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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 스페셜 2019 <폭풍의 언덕>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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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두 그림자 : <폭풍의 언덕>
한창욱 (영화평론가)
윌리엄 와일러의 <폭풍의 언덕>(1939)은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원작은 영화와 TV를 통해 여러 번 영상화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이 2011년 버전으로 내어놓았다. 영화가 원작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을 때, 서사에 대한 이해는 원작을 읽어보는 편이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 예를 들어, 히스클리프가 갑자기 부자로 되어 다시 요크셔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해서 그리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는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 부재가 영화의 선택인지 원작에도 그러한지 밝혀야만 그 설명 부재의 의미를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과 영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이 영화의 서사 및 서사적 공백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큰 의미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의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
영화에서 두 주인공,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는 엘렌이 낯선 이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시작된다. 우리는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엘렌의 말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엘렌의 말소리는 조금 특이하다. 분명하게 들리지 않고 낮게 울린다. 일반적으로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령이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는 유령의 말처럼 의도된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유령의 말은 정처 없이 떠도는 목소리다. 이는 히스클리프의 운명과도 닮았다. 그리고 캐시의 운명과도 닮았다. 두 사람은 폭풍의 언덕에 살았지만, 진정으로 그곳에 살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천국’을 상상했고, 그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두 사람은 폭풍의 언덕에 있는 그 집에 산 것이 아니라 페닌스톤 바위의 성에 상상적으로 사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극은 두 사람이 소망하는 천국이 서로 달라지면서 발생한다. 혹은 다르다고 믿으면서 나타난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운명이 극적으로 갈리는 것은 두 사람이 린톤 저택에 몰래 숨어든 순간이다. 캐시와 히스클리프가 각자 자신의 계급성과 욕망에 대해 인식하게 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윌리엄 와일러는 이 공간에 특별한 성질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린톤의 집을 두어 번 엿본다. 창밖에서 창을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만들어내면서 저택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한 카메라는 린톤 저택 방향으로 트랙-인 하며 다가가거나 트랙-아웃 하며 서서히 물러난다. 이런 카메라 움직임에 따라 린톤의 집은 ‘문턱’과 같은 역할을 부여받는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거나, 천국으로 나가는 문. 캐시는 그곳이 자신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천국이 진짜 어딘지 알지 못했다. 히스클리프는 그 문턱을 넘어서서 캐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이 집을 박살 내버릴 거요.”), 자신이 문턱에 갇혔다는 점을 통렬하게 깨달을 뿐이다. 와일러 감독은 두 사람이 함께한 마지막 순간에 린톤 저택의 창문을 연다. 그들에게 열어 젖히도록 한다. 그들이 함께 문턱 너머의 공간을 응시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페닌스톤 바위는 두 사람이 살고자 했던 천국의 성이었다.
원작과 이 영화의 다른 점 중 하나는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의 성격이다. 영화에서 히스클리프는 불같은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관객에게 충분히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이다. 이는 안드레아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히 차이가 난다. 히스클리프를 원작에 가깝게 표현한 쪽은 안드레아 아놀드다. 아놀드는 히스클리프를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과격하고 난폭한 사람으로 그린다. 아놀드는 캐시와 히스클리프에게 일어나는 사건보다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추며 격렬한 정념을 형상화한다. 이에 반해 와일러는 히스클리프를 가난뱅이 집시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핍박받는 인물로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의 동정적 시선을 끌어낸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방인’이라는 점을 미학적으로 탁월하게 시각화한다. 요크셔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의 요청으로 린톤가의 파티에 참석한다. 여기서 와일러는 히스클리프가 그 집에 들어오기 전 카메라 패닝과 트레블링, 거울 이미지를 통해 린톤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꽤 오랜 시간 지켜본다. 그들의 춤사위는 서사 진행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 춤의 시간 사이에 히스클리프가 저택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춤이 곧 끝난다. 카메라가 저택을 사방으로 훑는 사이에 진입한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는 카메라의 역동적 움직임과는 달리 정적이면서 불길한 그림자로 자리한다. 그것은 캐시가 외면하려고 했던 자신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중심은 계급 차이라기보다는 어긋난 두 욕망의 방향을 드러내는 데 있다.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서로 같은 곳을 쳐다보려고 했으면서도 그것에 실패한다. 여기에 두 사람의 비극이 자리한다. 둘은 서로를 지켜봤지만, 서로가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를 자신의 시선 안에 담지 못한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히스클리프가 미국에서 돌아와 린톤가를 방문한 순간이다. 에드가는 히스클리프에게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냐고 묻는다. 이에 히스클리프는 캐시와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로 대답한다. 이 순간 캐시는 히스클리프를 보지 않고 화면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신과 히스클리프의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린 것이다. 두 사람은 린톤가의 파티에서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만, 상대방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시가 바라보았던 욕망의 시선을 외면해왔으며, 캐시는 히스클리프와 자신이 함께 페닌스톤을 향해 바라보았던 시선을 외면해왔다. 캐시는 천사의 날개를 완성하지 못한다. 날개 없는 천사는 결국 추락하고 말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착하지 못하는 시선을 ‘창’을 통해 형상화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시가 에드가와 결혼할 것이며 자신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듣고 창을 깨뜨린다. 그 창은 캐시와 함께 열지 못했던 창이다. 새로운 소작인 락우드는 그 깨진 창에 손을 넣고선 바깥에서 어떤 기운을 느낀다. 그 창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 캐시의 기운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열어야 했던 것은 창이 아니라 문이었다. 와일러의 카메라는 캐시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문을 박차고 달려가는 히스클리프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모습을 멀리서 잡는다. 땅을 가르며 지그재그로 지나가는 히스클리프의 형상은 귀환하지 못할 자의 움직임처럼 보인다. 캐시의 죽음 이후, 폭풍의 언덕에서의 삶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페닌스톤 바위야말로 히스클리프가 돌아갈 곳이었고, 윌리엄 와일러는 마지막 순간에 그곳을 가장 처연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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