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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시네마 XVI '유리 노르슈테인 감독론'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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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노르슈테인 감독론 : 동심의 파수꾼
김영광 (부산영화평론가협회)
1. 감독과 데뷔
노르슈테인은 <케르제네츠의 전투>(1971)부터 이름을 알렸다. 스승 이반 이바노프-바노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절지 애니메이션(Cut-out Animation)’을 혁신했다. 관절 부위가 움직이는 그림을 스톱 모션으로 촬영하는 ‘컷-아웃 애니메이션’은 인형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과 달리 2차원 종이 공간을 전제로 한다. 배경은 평면적이고 캐릭터의 움직임은 제한된다. <케르제네츠의 전투>에서 노르슈테인(과 그의 스승)은 중세 러시아 예술의 꽃으로 불린 이콘을 캐릭터로 썼다. 나무 화판에 그린 듯한 성화를 움직이게 만들어 엄정한 캐릭터를 구현했다. 절지의 제한된 움직임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은 우둘투둘한 벽화처럼 구현했다. 프레스코의 웅장함만 살리고 표면의 질감을 가시화한 것이다. 엄정한 캐릭터들이 웅장한 배경에서 벌이는 전투씬은 엄숙미와 장엄미를 뽐낸다. 길쭉한 시네마스코프 비율과 경쾌한 몽타주는 전투에 역동성을 더했다. 양쪽에서 말들이 달려오는 긴장감, 난전이 주는 참상을 율동적으로 묘사했다. <케르제네츠의 전투>는 컷-아웃 기법의 단점을 장점으로 극대화한 작품이다. 지금은 컷-아웃의 기법의 대가로 불리는 노르슈테인의 본격 데뷔작이었다.
2. 평가와 해석
노르슈테인은 애니메이션 기법을 혁신했다는 평가와 별개로 정치적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애니메이터로 활약하던 그가 처음으로 감독을 겸한 작품 <25일, 첫날>(1968) 덕분이다. 아르카디 추유린과 공동 연출한 이 작품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강렬하게 묘사했다. 첫 영화의 강렬함은 노르슈테인 각 작품들의 해석을 이념 안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케르제네츠의 전투>는 키예프 공국이 스라프 지방을 통일한 러시아 기원을 다루고 있는데, 통일된 988년은 러시아 국교가 정교로 결정되었고 비잔틴에서 이콘이 들어온 중요한 시기다. 이후로 이콘은 전장-신전-가정을 수호하는 삼위일체의 성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러시아 예술의 시원 격이 되었다. <케르제네츠의 전투>에서 노르슈테인의 목적은 순수한 쪽에 가깝다. 러시아 땅의 정신은 러시아 예술의 힘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협력 관계의 뿌리를 (스승과 함께) 구현했을 따름이다. 허나 <25일, 첫날>에 가해진 민중의 승리, 사회주의 찬양 같은 해석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여우와 토끼>(1973)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투쟁으로, <왜가리와 두루미>(1974)는 냉전 시대의 우위 논쟁으로 해석됐다. <안개 속의 고슴도치>(1975), <이야기 속의 이야기>(1979)는 반체제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어 검열당국의 주시를 받았다. 전쟁에 대한 내면의 공포, 황폐한 영토의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이유다.
