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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목화솜 피는 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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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솜 피는 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경욱(영화평론가)
신경수 감독이 연출한 <목화솜 피는 날>의 주인공 병호(박원상)는 10년 전, 세월호 참사로 둘째 딸 경은을 잃은 유가족이다. 병호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피해자 가족협의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은 조급해지고 몸은 점점 지쳐가다가 쓰러져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병호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기억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고통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조각조각 흩어진 채로 끊임없이 병호를 습격한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경은이 급히 등교하는 바람에 먹지 못했던 미역국을 다시 접하게 될 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팽목항의 바다를 보게 될 때, 병호는 조각난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여기저기 헤매던 병호는 마침내 인양된 세월호에 도착한다. 경은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그 장소에서 조각난 기억이 온전하게 되돌아온다. 병호의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점점 커져 통곡이 된다. 아마도 경은이 세상을 떠난 다음 처음 흘리는 눈물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가장으로서 병호는 아내와 큰딸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또 사람은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그 감정을 적절하게 표출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에서, 유괴된 아이가 끝내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신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이의 시신을 화장하는 순간에도 다른 가족들은 오열하는데 신애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시어머니는 “너는 눈물도 없냐”며 비난을 퍼붓지만, 사실 신애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슬퍼서 울지 못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아이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자칫하면 멘탈 붕괴에 이를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상실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감정을 마비시켜 그 충격이 몸과 마음에 침투하지 못하게 방어한다. 아이를 상실한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신애는 감정을 마비시키고 슬픔과 고통을 차단한 것이다.
충격과 마비 다음에 오는 건 분노의 감정이다. 분노가 점점 증폭되면 공격성으로 표출되어 격노에 이르기도 한다. 병호가 피해자 가족협의회에서 열심히 활동한 이유에는 딸을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방어기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납득할 만한 사고로 자식을 보냈다 해도 부모는 자책과 분노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세월호 참사에는 사고의 원인부터 책임자 처벌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너무 많다. 특히 배가 침몰하고 있는 게 명확한 상황에서도 승객들에게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스무 번이나 넘게 계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탈출하라’는 방송을 제때 했다면 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조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월호 피해자 부모들이 자식을 떠나보내는 ‘애도 작업’은 너무나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병호가 과격한 행동을 하고 격노 끝에 기억을 잃고 미친 사람처럼 헤매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며,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마침내 병호는 세월호 안에서 경은과 마주하게 된다. 한쪽 운동화를 잃은 경은에게 병호는 바다에서 건져낸 나머지 운동화 한 짝을 신겨준다. 누워있던 경은은 일어나 병호의 뺨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건넨 다음 빛 속으로 사라진다. 딸을 떠나보낸 병호가 갑판 위에 올라가 울부짖으며 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를 때, 비로소 애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은의 엄마 수현(우미화)은 살아있는 남편마저 잃을 수 없기에 갑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병호를 감싸 안는다. 그들의 봄날은 딸의 죽음과 함께 끝나 버렸지만, 그들은 더 이상 슬픔을 참지 않고 울음이 나면 눈물을 흘리면서(슬퍼하기는 애도 작업의 핵심이다), 온 힘을 다해 다시 삶 속으로 뛰어들기로 한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로 304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22년 10월 29일,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또다시 159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인재(人災)에 의한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각종 참사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억울한 희생자들과 한(恨) 많은 유가족들만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목화솜 피는 날>의 병호 가족은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의 끈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과 현실의 모든 유가족들)에게 무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면서,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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