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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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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 스페셜 2019 <낭트의 자코>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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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만이 찍을 수 있는 자크 드미라는 영화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1.
<낭트의 자코>(1991)는 자크 드미의 아름다운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담인 동시에 영화에 대한 그의 마음이 움터서 자라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녜스 바르다의 표현에 따르면 (낭트의 귀여운 어린이) 자코는 (예술가로서의) 자크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맺음 하는 지점은 그가 파리의 사진 영화 기술학교에 진학하는 시기를 즈음하게 된다. 이후는 우리가 아는 자크니까, 그의 한 두 마디 구술로도 충분해진다. “거기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여성을 만나 아이를 낳았어요. 지금은 그림을 그립니다.”
또한 영화에는 동료이자 열렬한 지지자로서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의 세계를 향해 보내는 깊은 존중과 신뢰도 함께 깃들어있다. 어쩌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에 관한 사랑을 다루는 영화들은 금방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치트키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낭트의 자코>가 특별해지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화들과 함께한 사람, 그 삶의 주인, 자크 드미를 이 영화의 대상으로 했다는 데서 비롯하고 또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가 아녜스 바르다의 것이라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반려자에 대한 사랑으로 써내려간 정성스러운 주석이 된다. 지금의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내가 알지 못했던 당신의 어린 시절, 앞으로 당신이 남기게 될 빈자리까지, 자크 드미의 전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아녜스 바르다 뿐이다.
죽어가는 자크 드미가 그 누구의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자크 드미의 쓸쓸한 눈이 카메라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시선이 가닿은 장소, 카메라 너머에 있을 아녜스 바르다를, 때로는 그 곁에 함께 있을 믿음직한 동료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크 드미의 어깨 위에 살며시 얹는 아녜스 바르다의 작은 손이 프레임을 온통 커다랗게 메울 때, 나는 사람과 삶과 사랑을 믿을 수 있어진다. 낡고 닳아 외면하기도 하는 가치들이 실재 세계 어딘가에 숨을 쉬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는 건 참 고귀한 일이다.
또한 그 누구의 카메라가 자크 드미의 깊은 눈을, 짧게 깎은 수염들을, 은빛 수풀 같은 머리카락을, 주름진 피부와 병변인지 검버섯인지 모를 조그만 얼룩들을 하나하나 소중한 것처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쓰다듬을 수 있단 말인가. 막 구술을 끝낸 뒤, 카메라가 꺼지지 않았는데도 자크 드미가 별안간 노래를 부르고, 외화면의 집안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평범한 이 사람살이의 풍경 역시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이기 때문에 NG컷으로 버려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는 쇼트인 것을 확신한다. 그렇게 매 순간이 정답고 따뜻하며 애틋하고 아름다운 영화.
2.
영화에서 자크 드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기뇰 인형극이 끝나는 프로시니엄 무대다. 어린 자코는 커튼이 닫히고 사람들이 객석을 떠나는데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직 안 끝났다고, 다시 시작할 거라고, 난 여기 있을 거라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닫힌 무대를 배경 삼아 영화의 타이틀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면 막이 내린다. 그것으로 <낭트의 자코>가 시작되니 자코가 틀리지는 않았다. 이로써 아녜스 바르다는 자코가 그토록 좋아했던 저 무대를 그의 영화 세계와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크 드미에게 영화란 환상이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뚜렷하게 분리하여 양자 간의 개입을 차단하는 구조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형극을 볼 때면 인형들은 가끔 관객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여러분? 그러면 아이들이 큰소리로 나무 밑에 있어요! 하고 대답한다. 이때 프로시니엄 무대는 극의 환영성을 지키려는 폐쇄된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자코는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고 출연을 준비하던 여자를 무대 위 배우들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샤를 페로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당나귀 공주>(1970)에서 국왕 부부가 느닷없이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나도, 슬로우 모션을 비롯한 몇몇 특수효과들이 조악해도 놀라지 마시라. 자크 드미의 프로시니엄 무대는 현실에서보다 많은 것들이 허용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코의 동네에는 드미 정비소를 비롯해 몇 가구들이 모여 사는 집들을 둘러싼 돌담이 있다. 그 사이로 난 출입구 역시 그에게 세상이라는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프로시니엄 무대와 닮았다. 자코는 종종 출입구 근처 뜰에 서서 출입구 바깥을 구경하곤 한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봤던 난쟁이들이 스크린 밖으로 나와 화려한 카니발 행렬로 참여하고, 나치점령기였으므로 군인들도 저 출입구 앞을 지나간다. 새로운 손님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그러니 꿈과 현실은 모두 출입구 바깥, 같은 장소에 기거하는 셈이다.
자코의 가족들은 인형극, 오페라, 영화 보는 것을 즐겼다. 꼬마 자코는 백설 공주를 좋아했다. 청소할 때도 빵을 만들 때도 노래를 불러서다. 이는 어머니와도 일치하는 특성이다. 아버지는 오페라의 유명한 넘버쯤은 가볍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념할 만한 식사 자리에서도 그의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노래를 잊지 않았다. 고급 식당에 가면 멋진 연주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자코에게 음악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자크 드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자 그의 첫 번째 뮤지컬인 <쉘부르의 우산>(1964)은 대사 전체가 노래로 구성돼 있다. 그 같은 결정은 자크 드미에게 있어서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겠다고 짐작해볼 만하다.
