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고다르의 60년대 '장-뤽 고다르 감독론'2019-06-10
-
고다르 영화와 안나 카리나 : 자신의 삶을 살다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1.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경유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그것은 얼마 전 타계한 누벨바그의 또 다른 거장, 아녜스 바르다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바르다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공동 연출자 JR에게 누벨바그 동료면서 ‘길게 만난’ 친구 고다르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자신이 연출한 영화 한 편을 보여준다.
바르다의 1962년 작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에 삽입되었으며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무성영화 형식의 단편 작품이다. 고다르와 카리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커플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 바르다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JR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던 것처럼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의 이야기도 고다르가 쓴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생긴 오해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얼마간 황당한 줄거리의 이 단편에는 특히 뤼미에르가 떠오르는 물뿌리개 장면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초기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고다르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무성영화 시대의 위대한 코미디언 해롤드 로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제일 먼저 발견되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일의 행복함과 젊음의 활력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즐거움이 있다.
2. 누벨바그
고다르의 초기 경력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 역시 그렇다. 1962년 <비브르 사 비>의 제작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그의 초기 영화들의 핵심이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는 톰 밀른의 질문에 고다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덧붙이기를 “나는 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삶을 알지 못했고, 나의 처음 영화들은 ‘시네필들의 영화’, 영화광의 작품이었다. 나는 세계, 삶 혹은 역사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관련해서 사물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고다르만이 아니라 누벨바그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맨 앞줄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영화를 보던 청년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에 비평문을 기고하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트뤼포의 말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최종적인 단계였다.
고다르에게 영화 만들기는 비평 행위의 연장기도 했다. 그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글로 하던 것을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갓 제작하기 시작하던 시기 고다르의 영화 만들기는 장르에 대한 일종의 비평 행위였다. 고다르는 필름 느와르(<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국외자들>(1964)까지), 심지어 뮤지컬(<여자는 여자다>1960)), 또 카리나와 함께 했던 거의 마지막 시기에는 SF(<알파빌>(1965))까지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시기 고다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또 한 가지는 배우였다. 그는 그의 작업에서 배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배우의 얼굴을 찍는 것은 그 일이 영화에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그 얼굴 뒤에서 다른 무엇인가가, 즉 배우의 진짜 얼굴이 나오기 때문이다.”
3. Vivre sa vie
고다르가 안나 카리나를 처음 본 것은 텔레비전 샴푸 광고에서였다. 고다르는 카리나가 그의 영화에 출연해주기를 원했는데 처음에 카리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고다르와 카리나가 함께 한 첫 번째 작업은 <작은 병정>(1963)이다. <작은 병정>은 <네 멋대로 해라>에 이어 1960년에 완성되었으나 알제리 전쟁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의해 <비브르 사 비>(1962)보다도 늦게 개봉하게 되었다. <작은 병정>의 브뤼노(미셸 쉬보르)는 베로니카로 분한 카리나에게 어째서 배우가 되려는 거냐며 배우가 되려는 건 웃기는 짓이고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고다르 영화 속 캐릭터를 고다르와 곧장 동일시 할 순 없겠지만) 브뤼노의 이런 대사는 당시 호감의 대상이던 카리나를 자신의 영화에 기용하려는 고다르의 태도를 모순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브뤼노가 “얼굴을 찍는다는 건 그 뒤의 영혼을 찍는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는 고다르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말로 표현했던 것처럼 카리나의 표층의 이미지에서 심층을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비브르 사 비>에서 고다르가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비브르 사 비>는 배우로서 연기하는 카리나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찍고자 한 작품이다.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가 진 세버그의 옆모습으로 끝났기 때문에 <비브르 사 비> 역시 카리나의 옆모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비브르 사 비>의 얼굴과 <네멋대로 해라>의 얼굴이 이어져야 한다는 아이디어의 근원은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 이후 <경멸>을 제작할 때 브리지트 바르도가 아니라 킴 노박을 캐스팅하려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기증>에서 킴 노박이 연기한 매들린은 그녀와 닮은 이를 흉내 내기를 요구 받은 인물이다. 이것은 배우의 본질이기도 하다. <비브르 사 비>는 느와르의 캐릭터를 참조했던 진 세버그로부터 영화를 참조하지 않은, 무엇도 흉내 내지 않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나나의 분투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의 삶이란 고다르에게 여전히 영화를 통한 삶이고 어쩌면 영화 자체다. 고다르의 작품에서 카리나가 주연하지 않은 작품의 여성 배우들의 외양은 카리나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령, 안나 카리나와 가장 먼 이미지를 가진 것 같은 브리지트 바르도조차 <경멸>의 한 장면에서 마치 카리나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카리나를 닮은 배우는 안나 카리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카리나는 물론 고전적 영화 스타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아니다. 카리나는 열렬히 사랑을 바치게 만드는 할리우드의 청춘스타와 다르다. 그들과 달리 카리나에게는 모던한 느낌이 있다. 카리나가 지루한 표정으로 레코드를 팔 때,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세대를 보는 것과 같은 생생함과 동시에 잘 모르는, 탐구가 필요한 존재가 출현했다는 느낌을 준다. 카리나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고다르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마찬가지로 탐구의 대상이다. 이 영화에는 고다르의 새로움 혹은 혁신에 대한 갈망과 시네마틱한 아름다움에의 매혹이 함께 있다.
