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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기억으로 기억되는 진주(Pearl)들을 위해 - 영화 <진주의 진주>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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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기억되는 진주(Pearl)들을 위해 – 영화 <진주의 진주>
송아름(영화평론가)
기억은 분명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그때의 무엇을 붙잡아주는 것은 기억 그 자체라기보다 당시에 보았던 누구 혹은 무엇, 그 순간에 흘러나오던 음악, 그것을 들을 때 느껴지던 감촉이나 공기의 냄새,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공간과 같은 것들이 기억을 존재케 하는 실체일 것이다. 이를 붙잡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는 일은 이제 기억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래서 이 상실의 슬픔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아니, 깊고 넓어야만 한다. <진주의 진주>가 붙잡고 있는 곳, ‘삼각지 다방’이라는 공간을 지키려는 분투는 이 상실을 겪고 싶지 않은 이들의 투쟁기일 것이다.
영화 <진주의 진주>가 그려낸 장면들은 무수한 상실을 상기케 한다. 주인공 진주가 기억을 더듬어 만들려던 영화는 촬영 장소로 약속된 카페가 철거되며 갈 곳을 잃고, 대안을 찾으려 도착한 경남 진주에선 예술인들의 터전과도 같았던 다방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 연극과 미술, 음악인들의 열정이 서린 삼각지 다방은 영화의 열정까진 남아내지 못할 상황 앞에서 갈등의 원인이 될 뿐이다. 물론 그 이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이 공간을 이런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 조금이라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으로의 전환. 영화는 이를 우악스럽고 계산적인 상황으로 그려내기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충분히 설명하며 이 공간을 지키려는 이들의 분투를 역시 배치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진주의 진주> 속 기억들이 비단 공간의 가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으로도 제시된다는 점이다. <진주의 진주>에서 삼각지 다방을 놓고 싶지 않은 이들이 기대는 것은 이곳이 무조건 지켜야 할 공간이라는 당위이다. 다방을 지키는 것은 어떠한 법적 이유가, 혹은 경제적 부흥이 전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을 지키려는 이들이 택한 방법도 그 공간을 지켜오던 몸들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직접 플래카드를 쓰고 붙이며 담당자를 찾아가 목소리를 높이고 호소했다. 이 모든 것은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이미 힘을 잃어버린 방식들이었는지 모른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은 어쩌면 그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낙오와 등가에 놓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진주의 진주>가 중요하게 그려낸 기억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렇게 특별한 이유 없이 중요한, 누적만으로도 순진하게 가치를 지녔던 그래서 분명 낡았음에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들, 이것이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또 누군가에겐 삶이었으며, 누군가에겐 바라마지 않는 무엇을 얻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확신. <진주의 진주>는 ‘삼각지 다방’과 이를 지키려는 이들의 낡은 방법 속에 이 많은 가능성과 기대를 담아두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삼각지 다방의 간판을 다시 켜며 그리고 아직 이 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한 다방 주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그려내며,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기억들을 사라질지 모르는 무엇을 지키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주인공 진주의 옷깃에 묻어 있던 페인트 자국이 그곳을 떠날 때까지 남아있던 것처럼 결코 쉽게 지워낼 수 없는 것으로 말이다.
<진주의 진주>가 소재로 삼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처럼 조금은 낡아버린 기억 속에 놓여 있다. 장소 헌팅조차 쉽지 않은 옛 기억을 영화로 만들려는 신인 감독, 지금의 전부인 양 열심히 연습하고 있지만 몇 명의 관객 앞에서 선보이게 될지 짐작도 할 수 있는 지역의 작은 극단, 관광지로도 특정 지역으로도 뇌리에 깊이 새겨지지 않은 지방의 한 소도시 등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멸이라는 섬뜩한 명칭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허물고, 새로 지어,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강요가 발전이라는 이름으 로 기억을 위협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비록 한물간 논리를 펴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너무 오랫동안 쌓아오며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특별한 설명을 할 수 없는 그 자체가 가치라는 것을 영화는 투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주의 진주>는 처음 진주를 내려간 이의 시선을 통해 현재의 상실이 나와 우리의 것이라는 시선을 좀 더 명확히 했다. 그리고 그 상실을 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지워질지도 모를 기억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하려 했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지키는 방식은 생각보다 촌스러울 것이라고, 그만큼 아무 이유도 없이 달려들어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거라고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그래도 다행히 바라던 결말을 보여주었다. 물론 현실에선 과거의 진주(Pearl)는 더 이상 진주가 아니라며 무수한 울타리를 펼쳐댈 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과연 우리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굳이 가치를 따져가며 남겨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꽤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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