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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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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아카이브 특별전 <메콩호텔>201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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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영화
김민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1.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으로부터 얼마간의 대화가 들리고, 곧이어 기타 소리가 이어진다. 호텔 옥상 장면을 경유하고 나면, 기타를 들고 있는 남성과 맞은편의 감독이 등장한다. 잠깐 이야기를 멈췄다 이어가는 두 사람. 메콩 강을 둘러싼 구전 설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메콩 호텔>의 오프닝은 단순히 영화가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있다고 말하는 것만은 아닐 테다. 음악의 선율과 함께, 같이 담긴 이야기들을 ‘영화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일종의 뮤지컬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마치 가사 같고, 툭툭 끊겨진 내러티브의 공백은 잃어버린 전설의 한 부분 같다. 이렇듯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던 전승의 장으로 초대한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영화라는 매체가 다른 감각의 세계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현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현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영혼의 영역인 것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집중해서 보아야 할 것은 아피찻퐁의 시도 방식일 것이다. 그는 물리적으로는 서로 영향을 줄 수 없는 세계를 설정한 다음, 그것을 다시 영화적으로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방식을 취한다. 즉 연관이 없거나 혹은 맥락을 소거함으로써,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인식시킨 다음, 한 데 뒤섞어버리는 것이다. <메콩 호텔>을 예로 들어보자. 오프닝에 등장하는 기타리스트와 감독은 리허설의 영역, 혹은 유령과 인간의 영역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리허설의 공간이든, 메콩강이 흐르고 있는 공간이든 어디에서도 물리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프닝과 중간의 잠깐을 제외하면, 카메라 앞에 등장하거나 이야기에 관여함으로써 다른 세계와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제시되는 것들은 어떠한가. 기타리스트의 기타 선율은 영화 전체에서 흐르고, 감독은 리허설 하는 배우를 카메라 뒤에서 찍는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들은 메콩강의 수면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메콩강은 공간의 배경으로 내내 등장한다. 영화 내의 것들만 뒤섞이지 않는다. 영화 밖의 존재들, 예컨대 삶과 죽음, 영화와 현실, 예술과 예술 간의 경계도 흐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태국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폽’ 이라는 유령의 존재는 실재의 인물들과 구분되지 않고 뒤섞이고, <엑스터시 가든>의 리허설을 촬영하는 장면들로 구성된 영화는 나중에 와서는 정말 리허설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다. 이처럼 아피찻퐁은 영화에 다른 감각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동안 영화 안에서 발견되지 못했던 존재들을 기록하고 체험시킨다. 그것은 그가 영화를 통해서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이자 과제이다.
2.
<메콩 호텔>은 ‘흐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역사가 흐른다. 물론 이것은 한국어에서만 있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언어의 기표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들의 물성이 영화의 성질과 닮아있다는 점이다. 한번 시작되면 그 흐름을 끊을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은, 초당 몇 개의 이미지가 ‘흘러가면서’ 만들어내는, 영화라는 존재를 오롯이 체험하게 만든다. ‘흐른다’는 행위는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윤회’의 성질과 맞닿아있기도 하다. 아피찻퐁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영혼이 흘러들어 가는 모습을 통해 윤회라는, 불교적 관념이 가지는 운동방식을 감각시키려고 한다.
이는 아피찻퐁의 전작들과도 다르게 인식되는 지점이다. 모든 존재들은 연결되어있다는 사상이나 윤회를 체험시키고자 하는 방식은 여전하다. 그것은 <메콩 호텔>에서도 유효하지만, 두 개의 영화가 서로 합일되어가는 과정(<열대병>(2004), <징후와 세기>(2006))이나 분절되어있는 스크린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엉클 분미>(2010))이 아닌, ‘메콩 호텔’이라는 동일한 공간을 매개로 합일된다. 여러 곳에서 존재하던 카메라는 이제 한 군데의 공간에 정착해서 역사가, 존재가, 영화가 무수한 형태로 변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는 자신이 품고 있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려고 한다. 그게 때로는 정지의 형태(<열대병>)일수도, 분리의 형태(<엉클 분미>)일수도 있고, 흐르는 형태(<메콩 호텔>) 일수도 있는 것이다. 무수한 형태로 변하는 윤회처럼, 아피찻퐁은 자신의 작품마저도 윤회시키려고 하는 것만 같다.
3.
그러나 무엇보다 아피찻퐁의 영화가 위력적인 지점은, 시적인 감각으로 영화를 구성하면서도 이상적인 예술 세계로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바라보고 있거나 내딛는 공간의 역사와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리허설을 준비하는 폰은 라오스로 돌아가려는 불상에 대한 전설을 말하고, 통의 어머니는 자신이 군사 훈련을 받았던 시절과 난민으로 흘러들어왔던 라오스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르게 외부의 지원을 받는 것을 질투하던 감정을 증언한다. 셋은 또한 강물이 범람해오는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피찻퐁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흐르고 있던 카메라는 그들이 증언할 때만큼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그들의 증언이 자신의 예술적 야심으로 인해 잠식하지 못하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아닌가. 메콩강을 둘러싸고 존재했다가 사라져버린, 기록되지 못한 유령들마저도 아피찻퐁은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목적은 어쩌면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 것은 아닐까. 잊힌 존재들을 끊임없이 다른 모양으로 기록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아피찻퐁은 완고한 다큐멘터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 환상적인 세계를 꿈꾸면서도 차가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라는 매체가 구현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선(善)을 시도하는 것만 같다. 여전히 메콩강의 강물은 흐른다. 그렇게, 아피찻퐁의 영화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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