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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샤인>,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위한 기도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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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위한 기도
김경욱 (영화평론가)
박석영 감독이 연출한 <샤인>(2023)의 주인공 예선(장해금)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혼자 남겨진다. 라파엘라 수녀(장선)와 스텔라 수녀 그리고 절친 다희를 비롯한 친구들은 16살 소녀 예선을 걱정한다. 동정을 구하고 싶지 않은 예선은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던 예선은 문득 할머니의 유언이 궁금해 임종을 지켰던 라파엘라 수녀에게 물어본다.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 라파엘라 수녀는 얼마 뒤 생각이 났다면서, “예선이가 밝고 환하게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할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만일 할머니가 진짜 유언을 남겼다면 예선에게는 매우 중요한 말이기에 라파엘라 수녀가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관객은 라파엘라 수녀가 들려준 할머니의 유언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챌 수밖에 없다. 예선도 그 거짓말을 알아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라파엘라 수녀의 진심을 알기에 예선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말다툼했던 다희와 화해하고 두 수녀와 친구들과 함께 소풍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등, 예선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 의해 성당에 버려진 6살 아이 새별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혼자 마을을 돌아다니던 새별은 치매 걸린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예선의 집에 오게 된다. 예선은 새별을 보자마자 마치 잃어버린 친동생을 다시 찾은 듯 이상할 정도로 애착을 보인다. 새별을 딴 데 보내지 않고 함께 살려고 수녀들에게 새별이 삼촌의 딸이라고 거짓말까지 만들어낸다. 예선은 떠나간 할머니가 남긴 빈 공간, 메울 수 없는 공백을 느닷없이 등장한 아이를 통해 채우려고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예선은 진짜 괜찮은 게 아니라 해소되지 않은 정서적 문제를 억압해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선이 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야 했는지, 부모는 어떻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새별이 치매 걸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예선의 집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예선이 그렇게 할머니와 살게 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게 된다. 여기서 예선이 할머니의 유언을 궁금해했던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사실 할머니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예선이를 생각할 겨를 없이 “살려달라”는 말만 하며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라파엘라 수녀의 거짓말을 통해 예선은 의식에서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무의식에서는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떠난 할머니를 원망하며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려졌던 상처를 떠올렸을 것이다. 예선의 고통에는 할머니를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다시 버려졌다고 여기는 내면의 어린 예선의 고통이 중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선은 주변 사람들에게 새별이가 자기 어렸을 때와 많이 닮았다고 하며, 그 아이를 마치 자신의 어린 분신처럼 대한다. 이러한 예선의 태도를 심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새별은 예선의 ‘상처받은 내면 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선이 새별을 엄마처럼 살뜰하게 돌보는 시간은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 내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얼마 뒤, 딸을 버리고 괴로워하던 여자가 새별을 찾아 성당에 나타난다. 거짓말은 들통나고 새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예선은 새별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한다. 새별을 등에 업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예선은 문득 멈춰 선다. 그런 다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새별은 엄마에게 가고, 예선은 다시 혼자가 된다.
예선이 겪어야 하는 상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라파엘라 수녀는 가슴을 치며 탄식한다. 그리고 원망하듯 하나님께 질문하며 울부짖는다. “그 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 건 또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다 뜻이 있으시겠죠?” 이 장면에서 왼쪽을 향한 라파엘라 수녀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는 오른쪽을 향한 예선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로 연결된다. 두 인물이 마주 보는 것처럼 편집된 것이다. 이때 예선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원망 대신 참회하며, 새별이와 라파엘라 수녀와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예선이 기도하는 장면은 라파엘라 수녀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를 잃고 할머니마저 잃은 건 예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새별을 돌려보내기로 한 건 예선의 결정이다. 살아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상실과 포기의 연속인데, 특히 포기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그 어려운 포기를 할 수 있을 때, 나이에 상관없이 인간적인 성숙이 뒤따른다. 예선은 새별을 만나 잘 돌봐준 다음 새별을 위해 떠나보낸다. 자신의 내면 아이와 대면하고 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예선은 라파엘라 수녀가 지나갔던, 햇볕이 비치는 길을 혼자 걸어간다. 아마도 예선은 아픈 성장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혼자서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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