3. 재해석과 고찰
노르슈테인 작품들의 재해석은 애니메이션 본연의 가치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이 움직일 수 없는 물체들을 움직여서 만드는 어떤 세계라면, 그 물체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들이 어떤 세계의 가치를 구현하는지 주목하면 될 일이다. <케르제네츠의 전투>에서 두드러진 움직임은 ‘절도’ 같은 것이다. 엄정한 캐릭터가 만든 움직임이며, 웅장한 배경과 함께 엄숙미와 장엄미의 세계를 구현한다. 작품 전체로 보면 러시아 세계의 ‘뿌리(기원-시원)’를 구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다른 가치도 볼 수 있다. 나무 화판에 그려진 듯한 이콘의 주름, 우둘투둘한 벽화의 질감은 ‘움직임의 흔적’을 보게 한다. 간접적이지만 시간의 흐름(늙음-굴곡)과 모종의 ‘중력감’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 간접 중력감은 캐릭터와 배경 묘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좌우에서 말들이 달려올 때의 긴장감, 그 단체 움직임이 실감나는 건 ‘땅의 울림(중력의 마찰)’이 연상돼서다.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2차원 공간에서 활용한 효과다. 또한 난전의 참상을 율동적으로 묘사한 몽타주도 들 수 있다. 절제된 칼의 휘두름, 절지 자체가 쓰러지는 모습을 교차한 전투씬은 공기의 저항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시화된 ‘중력의 제한’이다. 끝으로 전투 직후의 연출을 꼽아야 한다. 전장에 가득한 전사자들이 사라지고 나무 방패와 무기가 지층을 형성한다. 층층의 레이어로 묘사된 3차원 지층은 카메라의 상승과 함께 벽으로 세워진다. 앞서 율동적인 몽타주는 이콘들의 육신이 러시아에 뿌리내리는 한편 뿌리로 승화하는 운동인 셈이다. 사실 뿌리의 운동이란 중력의 마찰과 제한을 동시에 구현하는 ‘중력감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실사 영화의 움직임(중력의 대면과 대결)과 구분되는 애니메이션의 율동(절도 같은 것), 실사 영화의 예술성(생명의 운동성)과 분별되는 애니메이션 본연의 가치(생명력의 상징)가 될 수도 있다. <케르제네츠의 전투>는 애니메이션 세계의 ‘소관’도 고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4. 동심과 소관
노르슈테인은 스승과의 협력 작품을 끝으로 자기 세계의 소관을 구현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 <여우와 토끼>는 카펫에 수놓은 듯한 그림체를 선뵌다. 캐릭터는 귀여운 동물들, 그들을 대변하는 건 성우의 다정한 목소리다. 질감보다는 촉감이, 긴장감 대신 운율감이 더해졌다. 부드러운 ‘동화의 세계’인 것이다. 내용도 간단하다. 나무집에 사는 토끼가 있고 얼음집에 사는 여우가 있다. 봄이 오자 집이 녹아버린 여우는 토끼의 집을 점거한다. 문제라면 토끼의 집을 되찾아주는 동물이 작은 수탉이라는 점이다. 어째선지 늑대, 불곰, 소는 여우를 쫓아내지 못한다. 이 아리송한 문제는 동물들 간의 차이를 주목하게 한다. 그런 까닭일까. 수탉은 혼자 칼을 찼다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군이 되기도 했다(졸지에 여우는 집하나 없는 부르주아, 토끼는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했다). 주목할 차이는 따로 있다. 수탉 혼자만 조류라는 것, 마냥 부드러운 포유류의 털이 아닌 ‘깃털’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수탉의 깃털은 나뭇잎과 모양이 흡사하다. 그리고 여우에게 뜯긴 수탉의 깃털은 나뭇잎처럼 之자로 낙하한다. 그 깃털을 본 다른 동물들은 몸을 숨기지만 토끼는 칼처럼 붙잡는다. 불곰이 말려도 수탉에게 협력한다. 함께 여우를 쫓아내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깃털-나뭇잎-칼의 관계는 중력에 저항하는 부드러운 움직임, 주위 시선에 개의치 않는 곧은 행동을 상징한다. 뿌리는 다르지만 ‘심지’가 있는 협력 관계인 것이다. 작품의 결말도 그렇다. 수탉은 러시아의 상징인 불곰에게 깃털 하나를 건네주고 토끼와 함께 산다. 나무집도, 토끼와의 협력 관계도 심지 있게 지키기로 한 것이다. <여우와 토끼>는 마냥 부드러운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 ‘동화 세계의 심지’를 구현한다. 물론 그 심지라는 것은 불우한 친구를 보면 끝까지 협력하는 ‘동심’일 거다. 그리고 노르슈테인 세계의 순수한 본연의 소관일 거다. 중력의 세계에서 놓쳐버리는 ‘심지’를 전달하는 것, 애니메이션 세계의 심지인 ‘동심’을 끝까지 구현하는 것 말이다.
