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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시네마 XVI <타부>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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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의 영화 <타부>
이광호(부산영화평론가협회)
조금 우회하며 출발해보자. 여전히 논쟁이 있지만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위치하는 <북극의 나누크>(1922)를 만들면서, 로버트 플래허티는 사실관계의 조작으로 관객을 고민하게 했다. 그것은 이미 문명화되어 쓰이지 않는 전통적 사냥법의 재연을 요구하거나, 서로 연관 없는 인물들에게 가족의 역할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요컨대 그는 다큐멘터리를 보다 사실적으로(real) 완성하기 위해서 허구적(fiction) 조작술을 동원한 것이다. 이때 플래허티가 피할 수 없는 비판은 "있는 그대로를 찍는다"는 다큐멘터리의 대원칙을 위배했다는 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의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북극의 나누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개인적인 의견이 갈리겠지만 객관적인 사실 혹은 역사의 측면 잠시 밀어둔다면, 나는 <북극의 나누크>에 담긴 이미지들이 어떤 점에서는 진실하다고(real)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냥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나르고, 사냥을 위해 작살을 던지고, 이글루를 짓는 행위 등이 설령 몇몇 연출과 요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 촬영된 이미지들은 최소한 "그것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시공간적 현재성의 기준에서만큼은 완전한 실체이기에 리얼하다. 이것이 어떤 관점에서는 다소 기만적이고 비열할지라도, 누군가 그 이미지로부터 받은 감흥 자체는 온전하고 고유하다는 틀림없고 어쩌면 애석한 사실이 영화-다큐멘터리에는 운명처럼 놓여 있다.
<타부>(1931)의 도입부에 나타나는 "이 영화에는 실제 원주민만이 등장(appear)합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얼마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남쪽 섬의 생활상 이모저모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정보 전달의 목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원주민'들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사회적, 역사적, 혹은 인류학적 관점에서(혹은 백인 중심의 제국주의스러운 뉘앙스로) 그들의 이국적 자태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곳에 '실제' 원주민의 신체와 표정, '실제' 원주민의 몸짓, '실제' 원주민들의 거주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타부>는 그러한 민족지적 탐구나 지리학적 정보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과거에 골드러시에 매진하며 탐험가로 왕성히 활동했던 로버트 플래허티는 무르나우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지만 중도 하차했고, 무르나우는 항상 그래왔듯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순수한 움직임의 포착에 주목한다.
<타부>의 전체를 흐르고 있는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미장센은 바로 물의 이미지이다. 물고기가 뛰노는 바다, 하강하는 숲속의 폭포수, 섬의 주민들과 커다란 선박이 만나는 바다, 혹은 소년을 가로막는 거친 파도의 행렬은 <타부>에서 잊기 힘든 이미지들이다. 이것은 솜씨 좋은 각본가의 필력이나, 연출자의 정확한 지시, 혹은 치밀한 미술적 설정이나 배우의 노련함 등의 인위적 순간들로는 도저히 포착될 수 없다. 이는 순수한 자연이 뿜어내는 순간적이고 고유한, 생동으로서의 물성적 유능함이다. 그 앞에서 카메라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종종 무르나우의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 이야기되는 것은 그의 유려하고도 탁월한 카메라 움직임인데, 가만 보면 이런 표현은 거꾸로 카메라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현상에 대한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무르나우의 영화에서는 움직임으로 인한 효과를 바라고 형식이 차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담으려는 이미지를 얼마나 화면에 아름답게, 혹은 구체적으로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영화의 형식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매니 파버의 말을 빌리자면, "사건의 실행과 절차가 카메라와 관계없이 오로지 사건 내부의 요소에 의해서만 추진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가치도 담보하지 않은 채 지극히 사실적인 현상을, 최대한 꾸밈없이 담으려는 투명한 태도로부터 포토제니의 마술적 매혹을 경험하게 된다. 