나나가 극장에서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열정>(1928)을 보는 장면은 영화와 영화가 마주보는 장면일 것이다. 스크린 속 팔코네티의 얼굴과 마주한 스크린 밖 카리나 얼굴의 시네마틱한 이 순간, 카리나는 스크린과 대면한 스크린 외부의 존재지만 그 자체로 시네마 내부의 존재로 자신을 현시하고 있다.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에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도입하면서 거리를 둔 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면서 동시에 기존의 영화들과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현실과 영화의 충돌보다 이전의 영화들과 대비되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고다르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던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 스스로 <비브르 사 비>를 시네필로서 영화 만들기의 도착지점이라고 말한다.
4. 영화와 삶의 이중노출
<비브르 사 비> 이후 고다르가 영화를 통해 삶을 바라보던 태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참조하고 변혁시키는 대상은 그 자신의 작품들이다. <국외자들>(1964), <미치광이 피에로>(1965), <아메리카의 퇴조>(1966)와 같은 작품은 고다르가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을 담았던 자신의 이전 영화들을 참조하며 변주하는 것과 같은 영화들이다.
고다르의 삶과 그의 영화의 영향 관계에 대해 제임스 모나코는 <미치광이 피에로>에 대한 글에서 “영화와 삶의 이중노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로부터 삶을 배웠다는 고다르에게 삶이 이제는 사적 차원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삶 바깥으로 확장된다.
그는 그에게 낯선 세계에 대해서도 탐구하기 시작한다. <남성, 여성>(1966)에서 코카콜라와 마르크스 세대라는 새로운 세대의 사랑을 찍을 때 고다르는 카리나를 캐스팅 하지 않는다. 고다르는 3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누벨바그는 더 이상 새로운 세대에 속하지 않았다. 1964년 고다르와 카리나는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고다르는 카리나를 사랑의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대신 사랑을 탐구하는 사람으로 등장시킨다. 카리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알파빌>(1965)에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 카리나와 사적 관계는 끝났으나 작업을 지속했던 이 시기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탐구에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시기인 듯하다.
고다르가 도전해야 하는 대상은 점점 장르라는 영화 하위, 내부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되어 간다. 그의 질문이 이러한 방식으로 변화한 것은 영화로부터 삶을 소개 받았던 그에게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평적 태도를, 비평적 태도로부터 혁신에의 열정을, 영화 컨벤션의 혁신으로부터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일은 그에게 이제 영화 자체의 혁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리나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시기 동안 고다르에게 있었던 영화에 대한 입장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였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는 고다르에게 다시 한 번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의미했다. 고다르의 열정은 정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옮겨갔고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기를 희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다르에게 카리나는 그가 영화와 세계에 대해 가졌던 태도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브르 사 비>에서 나나의 연인이 읽는 책이 아내의 생명과 예술을 바꾼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 앨런 포우의 『타원형 초상화』라는 것은 고다르의 짓궂은 농담처럼도 느껴진다.
5. 검은 안경을 주의하라
바르다의 단편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에서 고다르는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낯선 사람을 카리나로 오인한다. 카리나와 닮은 사람과 벌어진 상황 이후 그는 진짜 카리나를 다시 만나는데 가짜 카리나에게 벌어진 상황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한쪽에는 죽음과 슬픔이 한쪽에는 행복한 결말이 있다. 이것은 고다르가 영화와 삶 사이에서 반복운동을 하던 것과 닮았다. 마치 고다르와 카리나의 여정을 비유하는 것만 같다.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의 또 다른 서사는 이렇다. 고다르와 카리나는 갓 결혼한 아직 젊은 커플이다. 그들은 몇 년 뒤 이혼하게 될 것이고 하지만 그 뒤로도 몇 편의 작품을 더 함께 만들지만 결국 완전히 결별하게 될 것이다.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에 단지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동극에는 어딘지 기괴한 느낌도 있다. 무성영화식 연기를 흉내 낸다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와 슬랩스틱 코미디를 차용한 단순한 트릭 때문이다. 이 소동극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고다르가 안나로 오인한 낯선 여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그들이 처음 헤어진 장소로 돌아왔을 때 안나가 여전히 층계참에 서서 마치 시간이 멈춰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고다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으로 가능한, 일종의 시적 허용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다르가 양쪽 다리를 오가며 반복하는 상황은 삶과 영화의 왕복이 아니라 둘 모두가 영화였던 셈이다.
<맥도날드 다리 위의 연인들>의 부제는 ‘검은 안경을 주의하라’이다. 바르다는 고다르의 검은 안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출발이 사랑에 있었음을 잊게 할까봐 걱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다르가 멀리 나아간 것은 “그 정열의 실체를 더 분명히 알고 싶고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글라스는 영화감독 고다르의 아이코닉한 모습이다. 영화감독 고다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반대편 층계참에 서 있던 연인이자 배우 카리나도 자신의 길을 떠난다. 카리나는 이후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협업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배우로서의 경력을 지속해나간다. 안나 카리나라는 고다르의 실제적 삶에서의 사랑의 대상은 점점 영화적 세계 속에 녹아들어갔다.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던 고다르는 점점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 참고자료 : 『고다르x고다르』 데이비드 스테릿 엮음
『뉴 웨이브2』 제임스 모나코 지음
- 다음글 거장의 예외적 영화들 <해리의 소동>
- 이전글 필름아카이브 특별전 <상하이 제스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