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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소통’과 ‘평화’의 공간, <판문점>2024-07-09
영화 <판문점> 스틸컷 이미지



‘소통’과 ‘평화’의 공간, <판문점> 


김경욱(영화평론가)


송원근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판문점>(2024)의 주인공은 ‘판문점’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판문점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초가집 몇 채뿐인 작고 오래된 마을이었다. 1951년 10월 25일, 남북의 휴전회담 장소로 채택되면서 판문점은 역사적인 공간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이곳에서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판문점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영화 <판문점> 스틸컷 이미지2


그런데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선적리 359, 서울특별시에서 서북방으로 62km에 있는 지금의 판문점은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km 이전한 곳이다. 원래의 판문점이 휴전선보다 북측에 있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자 유엔군 측에서 위치를 이전하자고 제안했고, 그 결과 1953년 10월, 군사분계선 상에 새로운 판문점이 설정되었다(옛 판문점은 ‘정전협정조인장’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견학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남과 북은 새로 만들어진 판문점을 공동경비구역으로 하고,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서 문제가 생기면 군사정전위원회를 열어 대화를 통해 해결을 모색했다. 영화에서 한모니까 교수는 “회담하는 곳, 접촉하는 곳, 소통하는 곳, 이런 곳의 성격이 부여되어서 오늘날의 판문점의 위치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판문점은 남북 또는 북미 간에 평화를 논의하고 유지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을 때,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 판문점을 통해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갔을 때,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함께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 때, 접촉과 소통과 평화의 공간으로서의 판문점의 의미는 크게 부각 되었다.


영화 <판문점> 스틸컷 이미지3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판문점을 둘러싼 상황은 오히려 점점 더 나빠졌다. 1967년 11월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민간인 통제구역에 철조망 설치 작업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비무장지대에서 양측이 충돌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경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와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안보 공백을 막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남과 북의 경계의 벽은 높아져만 갔다. 1975년 6월 30일, 미군 핸더슨 소령이 북한군 군인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에 이어 다음 해인 1976년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유엔군 두 명이 살해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분단국의 유일한 완충지대로서 남과 북의 구분 없이 유지되던 판문점에 연석으로 남과 북을 가르는 구획이 만들어졌다. 남과 북의 군인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상대방의 전역을 서로 축하하기도 했던 판문점은 협상 장소의 테이블까지 가를 정도로 완전히 둘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협상 장소로서의 판문점의 의미는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영화 <판문점> 스틸컷 이미지4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의 모색은 이른바 진보 정권 시기에 훨씬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햇볕 정책’을 펼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4일, 분단 이후 최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다. 보수정권 시기인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남북 관계는 후퇴하고 경색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북한과의 대화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특히 문재인 정권에서는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 선언’에 이어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능라도 경기장의 15만 명의 북한인들을 앞에서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을 연설하는 이벤트를 펼쳤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 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다”는 웅변과 일련의 이벤트를 통해 종전선언과 한반도의 영구평화를 위한 굳건한 토대가 마련될 거라는 희망이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만에 희망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평화를 위해 남북한 간에 구축된 모든 것이 급속히 거꾸로 되돌아갔다. 결국 정전협정 70주년이었던 2023년 11월, 9·19 남북군사합의가 파기되면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화 창구였던 판문점의 역할까지 거의 멈추게 되었다. 


영화 <판문점> 스틸컷 이미지5


영화는 판문점의 원래 의미와 역할을 되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지만, 결말은 매우 비관적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판문점에서 남북한 관계자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이 나열된다. 그런 다음 영화는 “2024년 현재 판문점에서는 평화를 위한 어떠한 논의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멀리서 판문점을 찍은 화면은 마치 죽은 공간처럼 깊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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