조심스레 그것을 영화적 순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타부>의 초반부는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문명이 닿지 않은 보라보라 섬의 파도 치는 바다, 마치 안무하듯 작살을 던지는 건장한 청년들의 육체적 활동, 폭포수에 몸을 맡기는 소년과 소녀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타부>의 서사를 단순히 진전시키는 데 있어서 이런 춤과 음악의 흥겨움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서사에 포섭되지 않으며 오직 자율적인 현재성으로만 빛나는 이 잉여적인 순간들의 출현은 충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도리어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낙원과 같은 보라보라 섬에 불행이 닥치고, 그 이후를 도맡는 노인의 행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섬에서 제약 없이 활동하던 노래와 춤, 신체적 몸짓, 그 자체로 역동성을 품은듯한 청년들의 선명한 몸의 근육과 환한 미소 등은 노인의 기질과 완전히 상반되는 종류의 것이다. 작은 축제가 열려 모두가 흥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도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 그의 몸과 몸짓은 어딘가 투박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외양적으로 소년과 소녀들에게 팔과 다리를 드러내어 그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담보하는 의상이 있다면, 반대로 노인은 항상 망토처럼 보이는 천을 두르고 있다. 그곳에는 어떠한 움직임의 가능성도 포착되지 않는다. 노인은 파티를 중지시킬 때 그저 위아래로 손을 내리는 단순한 제스처만을 취하고, 경고를 위해 부동자세에서 활을 겨누고, 소녀를 구하러 오는 소년을 차단하기 위해 그저 밧줄에 칼을 살짝 가져다 댄다. 달리 말하면 그는 너무나 정확하고 효율적이며 단발적인 움직임을 구사할 뿐이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노인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은 인상 깊다. 그것은 우울함과 공포 장르의 단골무대였던 표현주의를 상기시키는, 어둠이 들어찬 밤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깊은 밤, 섬에서 도망친 소년과 소녀가 잠을 자고 있다. 이때 달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명확하게 구획된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노인은 마치 악마처럼 다가와(그는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또 한 번의 밤이 도래했을 때,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별안간 출현하여 소년을 겨누고 있다.
이 지점에서 무르나우가 평생 견지했던 시선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movie)를 살아있게 만드는 건 화면 안의 사물 혹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move) 것이라는 다짐을 서사 안으로 끌어들여 그 소박함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노인의 실체는 단순히 서사적으로 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아니라, 투박하고 느릿한 그의 몸을 빌려 젊은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부동의 사신이다.
<타부>를 일평생 영화의 시원적 형상을 포착하고자 했던 무르나우의 생각이 서사에 알레고리로 녹아든 결과로 볼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는 단순히 움직임 자체에 무한한 긍정을 외치지는 않는다. 가령 그것은 결말에 나타나는 물의 역할로 감지된다. 초반부 소년의 움직임을 더욱 극대화하며 생의 감각으로 자리하다가, 엔딩에 이르자 매서운 파도로 돌변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물의 두 가지 성격을 떠올려보자. 이때 소년은 움직이지 않지만 대신 파도를 품은 물이라는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압도적으로 운동한다. 이는 특정한 대상이 지닌 에너지가 다른 것과 충돌하며 어떻게 자리 바꾸고, 서로의 힘을 나누는지에 관한 하나의 탐구적 사례다. 요컨대 움직임이란 고정불변의 자리에 놓이지 않고, (이미지들이 그러한 것처럼)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자신의 옷을 바꿔 입으며 일종의 교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소년의 죽음이 전조였을까, 무르나우는 <타부>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생을 떠났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그가 문학이나 회화, 혹은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결코 재진술될 수 없는 영화적 감각을 새기고자 했던 시도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이 내밀한 연합체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감흥으로 전해지는 순간순간을 형용하기는 어려우며, 설령 가능할지라도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타부>는 귀중한 움직임으로서의 영화(movie as movemen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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