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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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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시대 '장 르누아르 감독론'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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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장 르누아르를 본 적이 없다면
장지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장 르누아르는 그 이름만으로 이미 영화가 되었다. 영화사에 있어 그는 이견 없는 거장이고 전설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글을 쓰면서도, 그를 소환한다는 것 자체로 영화라는 예술의 복제성은 행복한 미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글 보다는 그냥 함께 보아요! 라며 한발 물러서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장 르누아르 같은 상대를 만난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이들은 적이 없어 도리어 공공의 적 같이 다가오는 이들이다. 글의 목적이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함이라는 게 아니라, 같은 편의 누군가가 이미 먼저, 훌륭히 써왔던 그 끄트머리에라도 서 본다는 건 행운이자 동시에 급히 핑계를 찾아야 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단순하고도 조악한 핑계 하나. 이 글은 ‘당신’이 읽었으면 한다. 르누아르를 처음 접하는 당신이, 옛날 흑백 영화에 취미가 없었던 당신이, 서사의 속도감에 현혹된 요즘 영화에 지쳤던 당신이. 나는 지금 일종의 여행을 제안하는 것이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가 떠났던 파리의 그때로부터 혹은 10년쯤 뒤로 이어지는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장 르누아르라는 이름은 더없이 훌륭한 기차표이기도 하니 말이다.
<야수 인간>에서의 기차
말이 나온 김에 기차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기차와 영화는 태생적으로 이복형제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산업화를 연 상징과도 같은 기차라는 발명품과 그 연장에서 기술 복제의 시대를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펼쳐놨던 또 하나의 발명품인 영화, 둘 다 모두 대중에게는 획기적인 선물이었다. (뤼미에르의 초기작에 기차가 등장한 것도 숙명적인 조우였을 거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기차는 영화가 일관되게 애정을 드러낸, 또 가장 잘 어울리는 피사체 중 하나다.
장 르누아르의 1938년 작품 <야수 인간>도 기차의 매력을 한껏 잘 드러낸 영화다. 여주인공 세브린느가 남편 루보에 이끌려 기차에서 그랑모랭을 살해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마침 복도에 서 있던 주인공 자크를 만난다. 이때 승객 칸과 복도 사이에 선 자크와 그의 뒤로 깊이 있게 드러나는 기차 내부는 그 자체로 한 장의 훌륭한 사진이 되어 준다. 주인공 자크가 기관사라는 배경적인 설정을 넘어설 만큼 이 영화에서는 여러 순간 기차나 역사의 장면이 다채롭게 등장하는데 기차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영화 초반 속도감 있게 달려나가는 기차의 시점 장면이라든지 달리는 차량의 앞머리에 고개를 내밀고 전방을 주시하는 자크의 모습을 떠올리면 진취적인 산업화의 현장과 기차를 조종하는 노동자의 강인함이 엿보인다. 자크가 세르빈느를 죽인 뒤 죄책감에 휩싸여 고뇌하는 표정으로 어두운 철로 위를 걸을 때, 동료에게 자신의 살인을 털어놓은 뒤 끝내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달리는 열차에서 스스로 투신하기까지의 연속된 장면들에서도 자크는 기차 또는 기차 역사 어디쯤에 위치한다.
<야수 인간>에서 기차는 인물들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정차된 열차들 사이에서 세르빈느의 요청으로 그녀의 남편을 죽이려고 시도하다 실패하는 장면에서 르누아르의 카메라는 기차들 사이를 오가고 철로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비치는 자크의 모습 등을 끊임없이 포착하며 그의 혼란스러운 심리와 긴장된 상황을 절묘하게 담아낸다. <야수 인간>에서 기차는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지만 굳건하고, 다른 한편 불안함도 느껴지는, 자크의 또 다른 몸처럼 느껴진다. 기차가 영화의 발명과 함께한 숙명적인 피사체라고 한다면 르누아르는 <야수 인간>에서 이 둘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해보겠다는 듯이 기차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기차라는 숙명에 대구하는 운명적 과제는 따로 있다. 장 르누아르에게, 아니 영화에 주어진 그것은 아마 카메라일 것이다.
