 위해서 한 일인데, 자식에게 ‘독’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그 ‘독’이 심신의 증상으로 나타날 때, 당황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모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유독성 화학물질처럼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침투해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 고통을 준다.
김보람의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이러한 문제를 모녀 관계를 통해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먼저 딸 채영의 입장을 살펴보자. 채영이 어릴 때 찍은 모녀 사진을 보면, 엄마와 딸은 모두 웃고 있다. 그런데 딸은 엄마의 팔에 손을 얹으며 엄마를 감싸 안는 모습인 데 비해, 엄마는 두 팔로 자신의 두 다리를 감싸고 있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엄마와 채영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마도 채영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항상 바쁘게 일하느라 딸을 방치했다. 무주로 이주해 대안학교 사감으로 일하게 된 엄마가 혼신을 다해 학생들을 돌보자, 채영은 더욱 심각한 애정 결핍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채영의 말, “학교 갔다 오면 사감실에 언니들이 누워있고, 엄마는 나만의 엄마가 아니라 모두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결국 채영은 15살 때, ‘나는 결코 엄마의 마음에 드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 거식증이라는 극단적인 병에 걸린다. 엄마가 딸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자, 채영은 엄마를 향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다. 채영은 자신의 거식증을 ‘삶의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열심히 살려고 한 행위’라고 설명하는데,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거나 ‘결코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채영의 말, “엄마의 마음에 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결핍을 느끼겠구나.” 거식증 치료를 받고, 퇴원한 채영에게 이번에는 폭식증 증상이 시작된다. 채영은 자신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엄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애정 결핍의 허기를 채운다.
그러면 이제 엄마의 입장을 살펴보자. 1980년대에 20대였던 엄마 박상옥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러나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운동권이 뿔뿔이 흩어지자 자신의 힘으로 한국 사회를 바꾼다는 자부심은 휴지 조각처럼 땅에 떨어졌다. ‘이념을 잃고 삶을 다 잃은 패잔병’ 상태에서 아이를 낳게 되자, 상옥은 혼자 생계를 꾸리는 데 급급해 딸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심신의 상태가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채영을 키우려고 힘들게 일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상옥의 말, “인생이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채영이가 가끔씩 내 인생에 들어왔다.” 대안학교에서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면서, 그녀는 다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된다.
그런데 엄마가 어렵게 심신의 안정을 찾고 자신의 인생에 만족감과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 딸에게 거식증이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도 채영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며 엄마의 마음에 들고 싶어, 15살 때까지 거의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너무나 착하고 똑똑한 딸이었을 것이다(TV 다큐멘터리 방송에 출연했던 모녀의 과거 모습을 보면 이렇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딸이었기에 채영은 엄마의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상옥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 속에서, 아이의 병의 원인을 이해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일종의 합리적인 선택으로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 결과 모녀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이 생긴다.
채영이 호주로 떠나는 장면에서, 엄마는 딸을 껴안지만, 딸은 엄마가 눈물을 흘린 다음에야 비로소 오른손으로 엄마의 어깨를 두드린다. 위에서 언급한 사진에서의 모녀의 모습과는 상반된 장면인 셈이다. 엄마에게 닿지 않는(않으려 하는) 채영의 왼손에 엄마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다면, 오른손에는 엄마를 괴롭혔다는 죄책감이 담겨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상옥의 엄마이자 채영의 할머니 이야기이다. 상옥의 설명에 따르면, “딸을 많이 낳아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던 친정엄마는 40년 이상 끊임없이 음식을 토해내면서 살았다. 그게 엄마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던 것 같다.” 딸을 많이 낳은 게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 되었던 상옥의 엄마는 아마도 딸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옥은 헌신적인 운동권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대의명분의 충족감 속에서, 자신의 애정 결핍 상태를 은연중에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자신감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채영의 말, “음식을 만들면 나 정도라도 이 세상에 쓸모가 있을 것 같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심리 상담사 앞에서 “내가 잘했어”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할머니, 엄마, 딸로 이어지는 삼대의 연결이 싫었다”고 말하는 상옥은 외부 상황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엄마에 대한 분노로 딸을 거부하며, 자신의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딸에게 주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심리적 문제는 자식으로 대를 이어가며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상옥과 채영이 사랑을 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분노를 무의식에 억압하고 있다면, 그 분노를 의식으로 꺼내어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그 분노가 너무 커서 그것을 인식할 때 모녀 모두 멘탈붕괴에 이를까 염려하는 방어기제 속에서, 상옥과 채영 그리고 영화는 핵심 주변을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옥과 채영은 할머니의 제사상을 차린다. 그리고 두 모녀는 제사 음식을 함께 먹는다. 따라서 세 모녀가 상 하나를 두고 함께 자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더 적합한 제목은 ‘세 사람을 위한 식탁’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상옥과 채영 사이의 풀리지 않는 문제는 상옥과 친정엄마 사이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서부터(예를 들면, 상옥이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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