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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흐르다>, 아빠에게 가는 ‘험난한’ 길2023-12-18
영화 <흐르다> 포스터 이미지



<흐르다>, 아빠에게 가는 ‘험난한’ 길


김경욱 (영화평론가)


김현정 감독의 <흐르다>(2023)에서, 진영(이설)에게 아빠(박지일)는 이웃집 아저씨보다 더 불편한 존재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진영은 목욕탕에서 머리를 말린 다음 거실에 누워있는 아빠를 피하려는 듯이 자기 방으로 간다. 진영의 아빠는 이른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이다(이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인지,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은 대구 사투리를 구사한다). 아빠는 집에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텔레비전만 본다. 아내가 말을 시켜도 그저 필요한 말만 몇 마디 하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가부장이다.

서른 살이 된 진영은 이렇다 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니처럼 결혼해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다. 외국인 회사에 취직한다는 다소 막연한 목표를 갖고 취준생 모임에 나가는 중이다. 부모에게는 못마땅할 진영의 상황 때문인지, 엄마와 딸의 사이가 그렇게 살가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녀는 같이 언니네 가족을 만나러 가고, 목욕가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흐르다> 스틸컷 이미지


진영이 캐나다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결정했을 때,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엄마는 가족의 중추 역할 뿐만 아니라 아빠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아마도 그녀의 조력이 없었다면, 현실 감각과 경영 능력이 부족한 아빠로 인해 공장은 벌써 문을 닫았을 것이다.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아빠와 남처럼 지낼 수 있었던 진영은 엄마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공장에 나가 엄마가 했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진영은 아빠와 직접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진영과 아빠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을 보면, 두 사람은 좌석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앉아있다. 한 사람에게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 화면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멀어 보인다.


영화 <흐르다> 스틸컷 이미지2


그런데 아빠는 마치 그동안 엄마가 사업이 번창하는 데 방해물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새로 채용된 공장장의 감언이설에 혹해 성급하게 사업 확장에 나선다. 아빠와 공장장이 바이어들과 함께 술집에 간 장면에서, 아빠는 술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어린 시절, 아주 왜소한 체격이었는데, 형들이 동네 양아치와 억지로 싸움을 붙였고 그때 코를 맞아 비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다는 얘기를 늘어놓는다. 아마도 작은 체구에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맞은 경험은 남성으로서 자존심에 크게 상처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아빠는 가부장으로서 남자답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필요 이상으로 더 고집 세고 퉁명스런 태도를 강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영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빠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흐르다> 스틸컷 이미지


진영은 아빠의 시도를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엄마가 일궈낸 공장을 지키려고 한다. 엄마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공장은 유지되지 못했을 텐데, 아빠는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빠는 엄마 같은 조력자 없이 혼자서는 제대로 공장을 꾸려나갈 수 없는 상태인데, 그 사실을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가부장이 여자의 말에 휘둘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진영이 아들이었다면, 아빠는 공장을 물려줄 생각을 하면서 진영의 의견을 잘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딸인 진영의 의견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한다. 결국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진영은 세무사의 조언에 따라 아빠에게 최선의 선택지를 내민다. 이번에도 아빠는 진영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진영은 결국 아빠를 도우려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 사이 아빠는 가장 안 좋은 무리수를 둔 끝에 감옥까지 가게 된다. 진영이 면회하러 왔을 때, 아빠는 “나가서 영어 열심히 배워와서 일을 거들어 달라”면서 “너 똑똑하다”고 여전히 퉁명스런 말투로 말한다. 아빠가 딸의 능력을 인정할 때, 부녀 사이는 한 뼘 정도나마 가까워진 것 같다.


영화 <흐르다> 스틸컷 이미지4


진영은 그런 아빠를 두고 캐나다로 떠나야 할지 망설임에 망설임을 거듭한다. 결국 떠나기로 결심한 진영은 길에서 주저앉아 흐느껴 운다. 엄마의 사망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도 눈물 한 방울 등장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장면을 위해 아껴두었던 것 같다. 타인과 문제가 생기면 손절 하면 된다. 그러나 가족 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애증’의 감정이 겹쳐서 고통은 더욱더 배가 되곤 한다. 진영의 울음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아빠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도 불구하고 걱정하고 염려할 수밖에 없는 딸의 심정을 드러낸다. 

진영이 떠나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빠는 일자리를 찾아가며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마련한다. 진영은 캐나다의 카페에서 일하며 워킹홀리데이를 진행한다. 그렇게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게 진영과 아빠 모두에게 최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서른 살 진영은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부모에게서 독립해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아내에게서 아들처럼 돌봄을 받았던 아빠는 아주 예전에 이미 어른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돌보며 자립해서 살아가야 한다.

영화는 진영이 언니가 보내 준 가족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밝은 표정으로 웃는 언니와 형부, 조카들의 사진을 넘겨보는데, 다음 사진에는 엄마의 무덤가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진영에게 그런 아빠의 모습은 안쓰럽게 다가온다. ‘흐르다’라는 제목처럼, 진영과 아빠 사이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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