르누아르의 카메라, <게임의 규칙>(1939)과 <거대한 환상>(1937)
르누아르의 영화는 움직인다. 모든 영화는 움직임의 연속이지만 르누아르의 영화에서는 배우와 배경뿐만이 아닌, 무엇보다 피사체를 정해두고서 움직이는 것도 아닌, 살아 움직이는 카메라를 확인할 수 있다. 장 르누아르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카메라의 이동과 심도, 미장센과 같은 묘사들은 한 마디로 르누아르의 카메라로 귀결된다. 그의 대표작 <게임의 규칙>(1939)에서는 저택에서 연회가 열리는 가운데 비행사 앙드레와 크리스틴, 그녀의 남편, 그리고 하인들이 얽혀 동시다발적인 충돌이 일어난다. 관객은 이들의 전쟁 같은 ‘사랑 게임’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때 르누아르의 카메라는 싸움의 이유도 발단도 제각각이며 신분도 다른 이들의 고성과 주먹다짐, 총소리로 이어지는 전개를 더없이 자연스럽게 훑는다.
<게임의 규칙>의 카메라는 주인공이라는 관습적인 대상에 소실점을 부여하는 대신 저택이라는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공간 안의 인간 군상을 조명한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무엇을 조명하고 집중하는 것에 따라 관객의 집중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카메라는 그 스스로 권력이다. 따라서 카메라가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가는 권력의 향방을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거대한 환상>(1937)에서는 독일 포로수용소에 갇힌 프랑스 군인들이 공연을 위해 무대 의상을 마련하는데, 한 남자가 여성 복장을 입고 나온다. 바보 같다고 투덜대며 걸어 나오는 그 남자를 포로수용소 안의 모든 남자들이 말없이 쳐다보는데 그들이 응시하는 동안 흐르는 정적은 장면 안에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응시하는 행위가 일으키는 힘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관객을 향해 질문한다.
카메라로 찍는 것과 카메라를 드는 것, 무엇을 포착할 것인가와 포착하는 행위가 발휘하는 책임에 대해 르누아르는 그의 영화 안에서 성찰적이고도 우아하게 답을 찾아왔다. 그 결과 관객은 르누아르의 시선에 보다 잘 공감할 수 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자신의 품위와 서로에 대한 존경을 잊지 않는 독일 장교와 프랑스 장교의 모습에도, 사라져 가는 계급 문화의 끝자락에서 귀족과 시민계급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신의 벽과 그것을 뛰어넘는 희생에 대해서, 국경을 넘어서는 포로들을 발견하지만 그들 스스로 저곳은 스위스 영토라며 총을 내려놓는 독일군의 멈춤에 대해서도. 르누아르의 이러한 시선을 통해 관객은 그의 카메라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영화가 비단 주인공의 영화가 아니며 서사의 영화만이 아닌 그 이상의 함의를 촉발한다면 그건 르누아르의 카메라가 피사체를 조명하는 방식과 범위가 관습의 틀에 빗겨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빗겨선 지점에서 장 르누아르가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연민인 것이다.
르누아르가 연민하는 방법, <랑주씨의 범죄>(1936)와 <거대한 환상>(1937)
<랑주씨의 범죄>는 르누아르의 연민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주인공 랑주는 살인을 저질렀고 영화는 랑주가 살인을 저지른 사정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랑주는 오래도록 피해자였으며 비슷한 처지인 출판사 직원들과 이웃들이 사장의 부고를 듣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조합을 일으켜 세우며 새 출발을 도모하는 시점에 죽은 줄 알았던 사장이 돌아오게 된다. 다시금 자신들의 삶에 어둠이 드리워질 상황을 염려한 랑주는 저항의 총성을 울렸다. <랑주씨의 범죄>에서 카메라는 <게임의 규칙>과 닮아있기도 한다. 바탈라 사장의 출판사를 중심으로 직원과 이웃이 모여 사는 공간은 연극적으로 압축되어 있으며 이 공간을 장악한 카메라는 수직과 수평을 넘나들며 커다란 원을 그리듯 영화 속 세계를 유영한다.
