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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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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아카이브 특별전 <마지막 국화 이야기>2019-05-02
4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2019 FILM ARCHIVE SPECIAL 2019 필름아카이브특별전 2019.4.30.(화) - 5.16.(목)

 

 

누군가를 위한 자리: <마지막 국화 이야기>

 

한창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국화의 꽃말은 지고, 고결, 절개라고 한다. 물론 제목에 꽃 이름이 들어간다고 해서 꽃말을 도식화된 상징으로 읽어내는 일은 유치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조구치 겐지의 1939년 영화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 국화의 의미는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지막이라는 명사가 국화란 단어 앞에 덧붙은 것은 제목이 인물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국화는 5세기경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인들은 국화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왕실의 상징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9일에 국화 축제를 열어 행복을 기원한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일본 문화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은 殘菊物語’. 뒤 두 글자 物語(모노가타리)’이야기를 뜻한다. 두 번째 글자 (기쿠)’국화이자 주인공 기쿠노스케를 뜻하며, 첫 번째 글자 ()’때늦게 남은’, ‘잔혹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니 우리는 <마지막 국화 이야기>남아 있는 기쿠의 이야기때늦은(혹은 잔혹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미조구치 겐지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마지막 국화 이야기> 또한 여성의 희생과 그러한 희생을 만들어낸 기구한 운명을 따라간다. 가부키 명가의 양자 기쿠와 하녀 오토쿠는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하지만, 둘의 행복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뒤늦게 다시 찾아온 행복은 더욱 잔혹하게 그들을 감싸며 형언하기 힘든 감흥을 전한다. 인물들은 완전한 체념이나 새로운 희망 그 무엇도 손에 쥘 수 없다. 단절은 희생과 고통을 만들어내었지만, 그 절단면들은 너무 늦게 재결합되고, 접속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단절을 만들어낸 어떤 힘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주변을 떠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이러한 단절과 접속을 공간을 활용해 나타낸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아름답게 여겨질 순간은 기방에 다녀온 기쿠와 아기를 안고 있는 오토쿠가 길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매우 긴 테이크로 찍혔다. 카메라는 두 사람보다 아래에 위치하여 두 사람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간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가까이서 잡기보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본다. 길 위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간간이 그들의 역방향으로 한 두 명의 사람이 지나갈 뿐이며, 누구도 그들을 앞지르지 않는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해 그 공간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기쿠와 오토쿠의 밤길 산책 장면에서처럼 영화 속 세계는 둘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순수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 순수하게 타인을 배려하고 흠모하는 세계와 주위의 말과 세평에 얽매인 세계. 이 두 세계는 서로 불화하며 두 사람을 불행의 길로 이끈다. 겐지의 카메라는 세계의 이러한 불화를 문턱으로 표현한다. 전경에 놓인 난간이나 사물, 혹은 구조물은 문턱의 기능을 수행하며 카메라와 인물의 공간을 각기 분리한다. 카메라는 그러한 문턱을 좀체 넘지 않는다. 전경의 구조물을 경유하여 그 인물을 향해 다가가거나, 인물에게 좀 더 다가간 쇼트로 커팅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패닝이나 횡축 트래킹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문턱을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인물을 쫓아가기 위한 선택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서책이 펼쳐지듯 나타나는 오프닝 크레딧의 형상과도 상통한다. 인물과 카메라의 그런 거리는 마치 무대와 관객의 거리와도 같다. 가부키 공연에서 관객이 무대 위로 침범할 수 없듯이, 카메라도 인물이 자리하고 있는 어떤 공간에 침범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인물들의 관계는 문턱으로 구획화된다. 겐지는 인물과 카메라, 그리고 관객을 각기 구획화된 공간에 자리하게 하면서 그 구획들의 관계망들을 통해 인물과 인물, 인물과 카메라, 인물과 관객의 관계와 위치를 영화적으로 직조한다.

 

문턱을 넘지 않는 카메라, 패닝이나 횡축 트래킹으로 인물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인물이 삶의 전환점을 맞닥뜨린 순간이기도 하다. 기쿠는 집을 떠나 오사카로 가지만, 오토쿠는 집안의 반대로 기쿠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오사카에서 재회한다. 오토쿠가 기쿠의 새로운 극단을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1년 전처럼 함께 길을 걷는다. 여기서 기쿠가 잠시 멈추더니 왼쪽으로 틀어 걸어가자 오토쿠도 그를 따라 몸을 돌린다. 그리고 카메라는 후진하면서 두 사람을 잡아낸다. 옆걸음이 아니라 뒷걸음치는 카메라는 두 사람에게 어떤 전환점이 찾아왔음을 알린다. 또 다른 전환점은 생명이 끊기기 직전에 오토쿠가 기쿠를 다시 만난 순간에 새겨진다. 카메라는 기쿠가 오토쿠를 만나기 바로 직전에 이전에 보여주었던 후진 트래킹을 다시 한번 보여주더니, 다음 쇼트에서는 기쿠와 오토쿠를 향해 전진하면서 마치 오토쿠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프레임 안에 오토쿠의 표정을 담아낸다.

 

그러한 전환점이 없다면 문턱의 양쪽은 마치 서로 닿을 수 없는 듯 보인다. 오토쿠가 기쿠를 위해 준비한 경대가 2층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기쿠가 오토쿠를 위해 산 옷감이 미처 만들어지지 못했듯이,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 이쪽과 저쪽은 서로 맞닿기 힘든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영화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기쿠가 공연하는 장면에서 관객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 기쿠가 도쿄의 극단에 합류하고 난 뒤에야 프레임 내부에 관객들이 등장한다. 자질 없고 인기 없는 기쿠에게 있어 유일한 팬은 오토쿠였다. 미조구치 겐지는 마치 기쿠를 진심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오토쿠밖에 없었던 것처럼 관객을 화면에서 생략한다. 이와 함께 겐지는 오토쿠가 기쿠의 연기를 보는 모습 또한 의도적으로 비워낸다. 오토쿠는 자기가 기쿠의 연기를 봤다고 몇번이고 말하지만, 우리는 기쿠의 연기를 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오토쿠는 관객석에서 물러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기쿠를 바라보는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쉽사리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기 힘든 위치에 놓인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거울을 쳐다보지만, 우리는 거울 속에서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인물의 응시를 스크린을 향한 우리의 응시와 일치시킬 수 없는 그저 무대 밖 관객일 뿐이다. 미조구치 겐지는 등장인물들의 공간을 통해 삶과 감정의 형상을 빚어내면서, 오로지 그들만이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의 자장(磁場)을 만든다.

 

    인물들의 운명은 이미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오토쿠와 기쿠가 거치는 삶의 경로는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앞서 발화된다. 기쿠가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니 유랑극단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니 진짜 그렇게 된다. 오사카에서 앞으로 잘할 것을 다짐하는 기쿠가 오토코에게 성공한 이후에 관해서 묻자 오토쿠는 대답을 하지 못했듯이 그녀는 기쿠의 도쿄 귀환과 성공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 미조구치 겐지는 마치 인물들의 운명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예정된 듯 그린다. 인물을 둘러싼 세상의 시선이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는 탓에 쉽사리 잔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일까. 겐지의 시선은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지만, 자기도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듯 인물들의 고난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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