물론 그가 전 작품에 걸쳐 뮤지컬 장르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음악과 노래에 대한 애호는 데뷔작 <롤라>(1961)에서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담아내는 카메라는 누벨바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다시피 하는 음악들, 그리고 주인공 롤라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면이 춤추고 노래하는 때라는 점은. <롤라>가 자크 드미의 영화임이 틀림없다는 증명이다. 세 무아(C'est moi), 롤라, 아누크 에메가 캬바레의 홀을 누비며 체현하는 것은 그가 나름대로 기운차게 일궈나간 자신의 생생한 삶이다. 목소리와 표정, 몸과 그 움직임은 관능으로 빛난다. 음악과 관계되지 않은 영화일지라도 최소한 자크 드미의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주요 테마를 한동안 흥얼거릴 수 있는 것은, 미셸 르그랑과 같은 훌륭한 작곡자의 역량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연출자인 자크 드미가 음악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픽션 안에 있는 것들로만 한정해도 장르적 범주화는 불가능하다. 그의 삶이 프랑스 여성운동사의 일부였던 것처럼, 민족, 인종, 경제 등등 분야를 막론하고 그는 약자의 편에 서서 연대해왔고 자신의 입장을 영화에서 표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행복>(1965)에서 완벽한 것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자 주인공은 죽음을 택한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의 주인공들은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의 유대를 쌓았다. 나아가 아녜스 바르다는 종종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를 만들어서 이러한 구분들을 무력하게 했다. 회화, 사진, 설치미술 등등 다른 예술형식들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는 기꺼이 영화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품에 안는다. 따라서 아녜스 바르다와 자크 드미의 세계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아프리카 희망봉과 나의 상관관계처럼 머나먼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작품까지 거론하지 않고 <낭트의 자코>에서만 보더라도 영화의 후반부, 눈 내리던 드미 정비소의 벽 위로 날씨와 햇빛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에 흐르던 비발디를 기억한다면, 아녜스 바르다가 자기 목소리로 시에다 멜로디를 붙여 흥얼거리며 해변을 거닐거나, 더 이상 자크 드미도 없고 바다로부터 밀려온 해초만이 덩그러니 남은 빈 해변 위로 바흐와 함께 엔딩 크레딧을 띄우고 기어이 그것들을 <낭트의 자코>에서 잊을 수 없는 테마로 만들 때, 아녜스 바르다와 자크 드미 두 사람 모두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에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3.
<낭트의 자코>에서 색깔은 흑백과 컬러를 오가고 과거와 현재와 자크 드미의 영화를 넘나든다. 어떤 기억들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법이므로 자크 드미의 어린 시절이 몽땅 흑백필름으로 처리되지 않고 그에게 중요한 장면들, 인상적인 일들은 컬러로 전환된다. 그렇기 에 어린 자코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연극과 오페라를 상연하는 무대, 거리를 꽉 채운 카니발의 화려한 행렬은 언제나 컬러다. 그 풍부한 색깔들은 자크 드미의 영화 속 동화 같은 색채들과도 닮아있다. 또 난생 처음 만나는 고모의 화려한 방문이나, 공습경보와 함께 낙하산을 탄 군인을 구경할 때처럼 찰나에 불과하지만 뇌리에 남는 순간도 컬러로 강조될 수 있다.
하지만 고사리 손으로 연극에 올릴 인형을 만드느라 잔뜩 몰두한 어린 자코의 진지한 얼굴, 서투른 아이의 솜씨가 물씬 나는 종이 인형의 모양을 카메라가 훑어볼 때, 혹은 커튼을 빼고는 다 (아이가) 혼자 만든 거예요, 하고 손님에게 자랑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부엌의 선반 위에 마련된 조그만 극장이 컬러로 나타날 때에는, 그 광경이 너무나 귀엽고 흐뭇한 아녜스 바르다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떤 형태로 영화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 되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나는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 여전히 마음이 더 끌린다. 이를테면 드미 정비소를 오른쪽, 왼쪽으로 안내하는 손가락 표지판의 방향들이 그렇다. 기능적으로는 어린 시절과 자크 드미의 영화 클립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처럼 빨리 감기나 되감기의 표시와 일치할 때가 많지만, 그게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을 재빨리 그만두었다. 방향이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든 이 단순명쾌하고 직관적인 방향 표지판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마음에 든다.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념을 꺾지 않더니 결국 크리스티앙 자크라는 귀인을 만나서 영화공부를 하게 된 자크 드미의 삶이란, 저 표지판처럼 정확한 방향을 알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것일까.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 속 인물들도 운명이나 사랑을 굳게 믿고 따르는 용감한 이들이었다.
어린 자코가 할아버지의 묘비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한 일이 있다.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할아버지에게서 따온 거라고 알려준다. 영화는 그렇게 순환하는 삶에 대한 태도를 견지한다. 금이 가고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졌으며 이끼가 낀 드미 정비소의 벽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건축처럼 세월에 풍화된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신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끝없이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바다처럼 아녜스 바르다는 침착하다. 이후 다른 영화에서 아녜스 바르다 역시 언제나 죽은 자크가 그립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만은 순환하지 않는다. 영화는 영원을 지속하는 매체다. 예술도 그렇다. 그러니 거기에 담긴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 아녜스 바르다와 자크 드미, 그들의 영화, 마음과 태도 역시 변함없이 우리의 마음에 공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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