약간의 배경설명을 하자면, 이 영화를 만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정세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은 우파 파시즘이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고 프랑스 내부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극단화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장 르누아르는 프랑스 극우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형성된 인민전선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다. 그즈음에 만들어진 <랑주씨의 범죄>와 <거대한 환상>에서는 시대와 인간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거대한 환상>에서 르누아르는 귀족과 시민, 프랑스 장교와 독일 장교, 프랑스 사람과 독일사람 등 다층적인 관계의 봉합을 시도한다. 이는 개별 신분에 상관없는 새로운 시대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에 대한 르누아르다운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장 가뱅이 연기한 마레샬과 로장탈 등은 <랑주씨의 범죄>에서의 랑주씨와 그의 동료들과 연장선에 놓인 듯한 인물인데 랑주와 그의 동료들이 시도한 자주적인 변화의 시도가 일종의 성공을 거두고 난 다음의 인물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랑주씨의 범죄>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의 방향을 지향한다. 무대를 오가듯 공간을 훑던 카메라가 랑주의 집안으로 들어오면 발렌틴은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노래를 부른다. 또 1층에 사는 다리 다친 청년은 안내판에 가려져 창을 열 수 없었는데 사람들이 힘을 합쳐 안내판을 뜯어낸다. 발렌틴의 노래로 인해 이들이 사는 공간에는 충만한 사랑이 퍼지고, 안내판이 뜯긴 자리에 고개를 들이민 사람들과 지금까지 가려졌던 후경이라는 전망은 청년이 누리지 못했던 세계를 회복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양극단의 시대를 살면서 그 한 축인 인민전선에 참여했던 르누아르가 그의 영화에서 그려낸 세상은 극단보다는 봉합을 시도하고 굴레 속의 구성원이 아닌 인간 본연에 대한 연민을 통해 보듬으려 했다는 점이다. 르누아르의 이 같은 시도는 양극단이 팽배하게 맞섰던 당시에는 온건하다거나 소극적이라는 일부 정치적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록과 상상의 영역에 맡겨야 하는 당시의 시대상은 차치하더라도, 현재 그의 영화를 접하는 우리는 르누아르의 영화와 그의 세계가 목적 지향적이지 않았음을 목격할 수 있다. 르누아르는 노래로써, 막힌 창을 열어줌으로써, 술 취한 할아버지에게 앞마당을 내어줘 비틀비틀 걷게 함으로써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에 속한 여러 군상들을 연민한다. 시대를 살아가며 저마다 추구하는 변화가 희망의 크기 값과 비례한다면 장 르누아르가 그리는 변화와 희망의 크기란 그의 작품에서 스스로 자리매김했던 특유의 빗겨 선 각도와 닮았다.
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흥미로운 이유는 마치 출입구가 여럿인 세상으로 초대받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여느 영화가 그렇듯 한 편의 영화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직조하는 작은 세계가 존재하지만, 르누아르의 영화 속에 앉아 있을수록 장 르누아르에 대해, 그의 영화와 그의 세계에 대해 즐거운 질문이 떠오른다. 영화는 사진과 같이 무언가를 포착하지만 다가가거나 멀어진다. 영화는 무언가를 포착했다가도 이내 옆 사람에게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옮겨간다. 무엇보다 영화는 목적 없이 움직이거나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개별적으로는 의미가 되지는 않더라도 모이게 되면 하나의 세상이 된다는 경험은 목적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세계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세월이 퇴색시키지 못하는 세계, 장 르누아르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이고, 줌인/줌아웃 하는 회화이며, 멈춰있는 무용이고, 연기 너머의 연극이다. 무엇보다 연민하는 카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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