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 이탈리안 클래식 <순수한 사람들>2019-06-28
-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얼굴
<순수한 사람들>(루키노 비스콘티, 1976)
구형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다가감’의 운동 속 얼굴
영화의 초반부, 툴리오(지안카를로 지안니니)가 본처인 줄리아나(로라 안토넬라)와 함께 연회장에 나타나자 질투를 느낀 내연녀 테레사(제니퍼 오닐)는 툴리오에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난 다른 여자와 남자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툴리오는 천연덕스럽게 “당신은 누구와도 날 공유하지 않았어”라고 답하며 테레사에게 성큼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리고 바로 그때,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적 대사와 행위가 오가는 사이, 영화는 갑자기 기묘한 운동을 행한다. 툴리오가 테레사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바로 그 순간, 카메라는 갑작스럽고도 빠르게 (마치 자연다큐멘터리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포착하듯)툴리오의 얼굴에 줌인한다. 그리고 이 줌인, 말하자면 ‘다가감’의 운동은 그대로 툴리오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프레임을 채울 때까지 맹렬히 움직임을 이어간다.
이 줌인은 갑작스럽고 이상한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든 이미지를 포기하고, 오로지 툴리오의 눈빛만을 담겠다는 듯 대담하게 다가가는 카메라의 태도는 몰입을 와해할 정도로 독단적으로 느껴진다. 나아가 그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툴리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어떤 맹렬한 정념 같은 것은 우리를 한층 더 갑작스럽고 당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이후에도 빈번하게 이러한 줌인과 클로즈업을 삽입하며 ‘다가감’의 운동을 지속하고, 강렬한 얼굴의 이미지를 서사의 사이사이에 강건히 새겨 넣는다. 이러한 표현은 관객을 인물의 얼굴 표면에 스며든 적나라하고 진득한 감정 앞에 직접적으로 대면시키고, 그 외의 배경과 상황들로부터 일순간 차단시켜버린다. 말하자면 이 ‘다가감’의 운동으로 구성된 ‘얼굴’이라는 미쟝셴이 일종의 진공상태 같은 것을 만들어, 사건과 공간과 서사를, 심지어 시간마저도 순간적으로 소거시켜 버리고 얼굴의 표면 외에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버리는 것이다.
<순수한 사람들>은 그러나, 이러한 영화적 진공상태를 통해 서사 세계의 내적시계를 일시적으로 멈추면서도 동시에, 서사만을 추동케 하는 카메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보려한다. 여기에 얼굴이 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무언가 격렬히 갈망하거나, 욕망하거나, 욕구하거나, 또는 혼란스러워하거나 회의하고 있는, 매우 오롯한 정념을 내재한 것으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이 찰나의 영화적 진공상태 속에서, 인물들의 요동치는 내면은 흔들리고 혼란스럽게 떠돌면서 얼굴이라는 표면위로 올라와 어떤 감정을, 혹은 심연의 어떤 상태를, 혹은 그 모든 것들이 뭉쳐진 아우라를 강렬하게 가시화한다.
사랑과 죽음 사이
그리고 서사의 틈새에서 나타나는 실재적 운동으로서의 이 얼굴들은 모든 것을 균열내고 일상 곳곳에 내재된 모순과 양면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가령 툴리오는 다르보리오(마크 포렐)를 알게 되면서 의심과 불안과 죽음의 흔적들을 대면하고, 그것이 툴리오를 조금씩 잠식해가기 시작한다. 툴리오와 다르보리오가 처음 만나 펜싱을 하는 장면을 상기해보자. 경기 후 샤워를 하고 나가는 다르보리오를 툴리오는 뚫어져라 쳐다보고, 카메라는 그런 툴리오에게 예의 그 줌인을 하지만, 이때 툴리오의 얼굴에는 질투와 의심이 뒤섞여서 새겨져있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줄리아나와 다르보리오의 관계가 밝혀지고, 다르보리오는 툴리오에게 미지의 침입자이자 일상 기저에 숨은 공포로 변모한다. 툴리오가 줄리아나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며 입을 맞추려 할 때, 동생인 페데리코(디디에르 호드팡)가 갑작스레 펜싱복을 입은 채 노크를 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툴리오에게 빠르게 줌인하며 불안에 떠는 그의 얼굴에 빠져들듯 다가간다. 지금 툴리오에게 문 앞에 선 펜싱마스크를 쓴 남자는, 동생이 아니라 칼을 들고 그를 위협하는 내면적 불안이 현신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 툴리오에게 사랑을 이어나가는 과정은 이토록 돌출적인 의심과 질투가 난무하며, 언제 어디서든 출몰하는 두려움과 대면해야하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다르보리오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툴리오의 내면은 더욱 양극화되고 황폐해져간다. 툴리오는 다르보리오의 죽음에 안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런 동시에 줄리아나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다르보리오의 흔적에 더 큰 질투까지 느낀다. 어쩌면 이기적지만, 한편으론 인간적인 이러한 자기모순으로부터 툴리오는 헤어 나오질 못하고, 점점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미지의 대상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계속해서 자신을 부정하면서, 줄리아나의 대사처럼 “자기 자신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과 사랑과 삶의 이면
다르보리오가 등장한 이후로 툴리오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진공상태는 줄리아나를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으나 점점 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폭력, 그리고 이내 죽음을 품으며 변모해간다. 여기서 툴리오-줄리아나-테레사 셋의 삼각관계가 그저 사랑과 질투를 낳은 스캔들 정도에 불과했다면 툴리오-줄리아나-다르보리오 셋의 삼각관계는 생명과 죽음에의 두려움을 내재하며 아름다운 사랑의 이면을 들춰내고, 그것을 ‘얼굴’이라는 영화적 이미지를 통해서 가시화시켜나간다. 즉 상투적 멜로드라마는 그 틈새에 존재하는 현실의 얼굴이 등장함으로 인해서 바스라지고, 무너지고 만다.
아름다운 것의 이면에는 역설적이고 퇴폐적인 데카당스가 공존한다고 믿었던 비스콘티는 귀족적이면서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적 삼각관계 속에 끊임없이 요동치는 듯한 내면의 불균형과 어두운 이면을 투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툴리오의 자살은 이러한 비극적 멜로드라마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클리셰이지만, 동시에 실재를 마주하고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는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이 선택한 숭고한 결단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가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 다음글 서머 스페셜 2019 <폭풍의 언덕>
- 이전글 이탈리안 클래식 <철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