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내면의 여름이 노래할 때2024-03-05
-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내면의 여름이 노래할 때
김경욱(영화평론가)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을 대표하는 천재 음악가이다. 마에스트로였을 뿐만 아니라, 교향곡, 오페라, 발레곡, 브로드웨이 뮤지컬, 영화음악 등을 작곡했고, 탁월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번스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영화다.
전기 영화의 각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실존 인물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와 어떤 사건에 초점에 둘지 결정하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음악 분야뿐만 아니라 대학 강연과 저술 활동, 인권 운동 참여 등, 폭넓은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인물이다. 브래들리 쿠퍼 감독은 다채로운 번스타인의 인생에서 음악가로서의 주요 경력과 번스타인과 아내 펠리시아의 관계를 조명하는 각색을 했다. 그 결과 번스타인의 사회활동과 좌파 유대인으로서 매카시즘 시기에 겪은 고난 등은 재현되지 않았다.
영화는 번스타인이 인터뷰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해, 번스타인의 성공 신화가 시작된 시점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영화의 본문은 번스타인의 인터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1943년, 25살의 번스타인은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병에 걸려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급하게 그를 대신해 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끊은 번스타인이 커튼을 열어젖히면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방안이 환해지는데, 이 장면은 대타로 나선 공연의 성공과 더불어 창창한 앞날을 예고한다. 이때, 같은 방 침대에서 잠자는 남성의 모습은 번스타인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브래들리 쿠퍼는 연출과 함께 번스타인 역을 맡았다. 아마도 번스타인을 꼭 연기해보고 싶었거나, 어떤 배우보다 번스타인 역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실존 인물의 연기에서 관건은 분장(이 영화에서 번스타인의 20대에서 70대까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분장술은 진짜 놀랍다)과 연기를 통해 그 인물을 얼마나 흡사하게 재현하는가에 있다. 여기에 더해 번스타인 연기에서의 핵심은 지휘하는 모습의 재현이었을 것이다. 번스타인은 ‘레니 댄스(Lenny Dance)’로 불리는, 열정적으로 지휘봉과 손을 놀려대고 지휘대에서 발을 구르거나 점프까지 할 정도로 과장된 지휘로 유명하다. 브래들리 쿠퍼는 지휘 장면을 대체로 짧게 연출하다가 ‘말러 교향곡 제2번’을 공연(영화에서의 마지막 공연 장면)하는 영화의 3분의 2지점에서 번스타인 연기의 승부를 건다(번스타인처럼 지휘하는 연기를 위해 몇 년 동안 지휘를 배웠다고 한다). 6분에 걸친 이 공연 장면에서, 브래들리 쿠퍼는 번스타인에 빙의한 듯 신들린 연기를 펼침으로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장면을 위해 영화를 찍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의 지휘 연기의 자신감은 엔딩 크레디트에서 번스타인의 실제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1946년, 번스타인은 한 파티에서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배우 펠리시아를 만나 1951년에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37살의 번스타인이 펠리시아와 함께 인터뷰하는 장면은 너무나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다. 번스타인의 명성이 점점 더 커지는 가운데, 펠리시아는 남편의 엄청난 스케줄을 관리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다. 연기 활동은 자투리 시간에 한다. 그래도 펠리시아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 같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결혼했다. 아마도 펠리시아는 최선을 다해 아내 역할과 엄마 역할을 잘하면 번스타인도 결국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포기하리라고 기대했거나, 어느 정도 그의 성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나이가 들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번스타인과 펠리시아가 풀밭에서 등을 기대고 앉은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고, 두 번째는 펠리시아가 암에 걸린 다음이다. 그 자세는 서로의 등이 맞닿아 있어 너무 가깝지만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상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얼굴 표정은 어떤지 손과 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등 부위를 제외하면 상대에게서 자유롭다. 그러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균형이 깨지면서 다른 한 사람은 쓰러질 수 있으므로, 서로의 등을 잘 의지하고 있어야 한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을 사랑하기에 기댄 등을 뿌리치지 않고 그의 행복과 창작활동을 위해 최대한 맞춰주려고 한다. 그녀는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 그렇게 한다고 믿었지만, 점점 한계에 이른다. 펠리시아가 드레스에 화려하게 꾸민 모습으로 무대 뒤 편에 서 있는 장면에서,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지배하듯 뒤덮는다. 그녀가 번스타인과의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지점에서 영화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펠리시아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의 성적 취향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지만, 소문은 점점 퍼져간다. 번스타인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주변에 여러 남성을 거느리며 동성애 행각을 멈추지 않는다. 정신이 초롱초롱하게 깨어있고 생기가 넘쳐흐르던 펠리시아는 우울증과 분노 그리고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그녀가 옷을 입은 채 수영장에 뛰어들어 물속에 앉아 있는 장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나타낸다. 결국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말러 교향곡 제2번’을 공연할 때,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이 보고 싶어 만나러 온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다음, 화면 비율은 1.33:1에서 1.85:1로 바뀐다. 흑백에서 컬러 또는 화면 비율의 변화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프롤로그의 번스타인 인터뷰로 돌아가 막을 내린다. 번스타인은 “아내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말한다. 만일 펠리시아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음악가로서 활동 에너지가 “내면의 여름이 노래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내면의 여름이 노래하는 건 성적 욕망의 충족을 의미한다. 그는 “여름이 노래를 멈췄다면 자살했을 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펠리시아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그들은 이전의 부부 생활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번스타인과 펠리시아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단정하고, 한 편을 비난하거나 다른 한 편을 동정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다만, 인간의 복잡한 욕망과 감정, 삶의 아이러니를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미지 출처: IMDb
- 다음글 <파묘>, K-오컬트 영화의 맛
- 이전글 <길위에 김대중>, 인동초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