이후로도 노르슈테인의 소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동화를 만들었지만 동심을 구현하는 방식을 우회했다. 그런 의미에서 <왜가리와 두루미>는 ‘우화의 세계’를 그려낸다. 역시 깃털을 가진 두 조류가 주역이지만, 그들에겐 수탉의 심지가 없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두 조류가 번갈아가면서 청혼하고 거절하길 반복하는 내용이다. 움직임은 한 쪽이 걸어가면 다른 쪽이 걸어오는 좌우운동이 전부다. 여기서 노르슈테인은 당김과 당겨짐이 불가분인 장력을 가시화한다. 배경에 묘사된 중력(세차게 내리는 비)의 운동과 무중력(미동 않는 앙상한 갈대들)의 상태를 대비시켜 장력의 율동을 가시화한다. 한 번의 날갯짓도 없는 두 조류의 율동적인 걸음으로 ‘중력감’을 상정하는 것이다. 상대와 끝까지 함께하려는 심지는 아니나, 상대를 버리고 날아갈 순 없다는 ‘우회의 심지’를 구현한 것이다. 수탉의 심지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심성의 깃털을 빌려, 우회적으로나마 동심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 <왜가리와 두루미>다.
5. 동심의 파수꾼
노르슈테인이 우회를 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연유일 거다.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중력의 세계가 동심을 잃어가는 탓일 게다. 놓친다는 건 협력하면 되찾을 수 있는 문제지만, 잃어간다는 건 무력하게 상실을 목도하는 일이다. 어쩌면 혼자서, 외롭게 말이다. 많은 대가들이 그렇듯 노르슈테인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어떤 직접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 속의 고슴도치>는 노르슈테인의 내면이란 ‘동심의 세계’를,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동심의 기억이란 ‘소관의 세계’를 그려냈다. 현실적으로 동심을 구현하고 구조할 방법은 없지만, 가능한 한 전달하려는 ‘동심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런 관계로 중요해진 건 자기 내면에 대한 경계, 점검, 성찰 같은 태도다. 이는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서 기묘한 이면 관계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주인공 고슴도치의 외관과 노르슈테인의 내관(날카로운 포유류의 털-심지는 있는 심성의 깃털), 요주의 이미지인 안개와 구멍의 관계(불명확한 시야의 세계-선명한 비가시적 세계), 이야기 내용인 모험과 안주의 관계(별안간 숲을 탐험한 고슴도치-위험하니까 차나 마시자던 불곰)가 그렇다. 다른 한편으로 중요해진 것은 자기 소관에 관한 태도다. 자기가 기억해내는 동심으로부터 거리감, 균형감,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늑대와 갓난아기의 동거 관계로 묘사된다. 늑대는 칭얼대는 아이를 물어버린다는 자장가 속 존재이자 동심의 기억을 소환하는 큰 이야기의 주체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다가 어떤 이유에서건 버려지게 되는 작은 이야기의 존재다. 외톨이 신세가 된 아기는 외톨이였던 늑대 품에 안기게 된다. 당연히 자장가 속 얘기처럼 물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악하게 우는 건 아기 쪽이고 늑대는 극도의 당황과 곤란을 겪게 된다. 여기서 노르슈테인이 보여주려는 거리감은 동심의 기억이 가지는 양가적 속성이다. 보통 동심의 기억은 추억의 형태로 소환되는데, 그 과정에서 주변의 보살핌과 희생은 배제하는 것이다. 늑대는 요람을 세차게 때론 천천히 흔들며 아기 달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끝나는 작은 이야기는 징글맞고 기만적인 동심도 있다는 걸 균형감 있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직전까지 울적한 정조를 풍기던 큰 이야기는 종착역에서 소박한 전환을 맞이한다. 칙칙폭폭 차분히 지나가는 기차소리, 마을 입구를 비추는 작은 가로등, 그 위로 흐르는 서민적인 애잔한 음악. 이 감흥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가능한 한 동심의 태도를 빌려 가늠한다. 그저 하루가 지나간 기분으로 이 곳에 서서 기다리겠노라고. 그것은 ‘동심의 파수꾼’만이 느낄 수 있는 소관의 감흥이라고. 나는 살아 있는 ‘영상시인’ 노르슈테인보다 그쪽이 어울린다 생각한다.
* 이 글에서 언급된 노르슈테인 작품의 기술 사항은 「유리 노르시테인의 Cut-out Animation에 관한 연구」(손영선, 숙명여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를 참고했다. 그리고 노르슈테인 작품들로부터 그 작품 세계를 고찰하는 일은 필자의 몫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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